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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판' 구고신의 하루(사진)

ⓒJTBC

노무사의 법전: 용기 내 싸우는 사람들이 진짜 연장이라는 비정규직지원센터 공인노무사 문상흠씨

전화벨이 울린다. 임금 체불 상담 전화다. 연장수당과 주휴수당을 받지 못했단다. 근로기준법 제56조. 계산기를 두드려 체불 액수를 알려준다. 위법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그의 뇌에 저장된 근로기준법 116개 조에서 해당 조항이 하나씩 호출된다. 대학 3학년 때 처음 만나 책장이 닳도록 달달 외운 법전은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 뭉치를 뒤진다. 회사가 보낸 답변서를 훑어보고,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의 이유서를 작성한다. 헷갈리는 노동법 조항은 국가법령정보센터(law.go.kr)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한다. 노동위원회 심문회의를 준비한다.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문상흠(43) 공인노무사의 하루가 시작됐다.

문상흠 공인노무사

휴대전화가 울린다. 경기도 안산의 한 뷔페에서 이틀을 일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그런데 관리자가 심하게 욕설을 하고 엉덩이를 발로 차기까지 했단다. “사용자는 사고의 발생이나 그 밖의 어떠한 이유로도 근로자에게 폭행을 하지 못한다”는 근로기준법 제8조 폭행 금지 위반이다.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세다. 아침 7시40분부터 밤 10시40분까지 15시간 일했고, 시급 6천원을 받았단다.

뇌에 저장된 근로기준법

“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근로시간은 1일에 7시간, 1일 연장근로 1시간”이라는 제69조 위반에, 연장근로 8시간에 대한 50% 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제56조 위반이다. 학생은 폭행한 관리자의 사과를 원했다. 대충 넘어가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학생이 뷔페 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어 폭행에 대해 사과하라고 하면서 녹음을 해 증거를 확보하겠단다. 똑똑한 학생이다. 드라마 <송곳>에서 노동상담소장 구고신 노무사가 한 대사가 떠오른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사무실을 나와 안산시 산하 한 공공기관으로 향한다. 용역업체 소속인 청소노동자들을 공공기관이 직접 고용하는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서다. 이 공공기관은 지난 5년 동안 한 보훈단체에 청소 업무를 위탁했다. 현장소장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제 신발을 빨아오게 했다. 식권을 헌납하게 했고, 성희롱까지 일삼았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문 노무사를 찾아왔다. 문제를 제기해 소장을 쫓아냈다. 공공기관이 지급한 용역비를 계산해봤다. 청소노동자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월급을 10% 인상해도 1년에 1억원 넘게 남는다. 서울시처럼 직접 고용하라는 요구에 담당 공무원은 ‘권한 밖’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여러 번 만났는데 해결할 의지가 안 보인다. 노조를 만들어 싸우지 않아서일까? “싸움은 경계를 확인하는 거요. 싸우지 않으면 경계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걸 넘을 수도 없어요.” <송곳> 구고신 소장이 머뭇거리는 이수인에게 한 말이다.

전화가 걸려온다. 신풍제약 해고자 이영숙씨다. 그녀가 진정을 넣어 노동청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았는데, 회사는 파견노동자 50명 중 그녀만 직접고용을 하지 않았다. 회사는 그녀에게 경남 진주영업소 영업직으로 가라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회사가 정규직 고용 의사를 밝혔으니, 직접고용 의무를 다했다며 손을 놓는다. 이훈원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장은 국정감사에서 노동자들이 원해서 불법파견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화가 치밀어오른다. 정부가 이 모양이니, 기업이 대놓고 불법을 저지른다.

오늘 영숙씨는 처음으로 혼자 서울 강남에 있는 신풍제약 본사까지 가서 1인시위를 했다. “지는 건 안 무서워요. 졌을 때 혼자 있는 게 무섭지. 그냥… 곁에 있어요. 그거면 돼요.” <송곳> 버스노동자 차성학의 대사다. 문 노무사는 곧 함께하러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중년의 여성들이 단감을 한 봉지 사들고 왔다. 롯데캐논(현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 안산공장에서 3~5년간 일하다 해고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원청업체는 경기가 좋지 않다며 하청업체에 일감을 주지 않고, 주 3~4일 근무를 시켰다. 근로기준법 제46조에서 정한 휴업수당도 지급하지 않았다. 실업급여를 받게 해줄 테니 사직서를 쓰라고 했고, 권고사직을 거부한 노동자들을 잘랐다. 해고당한 5명이 문 노무사를 만나 노동청에 그동안 받지 못한 휴업수당을 진정했고, 지난 9월30일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다.

