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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레닌 장례식 때 스탈린에 빙의?!

야당과 여당을 넘나들며 대통령까지 지내며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김영삼씨가 생전에 누렸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려 하고, 또한 그 자리에 끼지 못하면 그런 돼지 여물통(pork barrel)을 나눠 먹지 못한다는 절박감 탓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적 느낌도 드는 것이다. 특히나 '정계를 은퇴'하여 전남 강진에서 '칩거' 중이라는 손학규씨까지 며칠이나 상가를 지켰다고 하니 애잔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하의 트로츠키가 엉뚱하게도 자신이 극동 모국(某國)의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장례식에 빠진 정치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 줄 안다면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11.25 11:04
  • 수정 2016.11.25 14:12
ⓒ연합뉴스

1993년 2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씨가 지난 11월 22일 별세했다. 11월 22일은 공교롭게도 고인이 대통령 재임 중인 1997년에 외환위기 때문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이는 '문민(文民)정부'라는 자찬(自讚) 속에 시작했던 그의 대통령 시절의 참담한 결말이었고, 다들 아시다시피 모든 국민이 이러한 고인의 실정(失政)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또한 고인이 1990년에, (올해로 창당 60주년이 되었다는) 정통 야당의 큰 두 뿌리 중 하나인, 고인이 이끌던 이른바 상도동계를 들어서, 신군부 및 유신 본당과 야합한, 3당 합당을 한 것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정치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 역시 썩 입맛이 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가와 제사 때에는, 망자를 조문하고 애도하는 말만을 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예의인지, 언론에서는 아무래도 고인이 독재자 이승만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에 맞섰던 민주화 투사로서의 업적이나 대통령 취임 직후 이른바 하나회 출신 정치군인들을 숙청한 일들만 상찬되는 분위기였다. 특히 현재 집권 여당의 대표로서 고인이 1980년대 초 결성한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주산악회에 가담한 이래 고인을 모셔왔다는 김무성씨는 고인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며 상주(喪主) 노릇을 하면서 상가를 지켰다. 현재 제1야당인 새정련의 대표인 문재인씨도 미리 잡혀 있던 일정마저 취소하고 상가에 조문하러 왔다가 이렇게 상주라는 김무성씨와 어색한 조우를 하기도 했다.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이겠지만 필자 주변이나 필자가 활동 중인 트윗덤(쿨럭;)에서는 고인에 대한 그닥 좋은 얘기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님에 대한 추모 열기에 비해서는 그 열기가 훨씬 덜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연일 고인에 대한 추모 일색의 분위기가 계속되고, 또한 앞에서 본 것처럼 특히나 정치인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고인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겠다고 나서는 모습들을 보니 솔직히 당혹스러운 느낌이다. 그러다가 문득 김무성씨와 같은 정치인들이 기를 쓰고 고인의 상가에서 상주 노릇을 하거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은 어쩌면 고인이 태어나기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어떤 나라 지도자의 장례식과 유언장에 얽힌 사연이 혹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탓이 아닌가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써보게 되었다.

특히나 각하께서 아시면 놀라서 소스라치실 일이겠지만(응?) 그 국가 지도자는 바로 1917년 11월의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서 소련을 건국한 러시아의 공산주의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한다. 레닌은 1918년 그에 대한 정치적 반대파인 사회혁명당의 여자 사람 테러리스트의 저격을 받은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투병해 오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레닌의 투병 생활이 길어졌기 때문에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정당인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레닌의 후계자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 투쟁이 이미 레닌 생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이 권력투쟁은 크게 두 계파 간의 싸움이었는데, 한편에서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직을 맡고 있던 스탈린과 그를 지지하는 지노비예프 및 카메네프 이렇게 3자가 연대한, 요새식으로 말하자면 스-지-카 연대(웃음)라고 할 만한, 계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킬 때 군사봉기를 주도했으며, 혁명 성공 후 반(反)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트로츠키를 추종하는 계파가 있었다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다.

쇠약해져 가는 레닌을 두고서(레닌은 간헐적으로 업무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점점 총상 후유증이 심해져서 투병 마지막에는 말조차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들 볼셰비키의 두 계파는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는 중이었지만 막상 레닌의 사망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특히나 트로츠키의 경우 권력 투쟁 중에 오리사냥을 떠났다가 지독한 감기 몸살이 걸려서(러시아사 연구자인 E.H. Carr가 그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바꿀만한 감기라는 취지로 약간은 익살스럽게 언급했었다) 스스로 요양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다. 트로츠키와 그의 부인이 탄 열차는 따뜻한 흑해연안 휴양지로 가기 위해 (지금은 조지아의 수도가 된) 그루지야의 티플리스(현재 명칭은 티빌리시)에 와 있었다.

트로츠키는 티플리스에서 레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트로츠키에게 레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 준 이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이었다. 오랫동안 레닌의 동지로서 레닌과 힘을 합쳐 혁명과 내전에서 싸웠던 트로츠키는 당연히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제1순위 인사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레닌의 장례식에 올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레닌의 장례식이 치러질 날(트로츠키의 전기 3부작을 쓴 아이작 도이처가 이 부분을 다룬 트로츠키 전기 2부 [비무장의 예언자]에서는 레닌이 죽은 다음 날로 나오고, 트로츠키 자신의 자서전에서는 그 주 토요일-1924년 1월 26일-이라고 나온다)까지 돌아 올 수 없을 테니, 괜히 여행을 중단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말고, 요양지로의 여행을 계속하여 요양지에서 몸조리나 잘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말을 믿고, 기차를 모스크바로 되돌리지 않고, 흑해연안으로의 요양을 위한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요양지에서 홀로, 혁명동지이자 상사인 레닌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며 애도한다.

