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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간의 미국·중국 여행 ⑫] 상하이 인민광장에서 발견한 '이대 앞 거리'

한글로 '이대가(이대 앞 거리)'라고 쓰여 있는 귀여운 간판. 십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작은 거리처럼 꾸며놓고 한국식 떡볶이와 김밥 등을 팔고 있었다. 요즘 서울 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한 중국인 관광객들의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줄 먹을거리인가? 중국 현지에서 확인하는 한류 열풍. 근처에는 이니스프리, 에뛰드하우스 등 한국 화장품 매장들도 성업 중이었다.

  • 임은경
  • 입력 2015.12.03 13:09
  • 수정 2016.12.03 14:12

▲ 날씨가 갠 24일 낮에 찍은 상하이 푸둥 공항

LA에서 낮 12시 반에 출발한 중국 동방항공 MU586기를 탔다. LA에서 상하이 푸둥 공항까지 거리는 1만897킬로미터. 열 세 시간이 걸릴 예정이란다. Ground Speed 238km. 비행기를 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비행시간을 내내 잠으로 보냈다. 두 끼의 식사와 간식으로 나온 샌드위치도 먹지 않고 정신없이 잤다. 중간에 잠을 깨어 영화를 보면서 마시려고 주문한 칭따오 맥주가 속을 불편하게 해서 누가 약이라도 먹인 것처럼 또 잠이 들었다. 긴 여행의 후유증인가.

LA 시각으로 22일 새벽 2시, 상하이 시각으로는 22일 저녁 5시에 푸둥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면서 하루를 벌었다가 돌아오면서 다시 하루의 시간을 잃은 것이다. 비행기에서부터 어째 온통 구름이다 싶더니 푸둥 공항은 안개가 짙게 끼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비행기에서 상하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을 텐데. 착륙 직전에 내다본 창밖의 풍경은 온통 하얀 구름 천지였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종혁 씨의 친구 박용규 선생을 만나 황포강변의 백화점에 있는 망상원(望湘園)이라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4층 창가에 앉았다. 직원에게 화장실을 물어보니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다. 레스트룸, 배쓰룸도 안 통하고 '토일렛'을 외치니까 그제야 이해하고 화장실 방향을 가리켰다.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니 옆 칸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화장실은 금연구역'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중국말을 알아야 말이지. 미국에서는 화장실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이 없었다. 한국의 여자 공중화장실에서 익숙하게 맡던 매캐한 연기가 떠올랐다. 다시 동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편견어린 시선이 존재하는. 테이블로 돌아와 화장실 찾기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자 박 선생이 화장실은 '씨써우젠(洗手間, 세수간)'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여자화장실의 담배 연기, '다시 동양에 돌아왔구나'

'음식의 천국' 중국에서 먹는 첫 식사. 기대한 대로 정말 맛이 있었다. 메인 요리는 중국식 신김치를 넣고 끓인 쓰완차이 생선탕. 새콤하면서도 매콤한 국물이 자꾸만 떠먹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었다. 중국 음식의 매력은 다양한 채소를 풍부하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땅콩 소스를 끼얹은 채소 샐러드도 맛있게 먹었다. 진한 땅콩의 풍미가 아삭한 생채소와 잘 어울렸다.

식사 후 강변 산책로로 나가 잠시 바람을 쐬었다. 여전히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지만, 그사이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쳐 있어서 그럭저럭 걸을 만했다. 상하이의 랜드마크라는 동방명주 아래서 사진도 찍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변 양쪽에 늘어서있는 건물들의 실루엣은 화려한 조명을 받아 또렷하게 빛났다. 날씨가 화창하게 갠 이튿날에는 반대편 강변인 와이탄 산책로를 걸었는데, 이날 바라본 매혹적인 불빛들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 와이탄에서 바라본 포동 쪽 강변의 야경

중국에서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SNS 접속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단다. 여태껏 페이스북으로 여행 사진과 소식을 올리던 종혁 씨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상하이는 서양 열강들에 의해 강제 개항된 후 지금은 중국 최대의 도시로 발전했지만, 원래 이 지역의 대도시는 내륙 안쪽에 위치한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이다.

상하이는 도시 중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황포강(黃浦江)을 중심으로 포동(浦東)과 포서(浦西) 두 개의 지구로 나뉘어 있다. 중국 개항기를 다룬 영화에 나오는 옛 상하이 도심은 포서. 포동(푸둥)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의 일이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강남 같은 곳이다. 1999년에 개항한 푸둥 공항은 생긴 지 15년밖에 안 된 신공항이다. 기존 공항은 포서 지역에 있는 훙차오 국제공항이다. 이 얘기를 듣고서야 공항 규모에 비해 건물 크기가 아직 작은 이유를 이해했다.

