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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서 디자이너 브랜드로 살아남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나라는 참신한 오리지널리티와 높은 퀄리티로 무장한 '디자이너 브랜드'가 살아남는 것이 매우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한두 시즌 운이 좋아 돈을 벌 수는 있어도 한 시즌만 삐끗해도 모든 재고를 떠안는 구조 속에서 원래 갖고 있던 퀄리티에 대한 고집을 유지하고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새우잡이배' 혹은 '밀항'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가격은 내려야 하고 트렌드에 영합하는 '기성 브랜드'가 되어야만 한다. '세컨 브랜드'라도 만들어서 현재 잘 팔린다는 디자인들을 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중저가 시장은 거대 자본이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곳이다.

  • 이강일
  • 입력 2015.12.01 05:43
  • 수정 2016.12.01 14:12
ⓒgettyimagesbank

나는 패션 디자이너이고, 이 글은 '패션 산업'에 관련된 다소 긴 이야기다. 하지만 우선은 '웹툰(Webtoon)'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의 '웹툰'은 화려하다. '미생'과 같이 높은 인기와 사회적인 파장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드라마의 '원작'을 제공하는 매체이며, '이말년' 작가와 같이 공중파 주말 예능에 출현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들도 제법 많다. 하지만 한때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꿨을 정도로 오랫동안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 업계를 관심 있게 지켜본 나로서는, '웹툰'의 시작이 매우 초라하고 서글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미생'의 성공은 '웹툰'이 더 이상 아이들만이 보는 것이 아닌 폭넓은 세대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tvN

한국에서 만화가 일본처럼 사회적으로 환영 받았던 시절은 없었다. 늘 '코흘리개들 용돈 뺏는 양아치' 취급 당하기 일쑤였지만 2000년대 초반 들어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만화 대여점들의 난립으로 출판 만화 시장은 괴멸 직전에 이르렀고, 그나마 그런 대여점들조차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해 '스캔본'이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문을 닫았다. 만화 잡지는 급격히 폐간되어갔고 그렇게 한국 만화는 끝났다고 모두들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한국 만화가 활로를 찾은 건 그 저주스런 '인터넷' 에서였다. 일거리를 잃은 만화가들이 직장인이 되었으면서도 아직 만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취미로 그려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이른바 '일상툰'이 예상 외로 높은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마린 블루스'는 어딘가에 정식으로 연재된 적도 없는 개인 블로그용 만화였지만 2003년 만화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이 정식으로 플랫폼을 갖추면서, 만화가들은 소액이나마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열리게 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웹툰은 좀더 정교하게 플랫폼을 수정해가며, '부분 유료화' 등 작가들에게 수입이 좀 더 많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로도 활발히 제작되고 큰 성공 사례가 생기자 역량 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웹툰 원작자로 방향을 틀었고 그만큼 스토리에 힘이 보태졌다. 또한 만화가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어시스턴트 들을 더 많이 둘 수 있게 되어, 작화 퀄리티 역시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의 망가(Manga : 서구권에서 일본 만화를 가리키는 말)보다 더 혁신적이고 인터넷 시대에 적합한 코믹스 매체로 전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뜬금없이 웹툰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문화 장르가 흥하고 천재들이 등장하는 배경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신념에 대한 예를 들기 위해서이다.

'선종외시(先從隗始)'

중국 전국 시대, 연나라 소왕(燕昭王)이 인재들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측근이었던 곽외는 이렇게 말한다. 나 곽외부터 대우를 잘해주면 인재는 자연히 모이게 된다고. 이는 '판이 제대로 깔린 곳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재들이 모여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나라의 어떤 문화 장르건 오늘을 활약하는 천재들과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루키들이 공존하는 곳이라면 반드시 크리에이터들에 대한 보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이념도 정교한 정책도 아니다. 단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첫째, 신인들이 인생에서 일정 부분을 희생하는 정도의 리스크로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안정망이 있을 것.

둘째, 정점에 선 자들이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부와 명예를 얻을 것.