그러나, 레닌의 장례식은 1924년 1월 27일 일요일에 치러진다.

트로츠키가 그때 스탈린의 말을 듣지 않고 열차를 모스크바로 돌렸다면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정적 트로츠키가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1924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치러진 레닌의 장례식 행렬.

정적의 말을 이렇게 믿었다는 것은, 트로츠키를 끝내 정치적 패배 및 절명(絶命)까지 이르게 한 나이브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반면에 꼼꼼하게 이런 부분까지 속였다는 것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해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하게 한 간교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트로츠키가 빠진 레닌의 장례식은 어떻게 치러졌을까? 당연히 당의 서기장인 스탈린이 상주 노릇을 하게 되었다. 레닌을 조문하기 위해서 구름 같이 모여든 당시 러시아인들은 조문객들을 맞는 볼셰비키당 고위 인사들 중에서 트로츠키가 빠져 있는 것을 의아해 했다. 아니 전세계가 트로츠키의 부재와 장례식을 주관하는 스탈린의 모습에서 소련의 장래 권력의 향배를 읽었다(고 믿었다). 앞서 얘기한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에는 트로츠키의 요양 여행에 동반하지 못한 트로츠키의 미성년 아들조차 이 레닌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트로츠키가 레닌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에 당혹해 하며 아빠를 원망하는 편지를 썼고, 이를 읽은 트로츠키가 그제서야 아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미 만사휴의(萬事休矣).

스탈린은 단순히 레닌의 장례식에서 상주 노릇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일당 독재 국가인 당시 소련에서 지도자였던 레닌의 장례식을 주도하였던 정치인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장례식 후 자신과 3자 스크럼(웃음)을 짜고 있던 지노비예프 및 카메네프와 함께 소련의 당과 정부의 주요 직위들을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채워 나갔고, 반대파인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내몰았다. 이는 모두 레닌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스탈린은 자신과 3자 연대를 했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도 숙청한다.) 반면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단순히 상주 노릇만 못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으로 밀리게 된다. 트로츠키는 그냥 권력만 잃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소련에서 추방되었고, 끝내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도끼에 맞아 죽기까지 한다.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장례식에 불참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어쩌면 김영삼의 장례식에 몰려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도 (특히 상주 노릇을 자처한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씨 같은 이는) 위와 같은 레닌 장례식의 고사(故事, 응?)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야당과 여당을 넘나들며 대통령까지 지내며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김영삼씨가 생전에 누렸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려 하고, 또한 그 자리에 끼지 못하면 그런 돼지 여물통(pork barrel)을 나눠 먹지 못한다는 절박감 탓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적 느낌도 드는 것이다. 특히나 '정계를 은퇴'하여 전남 강진에서 '칩거' 중이라는 손학규씨까지 며칠이나 상가를 지켰다고 하니 애잔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하의 트로츠키가 엉뚱하게도 자신이 극동 모국(某國)의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장례식에 빠진 정치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 줄 안다면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레닌의 장례식뿐만 아니라 레닌의 유언장에 관한 얘기를 덧붙여 보고 싶다. 레닌이 죽기 1년여 전인 1923년 1월 4일에 쓴 유언장은 레닌의 부인 크루프스카야에게 맡겨졌다가 레닌의 장례식 후 그녀가 소련 공산당 주요 인사들에게 공개한다. 그런데 이 유언장의 내용을 알게 된 관계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 유언장에서 레닌은, 자신의 사후 후계자를 자처하게 될 스탈린에 대한 팥다발 같은 비난을 퍼부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서기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스탈린이 레닌의 장례식을 주도하면서 권력을 굳힌 다음이었는지라 누구도 감히 고인의 진정한 뜻을 그제 와서 실천(!)하자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은 새로운 독재자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들이 장례식에서는 그렇게 높이 떠받들었던 레닌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장을 공개하지 말자고까지 결의한다! (레닌의 유언장은 1926년 10월 18일에 미국 신문 뉴욕타임스-이 신문은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다-에 세계 최초로 실려서 -필자는 레닌의 유언장 작성 일자를 이 뉴욕타임스 기사에 근거하여 앞에 링크한 레닌의 유언장 본문에 나온 일자와는 달리 1923년 1월 4일로 보았다- 온 세상에 폭로된다. 자신들의 국가의 국부(國父, 풉)의 유언장마저 꽁꽁 감추었다가, 장래의 최대 적국이 되는 미국이 먼저 공개하는 소련이 끝내 냉전에서 미국에게 패하고, 나라마저 망한 것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레닌과 달리 김영삼씨는 구체적인 유언을 남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별세한 김영삼씨는 한때는 현재 대통령 부친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지금은 그 아빠의 후광 덕분에 대통령이 된 박근혜 대통령에 머리를 조아린, 자신의 아들을 자처하며 상주 노릇을 한 김무성씨나 새누리당에 있는 자신의 옛 가신(家臣)들에 대하여, 김영삼씨는 지하에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닌의 유언장처럼 결코 실행되거나 제때 공개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레닌이 가장 싫어했던 스탈린이 상주 노릇까지 하게 된 기막힌 역설이 혹시 한반도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김영삼씨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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