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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이들의 도시 | 고담의 슈퍼 악당, 그들의 유년 시절

그는 걸핏하면 1달러 은화를 던지면서 앞면이 나오면 때리고, 뒷면이 나오면 때리지 않겠다고 아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 이 동전은 둘 다 앞면이었고, 하비는 매일 아버지에게 모진 폭행을 당하며 자랐다. 하비의 이중인격은 이 학대의 산물이며, 후일 투페이스가 된 이후에 그는 동전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앞면이 나오면 살려주고 뒷면이 나오면 죽이겠다면서.

  • 이규원
  • 입력 2015.11.23 11:14
  • 수정 2016.11.23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9] 학대받은 아이들의 도시

─ 고담의 슈퍼 악당, 그들의 유년 시절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가 있느냐? 어느 곳에 우리가 싫어할 것이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아무 꾀도 갖지 않는다. 아무 획책도 모른다. 거기에 무슨 꾸밈이 있느냐?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 사랑스럽고도 부드러운 위엄을 갖추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곱게 곱게 순화시켜 준다."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시 「어린이 찬미」에서 아이들을 모든 고요와 평화의 결정체라고 노래했다. 오늘은 고담이라는 도시를 어둠으로 물들이는 배트맨 시리즈 대표 악당들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 사랑으로 태어났던 그들이 가정 폭력으로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소개한다.

조커

"내 흉터가 궁금해? 우리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날건달이었어. 하루는 평소보다 더 미쳐 날뛰었고. 엄마는 방어하려고 부엌칼을 들었어. 아버지는 그게 심히 못마땅했고, 내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찔러 죽였지. 낄낄대면서.... 내게 묻더군. '왜 심각한 표정이야?' 그러곤 다가왔어. '왜 심각한 표정이야?' 칼을 내 입에 넣더니, '웃게 만들어 주마.' 그러곤..., '왜 심각한 표정이야?'"

다음은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털어놓은 자신의 과거사이다. 하지만 혼돈과 불확정성을 상징하는 조커답게 영화 속 그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는 배트맨 만화 시리즈에서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으로, 배트맨 작가진 역시 조커의 과거에 관해 수십 년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이 혼돈에 일조했다.

조커의 아버지 이야기는 「배트맨 디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와 「배트맨 비욘드」의 작가 폴 디니가 글을 쓴 만화 『배트맨의 모험: 미친 사랑』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여기서도 조커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항상 얻어맞고 살던 어린이다. 일곱 살 소년 조커의 소원은 기특하게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 어느 날 서커스 구경을 갔다가 아버지가 광대의 공연을 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본 그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앞에서 광대 흉내를 낸다. 그러나 조커는 사랑은커녕 코가 부러지게 얻어맞고 의식을 잃은 후 3일 뒤에야 병원에서 깨어난다. 조커의 이런 회상을 들으며 정신과 의사 할린 퀸젤은 그의 아픔에 연민을 느낀다. 조커를 사랑하게 된 그녀가 마침내는 조커의 사이드킥 할리퀸이 된다는 것이 이 만화의 줄거리이다.

1994년 아이즈너상을 받고 배트맨 애니메이션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편입되기도 한 명작 단편 만화, 『배트맨의 모험: 미친 사랑』 표지.

( 이미지 출처:http://dc.wikia.com/wiki/Batman_Adventures:_Mad_Love_Vol_1_1?file=Batman_Adventures_Mad_Love_Vol_1_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최근 『가족의 죽음』, 『제로 이어 - 비밀의 도시』가 정식 출간된 뉴52 배트맨 시리즈에도 새로운 조커 탄생기가 있다. 2013년의 뉴52 《배트맨》 23.1호에서는 유니스 숙모 밑에서 학대 받으며 자란 조커의 유년기를 보여 준다. 이 여자는 숨어 있는 꼬마 조커를 찾기 위해 망치로 방문을 깨부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머리채를 붙잡고 끌어낸 뒤에는 표백제를 잔뜩 묻힌 청소솔로 아이를 씻기며 학대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남편을 '콜롬비아 넥타이'(1940~1950년대 콜롬비아의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라는 내전 시대에 쓰인 잔인한 처형 방법)로 죽인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다.