한국에서 만화가를 지망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싹 바뀐 것도, 국민들이 갑자기 만화에 호의적인 태도로 바뀐 것도 아니다. 단지 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판이 바뀌었을 뿐이다. 판이 바뀌자 재능 있는 크리에이터들이 하나둘 모여들게 되고 훌륭한 결과물은 다시 투자금을 모이게 한다. 이런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웹툰이라는 플랫폼을 구축한 시점부터였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제부터 '패션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한국의 패션 시장은 2000년대 초반의 한국 만화 시장보다는 훨씬 낫다. 아니 사실 '디자이너 브랜드 전성시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인 것처럼 보인다. 화려하게 데뷔했던 신인 디자이너 브랜드가 몇 년 후 대기업으로 몇 십억에 인수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위트 있는 글자 하나 새겨진 스웻셔츠로 강남 빌딩을 살 정도의 돈을 벌었다는 풍문까지. 온갖 솔깃한 소문과 욕망이 뒤범벅되어 골드러시 시대마냥 너나 할 것 없이 '디자이너 브랜드'의 타이틀을 달고 론칭을 한다. 사실 이 현 상황에 만족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으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현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한때의 영광이며, 매우 우려스러운 시대의 서막임을 직감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에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패션은, 다른 문화 산업과는 조금 다른 특수성을 갖는다. 예컨대 영화, 만화, 음악 등의 콘텐츠가 어떤 작품이든 동일한 가격이 매겨지는 것과는 달리 패션은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사용되는 소재의 가격이 다르고 만드는 공법의 정교함 등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인데, 이를 바탕으로 다른 문화 시장과는 다르게 세분화된 차별적인 시장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사 입게 되는 저가의 SPA 브랜드가 있는 반면 고급스러운 소재와 화려한 마케팅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럭셔리 브랜드, 이른바 '명품' 브랜드가 있다. 물론 그 사이의 가격대와 퀄리티를 갖는 브랜드도 있다. 하지만 이런 브랜드만이 다는 아니다. 패션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매우 생소한 이름들이 존재한다. 이들 중 어떤 이는 매우 실험적이고 파격적이어서 이게 과연 입으라고 만든 옷인가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어이없을 정도로 심심한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다양한 개성이 공존하지만 공통적인 건 현존하는 트렌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점. 때문에 현 트렌드에 신선함과 충격파를 던져주며 다가올 시대의 비전을 제시한다. 이들이 바로 패션 산업의 심장이라고 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이다. 그리고 '패션'이 다른 문화 장르보다 훨씬 더 빠르게 트렌드를 선도하는 위치에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이리 치고 저리 박는 '똘끼'로 무장한 이 '디자이너 브랜드'가 온갖 시도를 먼저 해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매우 높은, 전혀 다른 성향의 두 디자이너 브랜드,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 위)와 나나미카(Nanamica, 아래). 이처럼 디자이너 브랜드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고 폭넓다. © gosharubchinskiy.com, nanamica.com

다행이다. 우리나라에도 '디자이너 브랜드'라고 불리는 브랜드가 얼마든지 있고 전성시대라 불릴 만큼 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의 '디자이너 브랜드'는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 일단 가격이 저렴하다. '합리적'인 유통 구조를 가져서 그렇다고 하니 그건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트렌드에는 무심한 듯한 그런 쿨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떤 스타일이 '떴다'라고 판단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 쏟아져 나온다. 룩북 사진도 화려하고 이름도 멋들어지긴 한데 어쩐지 예전 동대문 패션 타운에 있었던 브랜드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디자이너 브랜드'라는 명칭은 같은데 하는 역할은 다른 것 같다.

자 이제부터 한국에 존재하는 '디자이너'들의 못난 창의성과 지나친 상업주의에 대해서 비판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아가서는 하이 패션에 무지한 한국의 낮은 문화 수준까지도 비판해야만 할 것 같다. 바로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을 위해 서론에서 나는 '선종외시'라는 고사와 웹툰의 예를 들어가며 내 생각을 먼저 말한 것이다. 즉, 원인은 역량 낮은 디자이너도, 사람들의 무관심도 아니다. 판이 잘못 깔린 것뿐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이제부터 당신이 런던 출신의 재능 있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해보자. 젊은 패기로 '디자이너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당신은 일단 판매할 시즌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샘플'을 만들어야 한다. '샘플'이란 직접 고객에게 파는 상품이 아닌, 바이어들과 프레스들에게 보여주는 용도의 제품이다. 한 시즌 샘플 비용은 적게 잡으면 천만원에서 많으면 3천만원이 들어간다. 꽤 큰 돈임에는 분명하지만 미래의 성공을 위한 투자로 이정도 리스크 쯤은 감수 가능한 범위이다. 이 샘플을 이용해 룩북만을 찍을 것인지, 패션쇼에 참가해 좀 더 화려한 인상을 남길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일단 중요한 것은 바이어에게 브랜드의 존재를 알리고 샘플들을 구입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바이어'란 백화점, 편집샵 등에서 제품의 '사입'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다. '사입'이란 디자이너가 본 제품을 생산하기 전 미리 주문을 하는 것이다. 한 명의 바이어가 구입하는 양은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몇 십 명의 바이어가 모이면 주문하는 양도 제법 많아진다. 성공적인 '사입'이 이루어졌다면 당신은 다음 시즌을 준비할 자금을 얻을 수 있고, 이름 있는 백화점이나 편집샵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좋은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만약 혹평을 받아 바이어가 한 벌도 '사입'하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당신이 감수하는 리스크는 샘플을 만드는 데 들인 돈과 시간뿐이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다른 일을 하면서 다시금 재기를 노려볼 만한 액수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한국의 디자이너라면 어떨까? 일단 해외 판매가 아닌 국내 판매를 우선 시작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힘들게 샘플을 만들고 룩북을 만들어도 '사입'을 진행하는 바이어가 거의 없다. 로컬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판매하는 숍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거의 대부분 '대행판매'라는 형태로 입점을 권유한다. '대행'이란 '사입'처럼 생산 전에 미리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닌 생산이 완료된 제품을 대신 판매해주는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팔리지 않는 재고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입'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제품의 판매권 및 책임이 모두 판매 업체로 넘어가게 된다. 때문에 그 리스크를 높은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대체하고 홍보와 세일 등의 이벤트를 통해 재고를 처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행 판매는 잘 팔리면 일정 수수료를 받고 안 팔려도 브랜드에게 반품하면 그만이다.