황포강변의 동쪽에는 세계 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121층짜리 상하이타워를 비롯해 101층짜리 세계금융센터, 88층짜리 진마오타워 등 고층 빌딩들이 밀집해있다. 생김새 때문에 '병따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계금융센터는 일본 개발사의 설계 당시 윗부분이 둥근 모양이었는데, 일장기를 연상시킨다는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사각형으로 모양을 변경했다. 121층 건물은 지상에서는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건물 꼭대기가 바람의 흐름에 따라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상하이는 상주인구만 2천만, 유동 인구와 근교 도시까지 합치면 1억 명이 살아가는 메가시티다. 공기 오염 때문에 시 당국에서 더 이상 차량 번호판을 내주지 않아, 기존 자동차 번호판이 2천만 원에 거래된다고 한다. 인근의 항저우와 쑤저우의 차량도 상하이 시내를 많이 드나들지만, 오후 7시 이전에는 다른 도시 번호판을 단 차는 시내 진입이 금지되어 있다. 복잡한 교통문제 때문인지 시내에는 고가도로가 많이 보인다. 중국의 경제 수도답게 도로에는 값비싼 좋은 차들이 많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선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금지'

상하이는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서구화된 도시이기 때문에 과하게 빵빵거리며 경적을 울려댄다든지, 택시를 타는 손님을 속인다든지 하는 일이 적다고 박 선생은 말했다. 하지만 이후 이틀 동안 몸으로 경험한 상하이의 교통 문화는 한마디로 간 떨어질 수준이었다. 신호를 위반하는 것은 예사고, 심지어 앞에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데도 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조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일종의 배짱 운전이었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일 것 같은 위협을 느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산책 후 강 아래로 뚫린 지하도로를 지나 숙소가 있는 포서로 향했다. 미관상의 이유 때문인지 황포강 위에는 양안을 잇는 다리가 별로 없다. 덕분에 탁 트인 강변의 풍경은 보는 이의 눈을 더욱 시원하게 한다. 곳곳에 강남․북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인 한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 23일 오후에 찍은 인민광장의 상하이 박물관

상하이는 유난히 고층건물이 많은데 그 건물들의 디자인이 모두 다르다. 디자인이 같으면 건축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도시 미관을 정비해 관광객을 끌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야심찬 의지가 느껴진다. 대단한 마천루들이 끝을 모르고 늘어선 거리, 그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엄청난 숫자의 차와 사람들. 고층 건물을 거의 볼 수 없었던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스무 살에 어리둥절해 하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때처럼 잠시 현기증이 났다.

작은 도로로 접어들자 자동차 못지않게 많이 다니는 자전거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좁은 길도 반드시 자전거가 달릴 별도의 차선이 있었다. 어느 교차로에서는 신호등이 7개 달린 것까지 봤다. 자전거를 위한 신호등을 추가한 것이다. 요즘에는 아예 페달이 없는 전기자전거를 많이 탄다. 말하자면 소리가 안 나는 오토바이 같은 것이다. 헬멧을 안 써도 되고, 자전거니까 당연히 번호판도 없다. 큰 도로에서 '자전거 파란불' 신호가 떨어지면 일제히 달려 나가는 수십 대의 전기자전거 행렬은 이국적인 묘한 장관이었다.

최근 들어 급속하게 개발된 포동과는 달리 포서는 오래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 시가지였다. 길거리에 내걸린 빨래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빨래 건조대가 길게 나와 있다. 허름한 뒷골목의 거리도 고층 아파트도 밖에 빨래 건조대가 설치된 모습은 똑같다. 절로 웃음이 나는 또 하나의 이국적 풍경.

언젠가 서양인들이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두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표현이 썩 와 닿지 않았는데, 여기 오니 그 말이 이해가 갔다. 상하이가 그 표현에 직접 해당하는 지역은 아니지만, 이곳에는 또아리를 틀고 비상하려는 씩씩한 용의 기상 같은 것이 있었다. 이튿날 인민광장에서 보았던 땅덩어리와 건물의 엄청난 규모는 참 인상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대륙의 풍모'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자전거 신호등까지 합쳐 총 7개가 달린 신호등

몇 년 전 삼청동에 살 때 큰 소리로 길에서 떠들던 중국 관광객들 때문에 불편을 겪은 적이 있다. 수십 명이 길을 통째로 차지하고는 누가 지나가도 비켜주기는커녕 남을 신경 쓰거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없었다. 수줍고 조용한 일본인들과 비교되어 그들의 행동거지는 더욱 거슬렸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이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나온 자연스런 행동이었음을 알겠다. 시끄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활기차고 역동적인 것이 중국인들이라는 것도.