하청업체에서 답변서를 보내왔다. 근무태도 0점, 업무능력 0점이라고 적혀 있다. 업무능력이 빵점인데 5년을 데리고 일했단다.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언니들, 급하게 조작해 만든 문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함께 상담을 하던 김진숙 정책팀장이 달랜다. 문 노무사가 회사에서 두 달치 임금을 줄 테니 합의하자는 전화가 왔다고 얘기해준다. 웃기는 소리다. “회사가 노동청의 휴업수당 지급 명령을 안 따르면 어떻게 할까요? 제가 롯데캐논 앞에 가서 1인시위라도 할까요?” “노무사님이 왜 하세요. 저희가 해야죠.”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떠나가는데 용기를 내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 문 노무사는 노동법이 이들의 작은 울타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010년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문 노무사는 서울의 한 노무법인에 들어갔다. 어린이집 교사 해고 사건을 처음 맡았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패소한 원장이 의뢰했다. 근로기준법 제23조 해고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답변서를 써내려갔다. 어린이집 교사의 작은 실수를 큰 잘못으로 부풀려야 했다. 일을 못하고, 동료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사건을 뒤집어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정을 끌어냈다. 공인노무사로서의 첫 승소, 하지만 회한이 몰려왔다.

취업규칙과 근로계약서를 만들고, 4대 보험을 계산하고, 임금체계를 짜는 일을 자문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과로에 시달리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영업사원의 산업재해를 승인받았을 때는 기쁨과 함께 자부심도 밀려왔다. 그러나 노무법인에 사건을 의뢰하는 손님은 산재 사건이 아니면 대부분 사 쪽이었다. 해고가 정당하다고 주장해야 하고, 당연히 줘야 할 주휴수당을 안 줘도 된다는 답변서를 써야 했다. 기본급에 성공보수를 더하면 먹고살 만한 월급이었지만 체한 것처럼 명치끝이 답답했다. 노동자 입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2012년 안산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노무법인 대표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고, 안산으로 내려왔다.

2012년 겨울. 중년의 아저씨가 센터를 찾아왔다. 신신제약 파견노동자였다.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파견노동자를 6개월마다 바꿔가며 20명을 상시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파견법 제5조, 제6조 2항 직접고용 의무 위반. 자영업을 하면서 ‘사장님’으로 살다 사업이 망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아저씨는 동료들에겐 관심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건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나중에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회사는 불법파견 진정을 낸 아저씨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아저씨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파견노동자 19명이 직접고용이 됐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걸 보여줬다.

사장에서 비정규직으로… 풍경이 변했다

30만 명이 일하는, 대한민국 최대의 반월국가산업단지가 있는 안산은 고용노동부도 인정한 파견노동 1번지, 최악의 노동도시다. 정왕역과 안산역 일대엔 직업소개소가 편의점보다 많다. 기업이 하루에 7만8천원을 주면, 파견회사는 2만8천원을 떼먹고 5만원을 일당으로 준다. 한 사람을 소개하면 가만히 앉아서 한 달(25일)에 70만원을 번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파견업체가 들어선 이유다. 안산역 앞 파견업체 ‘삐끼’는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묻는다. “일하러 가실래요?”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안산과 시흥의 파견노동자가 2만6천 명으로 전국 파견노동자의 19.8%였다. 현행 파견법에는 임시·간헐적 업무에 3개월, 사유가 계속되면 6개월까지만 파견노동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상시 업무에 6개월 쓰고 사람을 바꿔 6개월 사용한다. 모두 불법이다. 한 도시에 연쇄살인이나 강도사건이 벌어지면 특별수사본부가 구성되고 민관이 자율방범대를 만들어 범죄 예방에 나선다. 정규직 자리에 불법으로 파견노동자를 사용하는 연쇄 노동범죄가 버젓이 벌어지는 안산. 그래서 노동계는 정부에 상시적인 ‘불법파견 감시신고센터’를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인력이 부족하면 민관 합동으로 꾸리자고 했다. “도둑이 넘쳐나면 방범 초소를 만들고 순찰을 강화해야죠. 그런데 노동청에서는 인력 타령만 합니다. 범죄를 막을 의지가 없는 거죠.” 문 노무사가 분통을 터뜨린다.