난감한 상황이긴 하지만 대신 수수료가 낮으니 디자인에 자신 있다면 더 좋은 상황 아닐까?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샘플 제작 비용이 몇천만원에서 끝나는 수준이라면, 한 시즌 상품을 '생산'하는 비용은 그보다 훨씬 많다. 비싼 소재를 쓰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몇억쯤은 우습게 넘어가기도 한다. 이런 금액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을 넘어서기 때문에 대출이나 투자를 받아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디자이너 브랜드' 특유의 실험성이나 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잔인'하다.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 회수가 되지 않는 순간 한 인간으로서 재기가 불가능할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를 쫓아야 한다. 팔린다는 소문이 난 디자인은 과감하고 신속하게 '참고'해야 한다. 그리고 가격 경쟁력도 무시할 수 없으니 퀄리티를 높이는 건 '쓸데없는 고집'일 뿐이다.

하지만 오해가 없길 바란다. 나는 '사입'을 진행하지 않는 한국의 소매 업체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보장되지 않는 리스크를 떠안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특히 '상품성'도, '독창성'도 없는 한국 브랜드를 '사입'까지 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쓸데없는 논쟁만 가중될 뿐이다. 게다가 '위탁 판매' 위주로 진행된 현재의 시스템에 잘 적응한 수많은 브랜드들이 화려한 성공 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이걸로 만족한다면 상관없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나라는 참신한 오리지널리티와 높은 퀄리티로 무장한 '디자이너 브랜드'가 살아남는 것이 매우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한두 시즌 운이 좋아 돈을 벌 수는 있어도 한 시즌만 삐끗해도 모든 재고를 떠안는 구조 속에서 원래 갖고 있던 퀄리티에 대한 고집을 유지하고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새우잡이배' 혹은 '밀항'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가격은 내려야 하고 트렌드에 영합하는 '기성 브랜드'가 되어야만 한다. '세컨 브랜드'라도 만들어서 현재 잘 팔린다는 디자인들을 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중저가 시장은 거대 자본이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상황은 아직 간만 보고 있는 거대 자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발생한 '빈틈'일 뿐 오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디자이너 브랜드 특유의 민첩함과 영민함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나마 있던 개인 디자이너들의 밥줄이 끊기는 것은 시간 문제다.

외국의 디자이너 브랜드 역시 디자이너의 창조성과 상업성 간의 고민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디자이너 브랜드가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의 크기가 너무 다르다. 리스크가 적은 만큼 적정한 균형 안에서 창조성이 발휘될 여지가 크다. 물론 외국의 모든 디자이너 브랜드가 훌륭하지는 않다. 오히려 대부분 어이없이 미숙한 아마추어들 투성이고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진부한 디자이너들도 많다. 그러나 최고급 퀄리티에 목숨 거는 장인정신을 가진 디자이너,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발상을 해내는 혁신적인 천재들이 사장되거나 시작조차 못하는 최악의 불상사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귀중한 원석들이 몇 시즌 동안 차츰 다듬어져 우리가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수십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외국 패션계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리스크를 공동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등장한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베트멍(Vetements)의 수석 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Demna Gvasalia)는 현재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거론중이다. 이러한 원석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조차 못하고 사라진다면 패션계로서는 엄청난 손실이기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리스크를 공동으로 부담하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왔던 것이다. ©vetementswebsite.com

나는 한국 패션계가 처한 이 난제를 타개할 방법이 단순히 소매업체들의 '사입' 전환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디자이너 브랜드에 대한 고객들의 인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가격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 '사입'은 리스크 비용을 고객에게 돌리는 구시대적인 방법론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재고에 따른 리스크를 온전히 디자이너들에게만 부담 지우는 구조에 대해서는 공론화 시켜 비판해야 마땅하다. 격렬한 토론을 벌여야 한다. 한국 만화가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웹툰'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한 것처럼 창의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입에 따른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디자이너 브랜드에 대한 프리오더(선주문) 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주는 것도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보다 많은 아이디어들이 모아지고 시도되어야만 한다. 절대 나를 포함한 현존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위해서가 아니다. 고집과 꿈을 위해 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과 시작조차 못하고 다른 진로를 찾아야만 했던 불운한 천재들을 다시금 이 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성공한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실패한 도전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안정망이 갖춰질 때 그 '판'은 알아서 성장하고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런 판이 갖춰져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패션 문화'가 살아날 수 있다. 고객들이 원하는 니즈와 디자이너들의 제안 사이에서 독특한 스타일이 형성될 것이고 장인 정신에 입각한 혼이 담긴 명품을 지향하는 브랜드가 등장할 것이다. 현재를 화려하게 수놓을 천재들이 등장할 것이고 미래를 책임질 신진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건강한 내수 시장이 만들어져야만 세계적인 브랜드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다.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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