삼청동에 중국 관광객이 북적거리던 이야기를 하니까 박 선생은 "좋은 현상이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교류하면서 돈을 쓰고 소비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일상의 평화를 방해받아서 힘들었다고 말한 것인데 그는 내 말을 반대로 이해했다. 박 선생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20년 가까이 거주해온 분이다. 그의 대답이 어쩌면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방하게 열린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작은 것에 연연해 굳이 눈살 찌푸릴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대륙의 기질.

첫날 숙소는 구베이에 있는 상하이 하이튼 호텔이었다. 프랑스에서 시청을 호텔 드 빌(Hotel de Ville, 마을의 호텔?)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호텔을 대주점(大酒店, 큰 술집?)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재미있다.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이곳은 1층에 '빈스빈스 커피' 체인점과 편의점이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한국식 온돌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 서울의 인사동에 해당하는 티엔즈팡의 좁은 골목길. 외국인 관광객의 머리 위로 걸린 빨래가 재미있다.

9월 23일 수요일. 아침 아홉시 반에 우리를 데리려 와주신 박 선생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상하이의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조차지를 천천히 차로 돌다가 화랑과 기념품 가게가 몰려 있는 티엔즈팡(田子防, Tianzifang)에 내려서 골목길을 걸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사동 같은 곳인 이곳은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 양옆으로 늘어선 오래된 이층집들에서 옛날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층에는 상하이의 다른 곳처럼 창밖에 빨래가 널려있고 사람이 살지만, 아래층은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깨끗하게 단장된 가게나 음식점들이다. 거리를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머리 위로 걸린 이불이나 내복바지를 보니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곳도 인사동처럼 화랑보다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점들이 훨씬 많다. 중국산 실크로 만든 화려한 색상과 무늬의 치파오 가게들이 눈길을 끌었다. 치마를 무릎길이로 잘라 입기 편하도록 개량한 것인데, 옆이 트여있어서 막상 사서 입고 다니려면 좀 부담스러울 듯싶다. 양꼬치 같은 길거리 음식을 파는 점포들도 있었다.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가게에서 상하이 전통 아이스 바(Popcicle)라는 것을 10원(우리 돈 약 1800원)에 사먹었다.

외국인 관광객 머리 위로 걸린 내복 바지

골목길을 빠져나와 지하철역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톡 쏘는 향신료와 매운 국물이 싱싱한 새우와 조화를 이룬 면 요리나 대구 양념구이도 맛있었지만, 진하게 끓여낸 밀크티의 향미는 잊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진하게 우러난 홍차의 향이 우유의 크리미한 부드러움과 잘 어울렸다. 식사와 함께 밀크티라. 미국의 식당들이 식사와 함께 커피를 곁들여 파는 것처럼, 이곳은 밥에 차를 곁들여 마시는 것이리라.

▲ 티엔즈팡 앞 식당에서 점심으로 먹은 국수와 밀크티

나중에 시내를 걷다보니 밀크티만 전문적으로 파는 테이크아웃 가게가 많았다. 귀여운 캐릭터로 깔끔하게 디자인한 프랜차이즈점도 꽤 있다. 요즘 상하이 젊은 층에서 밀크티가 유행인가. 점심 때 마셨던 그 맛을 잊지 못해서 결국 오후에 어느 테이크아웃 가게에서 또 한 잔을 사마시고야 말았다.

점심 후 하루 동안 지하철을 무제한 탈 수 있는 일일권(one day pass)을 18원(우리 돈으로 약 3200원)에 사서 10호선을 탔다. 신천지역에 내려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길거리 전시에 눈이 팔려 엉뚱한 뒷골목으로 한참을 돌았다. 비싼 명품 브랜드가 밀집한 거리였다. 덕분에 아이 쇼핑을 실컷 했다.

30분 이상을 걷기만 하다가 결국 임시정부 청사는 포기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려는 순간 4~50여명의 단체 관광객과 마주쳤다. 어쩐지 익숙한 등산복들, 어쩐지 익숙한 얼굴들. "한국 사람들인 것 같은데?" 우리끼리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누군가 "한국 사람 맞아요!" 하고 외쳤다. 그분들을 따라 겨우 임시정부 건물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생각보다 소박한 3층짜리 벽돌 건물이다. 신천지는 서울로 치면 명동 같은 곳이다. 바깥 거리의 화려함에 비해 이 작은 건물의 소박함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골목길 안쪽에 자리한 청사 내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해서 밖에서 사진만 찍고 발길을 돌렸다.