스케어크로

『가족의 죽음』과 극중 시간대가 같은 뉴52 《배트맨: 다크 나이트》 11호~13호에서는 공포를 무기로 삼는 고담의 또 다른 광인, 스케어크로의 유년기를 이야기한다. 조너선 크레인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발가벗기고 몸에 전선을 붙여 지하실에 던져 놓고는 컴퓨터로 아들의 신체를 살피며 '공포'를 연구했다. 아무리 애원을 해도 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들을 자신의 실험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심장 마비로 죽자, 조너선은 지하에 갇힌 채 공포와 굶주림에 떨다가 며칠 후에야 경찰에게 발견된다. 이 끔찍한 기억은 훗날 소년을 공포의 악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포이즌 아이비

뉴52 《디텍티브 코믹스》 23.1호에서는 포이즌 아이비(파멜라 아이슬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 파멜라는 햇빛에 약한 피부 질환이 있어 밖에 많이 나갈 수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는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달랐다. 어머니는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바르고 가능한 한 야외 활동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딸을 위험한 밖에 내보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둘의 의견 차이는 일방적인 폭력으로 끝날 때가 잦았다. 어머니는 늘 눈에 멍이 든 채로, 혹은 부러진 팔을 붕대로 싸맨 채로 가정 일을 돌보았고,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른 다음날 화분을 사들고 와서 어머니에게 사과했다. 파멜라의 집 마당은 아버지가 사온 꽃으로 가득했다. 어린 파멜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꽃에 사람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끝내 아내를 살해하고 그 꽃밭 아래 시신을 파묻게 된다.

만화책 로고를 잠식한 덩굴 옻나무(poison ivy)? 뉴52 《디텍티브 코믹스》 23.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2_23.1:_Poison_Ivy?file=Detective_Comics_Vol_2_23.1_Poison_Ivy.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펭귄

펭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2012년 발매된 다섯 이슈짜리 단행본 『펭귄: 고통과 편견』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오스왈드 코블팟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갓난아기를 받아든 아버지는 아기의 매부리코를 보고는 기겁하며 아기를 집어던졌고, 셋 있는 형들도 모두 막내 동생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그는 학교에서도 모든 아이들의 놀림감이요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어린 오스왈드는 분노를 철저히 숨긴 채 형들을 하나씩 살해한다. 1989년 『시크릿 오리진 스페셜』에서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를 끝까지 찾아서 복수하고, 성인이 된 후 몸을 단련하고 싸움 기술을 익혀 암흑가의 거물이 되는 펭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그러진 상류 귀족 같은 펭귄의 이미지를 잘 살려낸 『펭귄: 고통과 편견』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Penguin:_Pain_and_Prejudice_Vol_1?file=Penguin_Pain_and_Prejudice_Vol_1_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투페이스

고담 시의 최연소 지방 검사 하비 덴트. 그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기억 때문이다. 1990년 《배트맨 애뉴얼》 14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크리스토퍼 덴트는 알코올과 도박 중독자였다. 그는 걸핏하면 1달러 은화를 던지면서 앞면이 나오면 때리고, 뒷면이 나오면 때리지 않겠다고 아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 이 동전은 둘 다 앞면이었고, 하비는 매일 아버지에게 모진 폭행을 당하며 자랐다. 하비의 이중인격은 이 학대의 산물이며, 후일 투페이스가 된 이후에 그는 동전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앞면이 나오면 살려주고 뒷면이 나오면 죽이겠다면서.

1995년 『배트맨: 투페이스』의 '범죄와 처벌'에서는 하비의 정신분열증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라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진다. 폭력적 인격에 잠식되어 무참히 아들을 때리던 아버지가 갑자기 정신을 되찾고는 아들을 끌어안고 우는 상황이 반복되는 속에서 하비 또한 같은 증세를 갖게 되었다는 것.

이중인격으로 고통 받는 악당 투페이스.

그의 탄생에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이 작용했을까?

『배트맨: 투페이스』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Two-Face?file=Batman_Two-Face_Crime_and_Punishment.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캣우먼

1994년 《캣우먼》 0호에서 셀리나 카일의 아버지인 브라이언 카일은 직장도 없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빈번히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대신 고양이만 신경 썼던 어머니는 결국 욕조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했으며, 아버지는 그녀를 허영심에 찌들은 여자라고 저주하였다. 어느 밤 잠에서 깬 셀리나는 술병을 쥔 채로 소파에 앉아 죽어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고아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던 끝에 고아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횡령을 저지르고 있던 고아원 원장의 미움을 사면서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고 생각한 원장에게 바다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한다. 셀리나는 결국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고 캣우먼이 된다.

