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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습니까?"

요즘 <송곳>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그날의 토론을 떠올린다. 드라마 <미생>을 볼 때도 그랬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은 비판할 수 있지만, 사장은 비판할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 고용주는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갖 굴욕을 감수한다. 이것이 <송곳>과 <미생>이 폭로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 김누리
  • 입력 2015.11.23 06:15
  • 수정 2016.11.23 14:12
ⓒJTBC

독일에서 서독과 동독 출신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동서독 학생들의 인식차가 의외로 컸다. 서독 학생들은 주로 동독인들의 낮은 정치의식을 비판했다. "동독의 독재정권 아래서 왜 그렇게 굴종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서독 학생의 질타에 동독 학생이 맞받았다. "우리가 독재정권에 맞서지 못한 건 사실이다. 당신들은 총리를 비판하고,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 조롱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사장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정권은 비판하지 못했지만, 사장은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다."

요즘 <송곳>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그날의 토론을 떠올린다. 드라마 <미생>을 볼 때도 그랬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은 비판할 수 있지만, 사장은 비판할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 고용주는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갖 굴욕을 감수한다. 이것이 <송곳>과 <미생>이 폭로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동독 학생은 서독에서 '사장 비판'이 가능하냐고 힐난했지만, 독일에서 노동자와 고용자의 관계는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독일 노동자는 노동조합 이외에도 '노사공동결정제', '직장평의회' 등의 제도를 통해 회사의 경영뿐만 아니라 고용과 인사 문제의 결정에도 참여한다. 노동자는 고용주의 일방적인 지시를 받는 객체가 아니라, 기업 이사회에 절반의 의결권을 갖고 참여하는 주체이다. 독일 노동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또 필요하면 당연히 사장도 비판할 수 있다. 이런 민주적 운영방식이 독일 기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게 한 비결이다.

우리는 어떤가? 기업가는 아무런 민주적 견제도 받지 않고 절대왕정 시대의 제왕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을 전횡하고 있다. 어디 기업뿐인가.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에서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학교, 군대, 검찰, 언론, 관청, 교회, 병원 등을 보라. 구성원들의 민주적 의사가 반영되는 조직이 얼마나 되는가? 지난 60년간 어렵게 쟁취한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사회민주화'는 거의 진전이 없다.

경제민주화나 문화민주화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갑을관계를 악용한 대기업의 착취가 자심해지면서 경제민주화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으며, 권위주의와 병영문화의 강고한 뿌리는 문화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공동체의 지배적인 원리로 정착되지 못했다. 그나마 민주주의가 숨 쉬는 공간은 정치뿐이다. 사회, 경제, 문화 영역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기득권 집단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뼈아픈 자리는 정치다. 절대권력의 아성이 허물어진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폭력적으로 정치권력을 되찾기도 어려운 시대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를 악마화한다. 정치 혐오를 부추기고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여, 정치의 변혁적 뇌관을 제거한다.

빌리 브란트는 1969년 "민주주의를 감행하자"는 구호를 앞세워 전후 최초로 정권 교체를 이루었고, 독일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도 이제 민주주의를 감행할 때가 되었다. 정치민주화가 일구어낸 법적, 제도적 토대 위에서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 문화민주화를 '감행'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여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현장에 있다. 민주주의는 이미 성취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이 하루하루 채워가야 할 숙제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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