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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졌던 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감탄할 만한 대담함을 보였다. 곧장 전두환이 내려간 고향 합천으로 검찰 체포조를 파견했다. 언론사가 따라붙었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밤중에 전두환은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질질 끌려나왔다. 결단의 신속함, 법적 권력의 단호한 행사 면에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눈부신 점은 대상을 다루는 권력행사 방식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골목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전두환을 잡범으로 취급했고, 잡범임을 입증해냈다. 전두환이 그렇게 해서 내란의 수괴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우리 세대는 정의의 존재를 조금은 믿을 수 있었다.

  • 김종엽
  • 입력 2015.12.04 06:31
  • 수정 2016.12.04 14:12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장례일에는 첫눈이 내렸는데, 아름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서거를 계기로 그의 정치적 공과와 유산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가 많이 제출되었다. 아마도 공과를 평가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아호가 거산(巨山)인데, 큰 산의 골이 깊듯이 그가 세운 공은 선명하고 높지만 과 또한 깊고 뚜렷하기 때문이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선명야당(鮮明野黨)을 세운 일, 유신시대 내내 치열하게 박정희와 투쟁한 일, 1983년 23일간 단식을 하며 전두환정권과 대결하고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한 일, 대통령이 된 후 하나회를 숙청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일이 공이라면, 3당합당과 외환위기는 대표적인 과오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공과를 함께 살펴 그를 총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듯하다. 그의 정치적 선택이 야기한 귀결이 여전히 깊고 넓으며, 그 영향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에 즈음해 어떤 총괄적 평가를 시도하기보다 그에 대한 내 나름의 초상화를 하나 그리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초상화는 대상에 대한 배타적 진실을 주장하지 않는다. 각도를 달리하여 그를 다시 조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YS와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이른바 386이라는 우리 세대에 전두환은 악의 형상화였다. 80년대 대학생들이 전경을 향해 던진 짱돌과 화염병은 모두 그를 향한 것이었다. 지난해 동창회에서 80년대 내내 학생운동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었던 친구를 만났다. 밤 깊은 시간에 그가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한 말은 "전두환이 처벌받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심정이었지"였다. 하지만 민주화가 되고서도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받지 않았다. 노태우정권 아래서 그는 설악산 백담사에 칩거했는데, 그 시절 그는 마치 영화 「밀양」의 유괴범처럼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러다가 김영삼정부가 출범했다. 그리고 속 시원하게 하나회를 숙청했다. 하지만 하나회의 '그 하나'인 전두환의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한 내란 목적 및 내란 목적 살인혐의 고소에 대해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때 우리는 역시 3당합당으로 집권한 탓에 '문민'정부도 별 수 없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두고 헌법재판소가 1995년 11월 27일 검찰 불기소처분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집권기간 동안 형사소추가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과 더불어 전두환 체포와 기소가 가능해졌다. 그러자 전두환은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인 1995년 12월 2일 자기 동네 골목에서 그의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흰 스카프로 받친 검은 코트를 입고 서서 '노기' 띤 목소리로 "만일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야합해온 김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운운하는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가 저질러온 짓이나 그날의 기세로 보아 뭔가 있어 보였고, 사람들은 긴장했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감탄할 만한 대담함을 보였다. 곧장 전두환이 내려간 고향 합천으로 검찰 체포조를 파견했다. 언론사가 따라붙었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밤중에 전두환은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질질 끌려나왔다. 결단의 신속함, 법적 권력의 단호한 행사 면에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눈부신 점은 대상을 다루는 권력행사 방식이었다.

범법자라고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검찰이 소환조사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예우를 다해 다루는 범법자이다. 이들은 명백한 범법사실이 있을 때조차 검찰 포토라인에서 단정한 차림으로 카메라를 향한다. 바로 이런 의전으로 인해 그들의 범죄는 어쩐지 더럽지 않고 여전히 논란거리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다른 하나는 범법자들이 카메라 세례를 두려워해 고개를 숙이고 포승줄에 묶인 채 이동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잡범이며, 재판 전에 이미 유죄선고가 내린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골목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전두환을 잡범으로 취급했고, 잡범임을 입증해냈다. 전두환이 그렇게 해서 내란의 수괴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우리 세대는 정의의 존재를 조금은 믿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두환의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와 전두환의 다름을 입증한 점은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사형을 집행했다면 이 땅에서 반칙을 일삼으며 살아온 이들에게 어떤 근본적 징치의 상징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내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를 되짚어 보여준 면도 있었다. 취임 10여일 만에 하나회 숙청을 시작한 결단력이 심사숙고나 계산이 아니라 어떤 본능적 기질에 터를 둔 것임을 짐작게 해주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결단의 뿌리에는 상대가 얼마만큼의 권력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 것을 서슴없이 말하고 행하는 어떤 '기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회를 숙청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런 힘이 있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숙청하는 것이다. 전두환을 체포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에게 어떤 숨겨진 힘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를 개처럼 끌어내는 것이다.

1995년 12월 3일 경남 합천에 머물고 있던 전두환이 검찰수사관에 의해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인의 기개란...

기개란 한 개인에 불과할 때도 주체가 세계 전체를 감당할 수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인해 마치 한 주체와 세계가 맞서고 있는 형국을 자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개가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유신시절 총과 칼과 모든 제도적 권력을 가진 박정희를 향해 그토록 담대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그의 의원직 제명을 시도했고, 그것이 부마항쟁을 불렀으며, 그로 인해 박정희는 측근에게 살해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을 용납할 수 없다고 선포했고, 그럼으로써 박정희에 도전하는 대중의 창끝이 되어 그를 쓰러뜨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의 협량함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대통령의 그런 행태가 아버지를 거꾸러뜨린 이에 대한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정도는 알아주어도 될 것이다.

아무튼 내 보기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개라는 단어의 용례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만일 지금 젊은 정치인이라면, 아마도 박근혜정권의 온갖 비민주적 작태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선언하는 자이며, 그런 수행적 제스처를 통해서 대중의 열망을 표현하고 그 열망과 일체가 되는 자이다. 지금 우리 야권에 없는 이는 바로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그냥 선포하는 자,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마치 자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권능이 있다는 듯이 확신에 차서 앞에 나서는 자, 그럼으로써 대중의 마음에 불을 댕기고 그들을 이끌어, 마침내 용납할 수 없는 것을 거꾸러뜨리고 마는 자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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