고양이처럼 변덕스럽고 독립적인 캣우먼의 탄생기가 실린 《캣우먼》 0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Catwoman_Vol_2_0?file=Catwoman_Vol_2_0.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허쉬

브루스 웨인의 어린 시절 절친으로 『배트맨: 허쉬』의 메인 악당이었던 토머스 엘리엇 역시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다. 이 내용은 『배트맨: 허쉬』의 후속작에 해당되는 《디텍티브 코믹스》 846~850호의 스토리 아크인 '하트 오브 허쉬'에서 밝혀졌다. 웨인 가와 맞먹는 고담의 명망가 엘리엇 집안의 가주인 아버지는 넘치는 돈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치와 방탕에 빠져 살았고, 술에 취해 집에만 오면 아내와 아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너무 지나쳐, 자신이 엘리엇 가의 안주인으로 적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아들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덧씌우고 말았다. 토머스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자신을 조종하려는 어머니를 견디지 못하고 부모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며 악인으로 변해 간다.

배트맨을 향한 질투와 광기에 사로잡힌 악당, 허쉬.

그의 마음속을 엿볼 수 있는 《디텍티브 코믹스》 846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846?file=Detective_Comics_846.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리들러

『배트맨: 제로 이어』에서 고담을 몇 개월이나 위협한 천재적 범죄자 리들러(에드워드 니그마) 역시 아동학대의 희생자였다. 알렉스 로스의 《저스티스》 2호를 보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거짓말을 단속할 수단으로 폭력을 쓰는 바람에 그가 수수께끼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른 버전도 있다. 2005년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전설》 185호~189호에서는 에드워드가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사기꾼에 쓰레기라고 부르며 무차별 구타하던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의 능력을 자신의 욕망 채우기에만 쓰려 했던 토머스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능력을 무시하기만 했던 에드워드의 아버지 역시 아들을 괴물로 만들고 만다.

배트걸: 카산드라 케인

지금까지 고담 시 악당들의 출생 내력을 알아보면서, 그들에게도 저마다 악인이 될 이유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올곧게 커나가는 사람이 훨씬 많은 법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도 부모의 학대를 받으면서 빛을 잃지 않고 새로운 가족까지 얻은 사례가 있으니, 바로 마지막으로 소개할 카산드라 케인 배트걸의 경우가 그러하다. 배트걸 하면 바버라 고든이 익숙한 한국 팬들에게는 그녀의 이름이 낯설지도 모르지만, 카산드라 케인은 그 막강한 전투력과 함께 기구한 운명으로 많은 팬을 거느린 캐릭터다. 그녀의 탄생기는 배트걸 시리즈 전체에 걸쳐서 조금씩 소개되다가 《배트걸》 70호~73호에서 그 비밀이 완전히 공개되었다. 카산드라의 아버지는 데이비드 케인이라는 암살자로 한때 브루스 웨인을 가르친 적도 있는 인물이다. 데이비드는 최고의 암살 파트너를 위해 어린 아이들을 양성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아예 최고의 무술 실력을 가진 여자를 통해 자신의 DNA를 물려받은 아이를 낳기로 한다. 그에게 선택받은 여자는 '샌드라 우산'. 바로 훗날 DC 최고의 무술가로 손꼽히는 '레이디 시바'다. 샌드라에게 계략을 걸어 딸을 얻은 데이비드는 아이를 말과 글이 없는 환경에서 키웠다. 카산드라는 신체의 미묘한 반응과 움직임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즉각 읽어내는 능력을 갖고, 10살이 되기도 전에 살인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냉혹무비한 살인 기계로 키우려는 아버지에 맞서 배트 패밀리에 새로이 둥지를 틀면서 브루스 웨인의 양녀이자 3대째 배트걸로 활동하게 된다.

배트맨과 1대1로 격투할 수 있는 유일한 배트 패밀리이면서

그 과묵함과 일상생활의 갭으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카산드라 케인.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실린 《배트걸》 7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vignette3.wikia.nocookie.net/marvel_dc/images/6/6b/Batgirl_Vol_1_71.jpg/revision/latest?cb=20090107180407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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