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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베끼셨나요?"

김기사의 해명은 놀랄 만치 옹색하다. 오타는 지도 데이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오타는 똑같지만, 베끼진 않았다'는 얘기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틀리게 쓴 지명을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똑같이 틀리게 표기할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정작 무참한 건 다음 대목이다. 록앤올은 '베꼈느냐, 아니냐?'를 묻는 질문에 엉뚱하게도 "벤처 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SK플래닛이 대기업 지위를 이용해 '을'인 록앤올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이른바 '대기업 갑질' 프레임을 꺼내든 것이다.

  • 이희욱
  • 입력 2015.11.29 06:36
  • 수정 2016.11.29 14:12

지금은 맛집 홍보에서나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지만, '블로그 마케팅'의 역사는 이보다 길다. 몇 가지 인상 깊은 사건도 있었다. 2008년 말께였다. 알 만한 블로그 마케팅 업체 파트너 블로거들이 입방아에 올랐다. 이들은 약속한 듯 특정 기업의 최신 스마트폰 리뷰를 블로그에 앞다퉈 올렸다. 최신형 휴대기기 사용기를 올리는 일이야 당시로선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들이 리뷰를 올리는 대가로 100만원이 넘는 휴대전화를 공짜로 챙겼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순번을 정해가며 글 공개 시점부터 제목에 들어갈 단어까지 해당 업체로부터 꼼꼼히 '데스킹' 받았다. 곪아 있던 '블로거의 상업성' 종기는 그렇게 터졌다.

무참했던 건, 이들의 대응 방식이었다. 당시 파트너 블로거들의 해명은 대략 두 가지였다. 돈(제품)은 받았지만 양심껏 리뷰했다고. 그런데 가만있어봐. 언론사 니들도 그러는데, 왜 우리만 비난하는 거야!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말을 믿는다면 첫 번째 해명은 넘어가자. '왜 나만 갖고 그래'란 반박은 개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전직 민머리 대통령의 하소연 못지않게 코믹하다. 여보세요, 너님이 정말 그랬는지 아닌지를 묻는 거거든요. 다른 님들은 그들대로 죄를 따져물을 일이고요.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바라보실까.

그땐 그랬다. 블로거들은 마케팅과 광고의 경계를 달리는 블레이드 러너였다. 과도기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인기 블로거가 '새 노트북을 사고 싶은데 어떤 제품이 좋을까?'라고 제 블로그에 군불을 땠다. 며칠 뒤 그는 "고심 끝에 골랐다"라며 특정 제품을 천연덕스레 소개했다. 그 노트북은 이미 업체로부터 블로그 마케팅 대가로 받아둔 물건이었다. 그런 게 '마케팅'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변명이 해명으로 포장되던 시절이었다. '블로거'란 직함은 은밀한 면책조항이었다. 도덕은 잠시 엿 바꿔먹어도 되던 분위기였다.

7년이 지났건만, 손가락만 바라보는 습성은 여전한가보다. 이번엔 '김기사'가 운전대를 잘못 잡았다. SK플래닛은 지난 10월 말, 스마트폰 길안내 응용프로그램(앱) 김기사를 서비스하는 록앤올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김기사가 계약이 끝났는데도 자사 지도 데이터를 무단 사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SK플래닛은 몇 가지 증거도 내밀었다. 자기네 지도임을 표시하기 위해 부러 몇몇 지명을 오타로 표기했고, 지도 위 특정 위치 정보를 표시하는 관심점(POI)에도 오타를 숨겨뒀다고 했다. 지도 위 특정 지형을 살짝 왜곡해 그려넣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워터마크'가 김기사 지도에서 똑같이 발견됐으니 김기사가 자기네 지도를 가져다 쓴 게 틀림없다고 SK플래닛은 주장했다.

이에 대한 김기사의 해명은 놀랄 만치 옹색하다. 오타는 지도 데이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오타는 똑같지만, 베끼진 않았다'는 얘기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틀리게 쓴 지명을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똑같이 틀리게 표기할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정작 무참한 건 다음 대목이다. 록앤올은 '베꼈느냐, 아니냐?'를 묻는 질문에 엉뚱하게도 "벤처 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SK플래닛이 대기업 지위를 이용해 '을'인 록앤올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이른바 '대기업 갑질' 프레임을 꺼내든 것이다.

SK플래닛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갑질'을 했을까. 그건 따로 따져보고 문제 삼을 일이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김기사가 베꼈나, 안 베꼈나'이다. 록앤올은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걸까.

이번 논란은 정확히 7년 전과 오버랩된다. 블로그 운영 과정에서 미숙함이나 실수가 있었다면, 이를 선선히 인정하고 다음부터 되풀이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1천만 사용자에게 사랑받는 김기사도 운행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면 이제라도 시인하고 경로를 수정하면 된다. 논란의 중심은 '갑을관계'가 아니다. 덩치 큰 녀석이 괴롭혔다고 해서 그 녀석 물건을 제멋대로 갖다 쓴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다. 물타기가 혐의를 희석하진 않는다.

판단은 법정 몫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베끼셨나요?"

김기사 내비게이션에 등장하는 SK플래닛의 의도적인 오타(워터마크) ©블로터

존재하지 않는 워터마크용 다리 '성웅교'(왼쪽이 김기사) ©블로터

실제 지형과 다르게 그려진 '백령호'의 'v'자 홈(왼쪽부터 다음지도, 김기사, T맵) ©블로터

관련기사 : 김기사-SK플래닛의 '지도게이트', 5대 쟁점 (블로터)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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