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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영어공부는 꽝 없는 로또

그날 이후, 나는 내 팔자가 10억짜리 팔자라고 믿고 산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팔자. 살면서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즐기고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그만둔다. 통역사든 예능피디든. 그리고 더 재미날 것 같은 일이 보이면 일단 도전해본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다 하고 사는 10억짜리 팔자를 믿고. 생각해보면 내 영어가 10억짜리 영어다. 첫 직장 그만둘 때도, 통역사 그만둘 때도 믿는 구석은 영어였다. 즐겁지 않은 전공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직업을 찾아나서는 용기, 모두 영어 덕분에 얻은 것이다.

  • 김민식
  • 입력 2015.11.20 06:31
  • 수정 2016.11.20 14:12
ⓒgettyimagesbank

[공짜 영어 스쿨] 10. 영어공부는 꽝없는 로또

20년 전 통역대학원 다닐 때 일이다. 사촌누나가 어느 날 전화를 했다. 같이 성당에 다니는 어떤 아주머니가 있는데, 우연히 내 얘기를 듣고는 자신의 딸을 한 번 소개해 달라고 했단다. 소개팅을 사양하는 법은 없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저쪽 집안 조건이 조금 까다로운지 사주팔자를 보게 생년월일을 달라는 거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궁합까지 보나? 생일을 알려준 후, 얼마 후 그 아가씨를 만났다. 느낌은 뭐, 그냥 그냥. ^^ 예의상 연락처를 받고 헤어졌다. 누나한테 전화가 왔다. 그 아가씨 또 안 만나냐고. 상대편 집에서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니 꼭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 아가씨는 내가 별로인 듯했는데?

한 달이 지나고 누나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전화 해봤냐고. 바빠서 못 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집에서 딸 방에 전화를 새로 넣었단다. 집으로 전화하면 어른이 받을까봐 불편하면 그냥 딸 방에 있는 전화로 직접 하면 된다고 번호까지 알려주더라. 옛날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 전화로 전화했다가 엄격한 아버지한테 걸리면 난감할 때가 많았다. "누구라고?" "우리 딸은 왜 찾는데?" 불편해서 전화 안 한 거 아닌데... 만나고 싶은 사람은 죽자고 쫓아다니는 나인데... ^^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사는 것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듯이, 마음에 없는 상대를 만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도, 상대에 대해서도.

얼마 후, 다시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 집에서 조건을 걸었단다. 그집 딸과 결혼해주면 10억을 주겠다고. 엥? 이건 또 뭐지? 1995년 당시로 10억이면 꽤 큰 돈이었다. 알고 보니 그 집이 강남에 큰 건물이 하나 있는 부자란다. 당시 시세로 재산이 50억 정도 있는데, 아들 하나, 딸 하나란다. 딸한테 못해도 10억은 물려주지 않겠냐고. 딸이 소원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거란다. 그 시절에는 유학이 흔치도 않았고 기회도 많이 없었다. 영어를 못하는 딸 혼자 보내 고생시키기 싫어서 붙잡고 있었는데 내 얘기를 들은 거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사촌누나 집에서 얹혀살았다. 그 시절 나를 지켜본 누나인지라 내가 대학 시절 얼마나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는지 잘 안다. 국내에서 독학으로 영어해서 외대 통역대학원에 들어간 동생이 있다고 자랑을 한 거다. 아주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혹한 거다. 영어 잘하는 신랑이 있으면 딸의 유학 생활도 편해지겠지. 그래서 내건 조건이, 결혼하면 같이 유학 보내는데 2억, 한국 오면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주는데 3억, (95년 시세니까, 이게 가능) 자리잡을 때까지 생활비로 5억, 이렇게 10억을 줄 테니 딸과 결혼해달라는 거였다. 부모가 죽어 딸 나이 50에 유산 10억 남겨줘야 그때 가서 뭐하겠냐며, 기왕이면 그 돈으로 20대 때 딸의 인생을 바꿔주고 싶다고.

처음엔 이 사람들이 사람을 돈으로 사려고 하나?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10년간 쌔빠져라 공부한 영어가 10억은 된다는 얘기지? 로또보다 낫네. ^^ 웃으며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학생인지라 결혼 생각은 없다고 거절했다. (20대에는 돈 좋은 줄 몰랐던 게지. ^^)

그러고 몇년인가 지난 후, 사촌누나를 만났다. 누나가 나를 보더니 그 혼담의 뒷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 사모님이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역술인을 찾아갔단다. '이건 남자 사주고, 이건 여자 사주니 궁합 좀 봐주세요.' 했단다. 그랬더니 역술인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하는 말.

"어느 집에서 오셨습니까? 남자쪽입니까, 여자쪽입니까?"

"그건 왜요?"

"그걸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어떤가요?"

역술인 왈, '남자 집에서 오셨으면 이 결혼 절대 시키지 말고, 여자 집에서 오셨으면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남자 사주가 진짜 좋은 사주입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팔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여자 사주에요. 이 여자 팔자에는 이런 남자 만날 복이 없어요. 사주만 봐서는 둘이 인연이 없는데...... 아마 결혼까지는 못 갈 겁니다.'

사모님이 약이 올랐다.

"이 남자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인연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작용을 해야겠지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베팅을 세게 한 거다. 딸이랑 결혼하면 10억! 이렇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좀 이해가 가더라. 10억이란 돈이 왜 나왔는지. 그 점쟁이 진짜 용하네. 둘이 인연이 아닌 걸 어떻게 딱 맞혔지?

그날 이후, 나는 내 팔자가 10억짜리 팔자라고 믿고 산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팔자. 살면서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즐기고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그만둔다. 통역사든 예능피디든. 그리고 더 재미날 것 같은 일이 보이면 일단 도전해본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다 하고 사는 10억짜리 팔자를 믿고.

생각해보면 내 영어가 10억짜리 영어다. 첫 직장 그만 둘 때도, 통역사 그만 둘 때도 믿는 구석은 영어였다. 즐겁지 않은 전공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직업을 찾아나서는 용기, 모두 영어 덕분에 얻은 것이다.

영어 공부는 꽝 없는 로또다. 공부는 공들인 만큼 반드시 이루고, 이루지 못해도 잃은 건 없다. 젊어서 무엇 하나에 미쳐볼 수 있다면,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보람이니까.

(ps. 어떻게 하면 영어 공부, 더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한 달간 아르헨티나 여행 중입니다. 낮에는 놀러다니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씁니다.

어제는 Free Walks in Buenos Aires라고 해서 영어로 진행하는 시내 공짜 투어를 했어요. 전세계에서 온 여행객 30여명 중에 아시아 사람은 저 혼자더군요.

3시간 동안 시내 곳곳을 다니며 영어로 설명을 해줍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듣고 보니 시내관광이 훨씬 더 재미있네요.

20대에 공부해둔 영어 덕분에, 나이 50에 오늘도 저는 즐겁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 페이지에서 [공짜 영어 스쿨]의 다른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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