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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록은 쉽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메모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메모의 가장 큰 장점은 기억의 한계를 보완해 준다는 것. 메모를 한 순간 그 일을 잊어버리고 나머지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저장된 경험은 다른 경험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아진다. 창의성은 대부분 경험의 연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존 레논(1940-1980)의 명곡 이매진(Imagine)도 메모가 낳은 작품이다.

  • 김민태
  • 입력 2015.11.23 08:58
  • 수정 2016.11.23 14:12
ⓒgettyimagesbank

쓰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록은 쉽다

나는 2011년부터 나만의 방식으로 육아일기를 쓰고 있다. 대략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딱 한 줄씩 쓴다. 사실상 메모장에 가깝다. 시작은 '갓난아기의 울음을 좀 진정시킬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관련 책을 찾게 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전문가의 훈육지침과 아기의 성장을 비교하면서 기록했는데, 4년이 넘다보니 어느 새 책 한 권의 분량은 족히 채우게 되었다.

육아일기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록물은 하나 둘 쌓이고 그만큼 보람도 커진다. 이젠 거의 습관이 돼서 아이에게 발달상의 변화가 보이면 그 즉시 메모 애플리케이션에 옮겨 적는다. 아이의 언어, 반응, 날로 정교해지는 놀이 수준까지. 더불어 변화를 포착해 내는 나의 시선도 점차 예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소득은 메모를 하면서 아이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는 데 있다. 다수의 육아서를 낸 정신과 전문의 정우열은 "어떻게 그 많은 육아서를 쓰게 됐느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를 사랑해서 본 게 아니라, 보다보니 사랑하게 됐고 글로 남기게 됐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뭔가 한 줄이라도 쓰면서 발달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아이를 알면서 애착 수준도 높아지게 되는 걸 생생히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장으로부터 의외의 통찰을 건진다. 영국의 심리학자 찰스 퍼니휴는 이런 명문을 남겼다. "어린 아이를 가까이에서 관찰해보라. 그러면 인간 존재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부모들은 공감할 것이다. 아이들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놓치기 쉬운 중요한 진실을 알려준다.

메모에서 출발한 '점의 연결'은 아직 그 끝을 예측할 수가 없다. 최근에는 메모와 더불어 아이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들을 하나 둘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기록의 연장이다. 이 기록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대단한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강하게 드는 예감은 있다. '어쩌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최고의 결혼 선물이 되지 않을까?'

기록의 힘

미국 건국의 기초를 닦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은 다양한 분야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가장 유명한 것이 번개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피뢰침. 이 밖에도 다초점 렌즈, 소방차를 발명하는가 하면 미국 최초의 대출 도서관과 펜실베니아 대학 같은 도시 발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말년에는 미국 헌법을 만드는데도 참여했다. 직업으로 열거하자면 언론인, 사업가, 과학자, 외교관, 정치인까지 그야 말로 모든 영역에서 완벽에 가까운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미국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독서광이었던 프랭클린에게는 책만큼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 있었는데 바로 메모를 위한 '수첩'이다. 수첩을 통해 하루 일과를 점검하고 반성하는 것은 물론 좋은 글귀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틈틈이 기록했다.

프랭클린이 26세에 만든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도 수첩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날씨와 생활정보, 간단한 지식, 삶의 지혜 등 자신의 수첩에 적힌 내용을 달력에 옮겨 적었다. 이 달력은 당시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84세로 죽을 때까지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프랭클린 자서전>은 메모 습관이 낳은 역작이다. 이 자서전은 전 세계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며 2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프랭클린 못지않은 아메리카 드림의 주인공이자 월마트의 창립자 샘 월튼(1918-1992)의 기록 방식은 다소 특이하다. 그는 '모든 사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명을 실천하듯, 소형녹음기를 갖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녹음하고 즉각 실행했다.

"기록은 성공으로 가는 길의 방향키"라고 말한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1803-1882)도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날마다 기록했다. 이 과정은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저술에도 큰 힘이 되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성경 다음으로 큰 힘이 되어준 책으로 유명한 <세상에 중심에 너 홀로 서라>도 기록의 산물이다.

다산 정약용은 책을 읽으며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베껴 쓰기, 즉 초서(抄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을 채록해 모은다면 100권의 책도 열흘 공부거리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메모는 창의력의 저장소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메모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메모의 가장 큰 장점은 기억의 한계를 보완해 준다는 것. 메모를 한 순간 그 일을 잊어버리고 나머지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저장된 경험은 다른 경험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아진다. 창의성은 대부분 경험의 연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존 레논(1940-1980)의 명곡 이매진(Imagine)도 메모가 낳은 작품이다. 그는 뉴욕 힐튼 호텔에 머무른 뒤 비행기를 타고 가다 갑자기 떠오른 글을 호텔 메모지에 옮겼다. 이매진은 1971년 미국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고 불멸의 히트곡이 됐다. 존 레논은 어려서부터 책에서 읽은 좋은 글귀를 메모했는데 이것이 세계인을 감동시킨 수많은 노래를 만든 또 다른 배경이다.

간판장이에서 시작해 세계를 놀라게 한 광고인이 된 이제석은 냅킨이든 뭐든 손에 걸리는 건 모두 메모지로 활용할 정도로 메모광이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인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끼적거리는 습관을 익혔다. 이를 증명하듯 그가 남긴 기록 중에 자필 원고 분량만 7,000페이지에 달한다.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 MBC 황금어장에서 밝힌 일화는 그가 보통의 메모광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번은 식당에 갔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메모할 도구가 없어서 냅킨 위에 고추장을 찍어 메모했다. 작업실엔 아예 메모지통을 만들었다.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기록한 메모지를 쌓아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세스 고딘은 그의 저서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예측하기 힘든 경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정해진 규칙 없이 시도하라'고 조언하는데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단순하다. 블로그에 글쓰기. 그것이 어렵다면 소셜에 이런 저런 글이라도 올리기. 세스 고딘은 이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그저 쓰는 것이 최선입니다."

<습관의 재발견>의 저자 스티븐 기즈는 메모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 뭔가를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우선하게 만든다. 자신이 뭔가를 실행에 옮기는 걸 보는 것만큼 고무적이고 의욕을 유발하는 일은 없다." 스티븐 기즈는 작은 행동의 힘을 역설하고 있다. 쓰기에 있어서 메모보다 더 작은 행동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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