박근혜 정부는 노동범죄를 합법화하는 길을 택했다. 55살 이상과 전문직, 뿌리산업에 파견을 전면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문 노무사가 법전을 찾았다. 뿌리기술(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제조업의 전반에 걸쳐 활용되는 공정기술)을 활용하는 업종은 사실상 모든 제조업이다. “뿌리산업에 파견을 허용하면 섬유와 제약회사를 제외하고 반월공단의 회사 90%가 파견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게 됩니다. 어느 기업이 정규직을 채용하겠습니까?”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박재철 센터장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디 안산뿐이랴. 대통령이 망치만 두드리면 모든 업종이 뿌리산업이 된다. 전 일터의 파견화, 전 국민의 하청화 시대가 온다. 파견노동 1번지 안산의 오늘이 대한민국의 내일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엄마에게 삼촌(문 노무사)의 직업을 물었다. 엄마가 노동자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얘기해주자 조카는 돈도 못 벌고 힘들겠다며 삼촌을 걱정했다. 노동하는 사람도 힘든데 도와주는 사람이 무슨 돈을 벌겠냐고 생각한 것이었다.

국가가 공인하는 노동법률 전문가인 공인노무사는 3천여 명. 대부분이 사장님을 도와준다. 가장 악명 높은 이는 창조컨설팅 심종두 전 노무사다. 노조는 그를 ‘용역깡패를 동원한 노조 파괴 전문가’로 부른다. 창조컨설팅과 계약을 맺은 회사의 민주노총 소속 ‘강성’ 노조들이 줄줄이 깨졌다. 창조컨설팅은 2년8개월 동안 82억원을 벌었다. 심종두는 공인노무사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부당해고와 임금체불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경영지도사로 복귀했다.

연쇄 노동범죄에 인력 타령하는 노동청

반면 사장님이 아니라 노동자를 도와주는 노무사도 있다. <송곳>, 영화 <카트><또 하나의 약속>에 나오는 공인노무사들이다. 사용자 사건을 수임하면 회원 자격이 박탈되는 규약을 가진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노노모)이 대표적이다. 2002년 7월10일 28명이 만든 노노모의 회원은 137명으로 늘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노무사들은 문 노무사의 조카 말처럼 돈을 못 번다. 노노모 이정미 사무처장은 노무사들이 보람과 자부심이 없다면 버티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송곳’ 6회 명장면!안내상, 푸르미 직원들에게 송곳 같은 날카로운 강의! 함께 들어보아요~” #jtbc #송곳 토,일 #9시40분

Posted by 송곳 on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문 노무사는 며칠 전 아내와 드라마 <송곳>을 봤다. 아내는 서울의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돈도 안 되고, 늦게 퇴근하는 일을 하는 남편이 안쓰럽다. 문 노무사는 <송곳>이 반갑다. “우리가 현장에서 하는 일이 웹툰과 드라마로 방송되는 걸 보니까 뿌듯하죠. 구고신은 너무나 말을 잘하고 멋지게 나오던데, 저는 사람들 확 휘어잡는 거 못하거든요. 그래도 사건을 진행하면서 서로를 믿어가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죠.”

안산의 밤이 깊어간다. 롯데캐논 사내하청 해고자들과 헤어져 집으로 향한다. 문 노무사는 자신이 가진 노동의 도구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노무사가 아무리 법을 잘 알고 서면을 잘 써도 노동자가 회사에 넘어가거나 포기하면 끝이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그의 진짜 ‘연장’이다. 하나쯤 뚫고 나와, 떠나가지 않고, 오래도록 그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송곳>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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