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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과 필승의 비법

'인생, 한 방'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격률 아닌 격률이다. 이는 푸쉬킨이 살던 1830년대 러시아에서도 유효한 말이었다. 이 격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한 방'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 또한 지니고 있다. 카드놀이에서라면 '한 방을 노려라'와 '한 방을 노리지 말라'가 양면의 격률이 될 것이다. '한 방을 노리지 말라'라는 금지의 장벽을 뚫고 나와 결국 미친 사람이 되고 만 푸쉬킨 이야기 속 인물을 만나보자.

글 | 서광진 박사

'인생, 한 방'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격률 아닌 격률이다. 이는 푸쉬킨이 살던 1830년대 러시아(그 중에서 푸쉬킨이 집필과 휴양을 위해 자주 찾았던 볼지노)에서도 유효한 말이었다. 이 격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한 방'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 또한 지니고 있다. 카드놀이에서라면 '한 방을 노려라'와 '한 방을 노리지 말라'가 양면의 격률이 될 것이다. '한 방을 노리지 말라'라는 금지의 장벽을 뚫고 나와 결국 미친 사람이 되고 만 푸쉬킨 이야기 속 인물을 만나보자.

<스페이드의 여왕> 작가 푸쉬킨의 초상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이드의 여왕>의 주인공 게르만은 '노름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원칙을 가지고서 '노름을 해야 한다'는 욕망을 억압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게르만의 아버지는 러시아에 귀화한 독일인으로, 아들에게 얼마 안 되는 현금을 물려주었다. 자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게르만은 이자 수입에는 손도 안 대고 봉급만으로 살아갔으며, 조금의 낭비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마음을 좀처럼 털어놓지 않는 성격에다 야심가였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의 과도한 검약을 비웃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노름판 주변을 맴도는 것뿐이었다. 항상 노름판 주위에 머물러 있었을 뿐 게임을 하지는 않았다. "절약, 절제, 근면, 이것이 나의 믿을 만한 패다. 이것들이 나의 재산을 세 배, 일곱 배로 늘려 줄 것이고 나에게 평화와 자립을 안겨 줄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그였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강렬한 열정과 불같은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카드를 잡아 본 적도 없고 빠롤리(카드 놀이의 일종)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도 새벽 다섯 시까지 우리랑 앉아서 노름하는 것을 구경하다니!"라고 놀란다.

그러나 스스로의 다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본질적으로 돈에 대한 욕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따라서 의식적인 노력(즐기지 말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의식(즐겨라!)에 따라 어느 백작 부인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녀는 카드놀이에서 반드시 이기는 '비기'를 알고 있다고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근검절약하는 게르만에게 자신의 돈을 잃지 않으면서 돈을 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비법(숫자 세 개)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의 비극은 숫자 세 개에 실제로 '필승의 비기'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 데에 있었다. 무엇인가가 있다고 가정되어 지는 이 묘법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백작 부인 스스로가 고백하듯이 이 비기는 '그저 농담'에 불과한 것이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 관계이듯이, 세 개의 카드가 늘 승리를 담보한다는 게 허황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백작부인은 실제 그 비기가 '비기가 아님'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비법'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전략일 뿐이었다. 즉, 세 개의 카드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한에서만, 그녀의 비법은 더욱 더 게르만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불같은 욕망'을 가진 게르만은 카드의 비법을 알아내고자 백작부인을 권총으로 위협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백작부인은 기겁하면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뜻밖에 백작부인의 망령이 게르만에게 나타나 3, 7, 1(에이스)라는 필승의 숫자를 알려준다. 이 후에 게르만은 분열적인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카드놀이를 하지 마라" 혹은 "근면하고 성실하여라"라는 억압이 존재하지(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필승의 비기'를 손에 넣은 이상, 그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장벽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곧 의심의 장벽을 허물고 자신만의 논리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를테면 게르만은 다음과 같이 3, 7, 1로 이루어진 세계를 축조해낸다.

물질계에서 두 개의 물체가 동시에 한 장소를 점유할 수 없듯이 정신계에서도 두 개의 고정 관념은 공존할 수 없다. 3, 7, 에이스는 곧 게르만의 마음속에서 죽은 노파의 이미지를 덮어 버렸다. 3, 7, 에이스는 그의 머릿속에 꼭 박혔고 그의 입술에 항상 늘어붙어 있었다. 젊은 아가씨를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잘 빠졌군! 진짜 하트의 3이야." 누구나 그에게 시간을 물어 보면 그는 "5분 전 7시요"라고 대답했다. 배가 나온 남자들은 모두 그에게 에이스를 연상시켰다. 3, 7, 에이스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꿈속까지 그를 따라왔다. 3은 그의 앞에서 화려한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났고 7은 고딕 건물의 대문처럼 보였으며, 에이스는 거대한 거미로 나타났다.

게르만에게는 이제 부족한 것이 없어졌다. 근면, 성실함은 물론이고, 자신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은 이제 숫자로 충만해 있다. 이는 결국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비기'를 알자마자 달려간 노름판의 첫 두 판에서는 그 숫자를 이용해 거금을 손에 쥐었지만, 이어지는 판에서 그는 에이스가 아닌 '스페이드의 여왕'을 잘못 선택한 탓에 큰 돈을 날려버리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게르만이 뽑은 '스페이드의 여왕'은 그에게 찡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백작부인의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백작부인을 찾아간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백작부인의 망령은 왜 다시 나타난 것인가. 이것은 혹시 게르만이 소환해낸 것은 아닐까. 항상 이기는 패가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던 사람은 이런 식으로 게르만에게 다시 되돌아 왔다. 이로 인해 게르만은 미쳐버렸다. 푸쉬킨은 "그는 오부호프 병원 17호실에 앉아서 무엇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놀랍게 빠른 속도로 <3 , 7, 에이스! 3, 7, 퀸....>만 중얼거릴 뿐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카드게임에서의 패배는 결국 게르만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검약의 최소한의 방어선(본전은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었으리라)마저 무너뜨려 버렸다. 이는 그리고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게르만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공감을 넘어 성실함과 절제, 근면을 신조로 오직 자신의 힘으로 번 돈(심지어 이자수익도 제외하고)만으로 독립하려고 하는 이의 노력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지(누구인지) 곰곰 생각해봐야 한다. 게르만의 노력이나 절제력이 더욱 강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또 한 편으로, 정부의 요직부터 시작하여 군, 관료, 교육·복지 혜택 등을 장악했던 귀족 중심의 19세기 러시아의 신분제 사회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독립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백작부인의 망령을 다시금 소환한 것도 게르만 자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합리적이어야 할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필승의 비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명확한 사실이다. 그것을 떠들거나(백작부인) 믿는 자(게르만)은 반자본주의적이거나 반민주적인 사람으로, 결국은 죽거나 미치광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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