화려한 명품 거리 한구석, 소박한 임시정부 청사

▲ 상하이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예원 앞 거리. 어디를 가나 오토바이 비슷한 전기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지금이야 대도시가 되었지만, 상하이의 주요 관광지는 모두 구도심에 모여 있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옛 귀족의 정원이라는 예원과 인민광장 등을 구경 다녔다. 예원은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입장 포기. 빨갛게 칠한 나무 다리가 놓인 연못 등 근처의 관광지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줄서서 먹는 유명한 만두 가게 발견. 가게 안에는 만두를 쪄내는 대나무 채반이 사람 키보다 높이 쌓여 있다.

영어로는 'Steamed Bun'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펀'이라고 부른단다. 만두라기보다 찐빵만한 크기다. 손바닥만 한 '펀' 안에 가득한 고기 육즙을 빨대로 빨아먹는다. 나는 이 얘기를 위화의 소설에서 읽었는데, 이날 예원 앞에서 실제로 종이 접시에 '테이크아웃'한 펀 하나(하나만으로 접시가 꽉 찬다)를 손에 들고 코카콜라 빨대를 꽂아 즙을 마시는 여자를 보았다. 마치 물을 넣은 풍선처럼 밀가루피 안에 즙이 가득 차, 찌르면 금방 터질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걸어서 다시 지하철역으로 나왔다. 예원까지 들어가는 길가의 상가 전체를 옛날 목조건물처럼 리모델링해서 제법 관광지 분위기가 난다.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고 이번에는 인민광장에 내렸다. 광장 앞 공원에는 대낮부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시의회 건물을 겸한 상하이 시청, 대극장, 상하이 박물관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드넓은 광장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석조 건물들의 규모와 위용이 대단했다. 날아갈 듯 하늘로 솟은 처마를 얹은 대극장의 크기는 서울의 세종문화회관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주변을 구경하고 화장실을 찾아 지하 쇼핑센터로 내려갔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글로 '이대가(이대 앞 거리)'라고 쓰여 있는 귀여운 간판. 십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작은 거리처럼 꾸며놓고 한국식 떡볶이와 김밥 등을 팔고 있었다. 요즘 서울 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한 중국인 관광객들의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줄 먹을거리인가? 중국 현지에서 확인하는 한류 열풍. 근처에는 이니스프리, 에뛰드하우스 등 한국 화장품 매장들도 성업 중이었다.

▲ 인민광장 지하 쇼핑센터에 걸려 있는 '이대가' 간판

상하이 인민광장에서 발견한 '이대 앞 거리'

종일 걷기만 해서 너무 피곤했던지라 잠시 숙소에 돌아가서 쉬었다. 둘째 날 숙소는 상해체육관 근처의 레저인 호텔. 저녁 8시쯤 되어 황포강변의 옛 조차지인 와이탄의 야경을 보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도심의 교통 체증을 뚫고 아홉시가 다 되어 와이탄에 도착했다. 부근의 건물이란 건물은 모두 조명 속에 빛나고 있다. 이것도 도시 미관을 위한 시 정책 중 하나인가.

와이탄은 중국 개항기에 서양 열강들이 지은 오래된 건물이 즐비한 역사지구이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백년이 넘은 건물들은 고풍스런 멋을 자아낸다. 강 맞은편에는 상하이타워와 동방명주, 진마오타워, 세계금융센터 등 도시 개발의 상징인 마천루들이 마주 보고 있다. 이 강변 풍경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밤에 와야 한다. 건물마다 일제히 켜지는 조명을 받아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상하이는 바다를 끼고 있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많다는데, 운 좋게도 이날 밤 날씨는 쾌청하기만 했다. 평소에는 관광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나와서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강변 산책로도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탁 트인 강변의 풍경 위로 부는 선선한 바람. 아름답게 빛나는 건물들의 조명. 단언컨대 상하이 제일의 볼거리를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황포강의 야경을 꼽을 것이다. 이날 본 것들은 '내 마음 속 풍경'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 중국 개항기에 서구 열강들이 앞 다투어 지은 와이탄의 오래된 건물들

산책로가 끝나는 등대에서 다시 거리로 내려왔다. 초록의 삼각 지붕이 멋진 피스 호텔에 들어가 유명하다는 재즈 연주를 잠시 구경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근처의 동네 식당에서 찐만두와 차가운 고기 편육, 배추 볶음 등을 시켜 놓고 하얼빈 맥주와 북경 맥주를 한 잔씩 했다. 박 선생과 종혁 씨 사이에 그간 쌓였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노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삶의 철학, 종교관에 이르기까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 머나먼 타향에서 열심히 일해 온 박 선생은 최근 가까운 가족이 아프면서 삶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상하이에 머무는 이틀 동안 우리 숙소를 마련해준 것은 물론 사업으로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관광 가이드 노릇까지 해주신 박 선생의 호의는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 황포강의 야경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이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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