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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아버지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던 딸의 포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게 힘들어 아우성쳤다. 어떤 사람은 생존의 끄트머리에 내몰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딸은 비명소리를 치우기 위해 아버지의 방법을 꺼내 들었다. 10만이 넘는 인파가 청와대 근처에 모여 살려달라고 소리친 날, 대통령은 없었다. 공권력이 쏘아댄 물대포에 맞아 사람 하나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어느 날 대통령은 돌아와 그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테러리스트라고 말했다.

  • 백승호
  • 입력 2015.11.25 11:45
  • 수정 2016.11.25 14:12
ⓒ연합뉴스

서슬 퍼렇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였지만,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그 지옥 같던 시절을 상상하기엔 어렵지 않았다. 책 몇 권 읽었다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반 불구가 되어서 나오던 시절,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판결이 끝난 지 열 여덟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시절. 시간이 지나 그 암흑 같았던 시절이 역사가 되던 때, 우리는 그 역사를 '반성해야 할 것'으로 남겨두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33년쯤 지났다. 공과 과가 분명했다던, 그래서 죽은 뒤에도 사람들의 입에 수 없이 오르내렸던 자기의 아버지가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었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시절의 영광이 다시 올 것을 약속했다. 그 시절을 살아 낸, '경제성장'의 신화가 기억 속에 파편처럼 새겨졌던 보통 사람들은 그 딸에게 다시 한번 권력을 내주었다.

다시 3년쯤 지났다. 아버지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던 딸의 포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게 힘들어 아우성쳤다. 어떤 사람은 생존의 끄트머리에 내몰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딸은 비명소리를 치우기 위해 아버지의 방법을 꺼내 들었다.

구급차에까지 물대포를 쏘아대는 공권력

10만이 넘는 인파가 청와대 근처에 모여 살려달라고 소리친 날, 대통령은 없었다. 공권력이 쏘아댄 물대포에 맞아 사람 하나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어느 날 대통령은 돌아와 그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테러리스트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권력을 이양해 준 민중에게 말이다. 그는 아버지의 시대처럼, 어느새 헌법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우리가 합의한, 우리가 지켜낸 헌법은 그런 게 아니다

유신이란 이름으로 난도질 당한 헌법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목숨으로 되찾아왔다. 지금의 대통령은 그 헌법 아래에 놓여있다. 때문에 대통령은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의 방법이 아닌, 헌법이 명령하는 방법대로 통치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틀렸다. 대통령은 시민의 복면을 억지로 벗기기 이전에 왜 그들이 복면을 쓰고 시위를 해야 했는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시위권이 법적으로 적절하게 보호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대통령은 일탈적 폭력 몇 개를 조명해 '불법 폭력시위'라고 규정하며 시민을 적으로,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기 이전에, 공권력이 저지른 불법을 훨씬 무겁게 파악해야 한다. 시민의 불법은 공권력으로 제어할 수 있지만 공권력의 불법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공권력이 불법적으로 시민에게 힘을 행사한다면 대통령은 가장 먼저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게 우리 헌법의 명령이고 공권력이 공권력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직무유기는 대체 누가 했는가?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법치를 주문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법치를 돌아봐야 한다. 법치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이 아니다. 법치는 대통령과 국가시스템이 자신의 임의대로가 아니라 반드시 법률을 준수하며 통치해야 한다는 헌법과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다. 법이 형태만 남아 시민들의 자유권 행사에 해를 가할 때 비로소 법치는 부정당한다. 법치는 시민의 의무가 아닌 대통령의 의무다. 누가 누구한테 법치를 준수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가?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막는 모든 것을 악으로 치부하기 이전에 왜 우리 헌법이 경제성장을 명령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 헌법은 국민이 자유권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조건으로서의 경제성장을 주문한다.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을 해야 하고 정의로운 분배와 복지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이 나라의 유일한 가치로 선언한 뒤,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경제성장의 방해요소로 규정하며 심판을 자처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며 시민의 자유권 행사를 제한하고 있다. 헌법의 명령과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끄러운 시민들의 이견 때문이 아니라 그 이견 자체가 묵살될 때 비로소 찾아온다. 박 대통령의 '지금은 위기'라는 결론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그 진단이 틀렸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복면을 쓰고 고작 물병 몇 개를 던지는 시위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표현을 억압하고 국민의 요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대통령 때문에 발생했다.

아버지의 시대를 현대사의 유일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은, 아버지가 했던 잔혹한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며 통치하고 있다. 자기 아버지의 공이 얼마나 되는지와는 별개로 아버지의 민주주의는 틀렸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도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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