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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펙터'보다 비현실적인 다큐 '시티즌포'

뉴질랜드 정보기관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운동 기간에 자국 후보를 위해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 다른 나라 경쟁 후보 8명의 전자우편을 도감청한 정황이 폭로됐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단, 한국만 빼고. 브라질과 인도네시아 정부는 뉴질랜드에 공식 항의를 했고 해명을 요구했다. 한국만 잠잠했다. 불법 도감청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탓에 존 키 뉴질랜드 총리가 "한국은 자국의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후보를 우리가 도감청한 건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행정부 내부회의 때 발언한 사실도 뉴질랜드 의회 회의록에서 확인됐다.

  • 고나무
  • 입력 2015.11.19 11:49
  • 수정 2016.11.19 14:12

"픽션은 '그럴 듯'해야 한다는 데 오늘날 픽션이 처한 문제가 있다. 요즘과 같은 시대를 묘사하면서 '그럴듯함'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미국의 소설가•논픽션 작가 톰 울프가 2007년에 쓴 글의 한 대목이다. 톰 울프를 흉내내자면, 다큐 <시티즌포>가 스파이영화 <007 스펙터>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

1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시티즌포>는 전 미국 국가안보국(NSA)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을 다뤘다. 스노든은 NSA가 전세계 인터넷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불법 인터넷 도감청(CNE•Computer Network Exploitation)을 하는 사실을 알았다. 2013년 NSA의 이런 사찰을 증명하는 내부문건 수만 장을 언론을 통해 폭로했다. 한국을 포함해 NSA가 우방국과 적국, 외교관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인터넷 도감청을 한 사실이 알려졌다.

<한겨레> 탐사기획팀은 최근 스노든 문건을 전수 조사해, NSA가 어떻게 한국을 인터넷 도감청했는지 보도했다. 미국으로부터 도감청 당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한겨레>가 2년이 지난 시점에 스노든의 폭로를 재검토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2013년 당시 스노든 폭로로 드러난 한국과 관련된 내용들이 거의 다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한국이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 5개국 정보기관 연합체인 '파이브아이스'에 도감청 당한 의혹이 담긴 문건은 국익과 직결된 사건인데도 한국 정부와 국가정보원, 미래창조과학부는 적극적으로 실체를 규명하거나 대응하지 않고 있다. 둘째, 올해 초 국가정보원이 불법성 논란이 있는 외국 인터넷 도감청 프로그램을 구입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감시는 정보기관의 오래된 속성이지만, 인터넷 기술 발달이 과거와 전혀 다른 '무차별 감시의 시대'를 열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NSA 문건에는 도청을 의미하는 '와이어태핑(wire tapping)' 대신 주로 '컴퓨터 네트워크 익스플로이테이션'(CNE: Computer Network Exploitation)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번역어가 마땅치 않아 편의상 '인터넷 도감청'으로 지칭하기로 했다. 스노든 문건을 제보받아 기사를 썼던 글렌 그린월드가 만든 독립매체 <인터셉트>가 공개한 280건(약 5000장 분량)의 국가안보국 문건을 전수조사했고 <슈피겔>, <뉴욕 타임스> 등에서 공개한 스노든 문건 40여건도 다시 검토했다.

스파이영화보다 더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NSA의 인터넷 도감청 프로그램에 의해 한국 교수 출신 외교관의 외교부 및 서울대학교 전자우편이 2013년 해킹 당한 사실이 대표적이다. 해킹 피해자는 한국 외교부인데 해킹의 주체는 2명이라 약간 복잡하다. 주범은 NSA 해킹 프로그램이며, 공범은 뉴질랜드 정보기관 정부통신안보국(GCSB)이다.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뉴질랜드 정보기관 정부통신안보국(GCSB)이 2013년 1월말~4월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운동 기간에 자국 후보를 위해 NSA 인터넷 도감청 프로그램 '엑스키스코어'(XKEYSCORE)를 이용해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후보에 출마했던 박태호(63)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 다른 나라 경쟁 후보 8명의 전자우편을 도감청한 정황이 올 3월 <뉴질랜드 헤럴드> 및 독립매체 <인터셉트>에 폭로됐다.

'NSA'와 '뉴질랜드' 단어의 조합이 아직 이해되지 않는 독자는 '파이브 아이스(다섯개의 눈)'라는 단어를 기억하시라.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호주)•뉴질랜드 등 영어권 선진국 5개국 정보기관은 '파이브아이스'라는 연합체를 형성했다. 5개 나라 정보요원 모두 NSA 해킹 프로그램 이용과 데이터 접속권을 가진다. 일종의 영어권 정보 제국주의인 셈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박 교수는 당시 서울대와 외교부 단 두 개의 이메일로만 선거운동을 했다. 스마트폰은 아예 갖고 있지 않았다.

뉴질랜드가 이런 해킹을 한 사실 자체는 올해 초 한 뉴질랜드 언론에 의해 보도됐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단, 한국만 빼고. 브라질과 인도네시아 정부는 뉴질랜드에 공식 항의를 했고 해명을 요구했다. 한국만 잠잠했다. 불법 도감청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탓에 존 키 뉴질랜드 총리가 "한국은 자국의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후보를 우리가 도감청한 건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을 것(wouldn't give a monkey's)"이라고 행정부 내부회의 때 발언한 사실도 뉴질랜드 의회 회의록에서 확인됐다.

올해 5월 뉴질랜드 의회 회의록 일부를 소개한다.

데이빗 파커 의원 : "한국은 뉴질랜드가 자국민을 도감청한 사건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는 (존 키)총리의 발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브라질은 같은 사건에 대해 뉴질랜드 정부에 지속적으로 해명을 요구하는데 말입니다.

팀 그로서 장관 : 그건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뉴질랜드는 (도감청 사건에 대해)브라질 정부와 대사관급 대화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우방국이 요청할 경우 우리 행위(도감청)에 대해 투명하게 해명할 준비가 되어있고 이런 제안은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로부터 (해명)제안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키위와 양을 길러 먹고 사는 조용한 나라의 정보기관이, 그저 NSA의 인터넷도감청 프로그램에 박 교수의 이메일 주소를 집어넣어 검색하는 것만으로 한국 외교부 또는 서울대 메일을 도감청한 사실은 <본 아이덴티티>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비유법은 왜 살아남는가? 비유법은 진부하나 현실은 진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007 스펙터>가 시시한 독자들께 다큐 <시티즌포>와 <한겨레> 탐사기획팀의 스노든 탐사보도를 보시길 권한다. NSA가 북한의 정보를 얻기위해, 북한 관료를 인터넷 도감청하는 한국 정보기관의 해킹 프로그램을 해킹하는 '이중해킹'을 하고, 아이폰 등 애플 제품 해킹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삼성전자 제품을 전부 조사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사실들이 새로 드러났다. 다른 파이브 아이스 국가도 한국을 인터넷 도감청했다. 영국 정보기관은 코트라, 나이스 등에 기업메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의 IT기업 서버를 감시한 사실도 처음 드러났다.

왜 당신이 지금 스노든을 기억해야 하는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007 스펙터>에 등장하는 악인은 불구덩이로 사라지지만, NSA의 해외 인터넷 도감청은 계속되고 있다. 논픽션이 다루는 사건은 픽션보다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그 사건의 결과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 모순된 논픽션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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