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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화 강행, 심판은 이미 끝났다

정부는 심지어 국정교과서 집필진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공개되면 테러라도 당할 것을 우려하는 걸까. 도대체 학자라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비공개의 장막 뒤로 숨는가.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 봐서 거리낄 게 없다면 국정 교과서 집필진의 영광을 드러내고 축하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연합뉴스

국정화 강행, 심판은 이미 끝났다!

글 | 곽노현(전 서울시교육감)

1. '기억과 트라우마'라는 제목의 국제인권회의 참석차 타이페이에 와있다. 우리나라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서대문독립기념관으로 바꾸고 공원화했듯이 대만도 천수이벤 총통시절 도심의 정치범수용소를 국가인권박물관으로 만들었다. 6평 감옥에 30여 명을 처넣고 입만 뻥끗해도 웬만하면 10년 징역형을 때리는 등 국가의 이름으로 인간에 대해 가해진 폭력과 학대에는 끝이 없었다. 그 곳 장기수 출신의 7,80대 노인들은 살아남은 자의 책임으로 당시의 감옥 상황을 얘기해주는 자원봉사에 열심이었다. 만약 과거의 역사책에 이분들의 아픈 역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책이었을까?

2. 국민당 1당 독재와 계엄통치, 그리고 장개석정부의 통일정책에 저항했던 대만의 민주화 운동진영에선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계속된 계엄통치시대를 백색테러시대로 규정한다. 문화부 소속 국가기관인 국가인권박물관의 공식 책자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공식 부문에서도 나름 확립된 용어일 것이다. 백색테러라는 용어는 프랑스혁명기 때 반혁명세력들이 백색기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그러니까 반혁명적 국가테러시대라는 뜻이다. 계엄통치시대의 정치 주역과 군경을 국가폭력의 주범으로 모는 좌파전통의 용어 사용이다. 그래도 집권국민당이 역사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얘기는 아직까지 없다.

3. 우리나라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는 교육부의 확정고시를 통해 이미 진행 중인 사안이 됐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박정희 탄신 100주년인 2017년 3월에는 박근혜 표 국정 국사교과서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교과서 국정화가 시대착오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반교육적 처사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권이 확고한 신념을 갖고 밀어붙이는 일에 대해 식자층의 의견이 9대1 정도로 한쪽으로 쏠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일반시민의 여론도 거의 2대1로 반대가 우세하다. 여론의 심판은 이미 끝났다.

4. 박근혜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앞장서는 이유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5.16쿠데타와 유신독재를 최대한 옹호하는 데 있다는 사실은 국민 모두가 아는 바다. 이것 때문에 민심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한다. 박근혜정권의 국사교과서 국정화는 정권이 국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느냐는 일반적인 문제를 넘어 특히 박정희의 딸, 박근혜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특수한 문제가 더해진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 차원에서 아버지 시대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박근혜대통령의 집념은 아무도 못 말린다. 그것이 정치에 입문한 동기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가족사를 국사와 혼동하지 말아달라는 손팻말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권력자 본인이 자기가 기억되고 싶은 대로 자신의 역사를 쓰는 것과 똑같다. 양식이 있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회피해야 마땅한데 거꾸로 가는 것이다. 당연히 국민들은 기피로 맞서고 있고 역사가들은 제척 사유라고 목청을 높인다.

5. 정치권력은 본래 국사, 특히 자신이 관계된 최근사를 자기 입맛에 맞춰 서술하기 위해서 국정화의 유혹을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권력은 역사의 서술·평가 대상일 뿐 그 주체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왕조시대부터 확립된 원칙이다. 또한 훌륭한 권력은 역사를 만들지만 비겁한 권력은 역사책에 손을 대더라는 것도 오랜 역사적 진실이다. 이번에 박근혜정권은 기존의 중등 국사책 17종을 불태우고 그 집필진을 모두 생매장하는 분서갱유를 재현한 셈이다.

6. 국정 교과서화를 추진하는 무기로 박근혜정권은 색깔론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이념전쟁으로 밀어붙이면 여론에서 유리할 것으로 본 것이다. 확정고시 첫날 새누리당은 '우리아이들이 학교에서 주체사상을 배웁니다.'라는 현수막을 통해 이런 본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역풍을 맞아 하루 만에 내린다. 황교안 총리도 당시 기존 교과서의 99퍼센트가 좌편향이라고 기자회견까지 했다. 99%를 편향으로 몰아세우며 교학사 교과서를 정상적인 교과서로 보는 1% 권력집단의 오만과 독선, 광기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7. 정부는 심지어 국정교과서 집필진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공개되면 테러라도 당할 것을 우려하는 걸까. 도대체 학자라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비공개의 장막 뒤로 숨는가.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 봐서 거리낄 게 없다면 국정 교과서 집필진의 영광을 드러내고 축하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거의 몬도가네 수준의 블랙코미디다. 어떤 문명국가에서도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국격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다.

8. 헌법재판소는 이미 92년에 이 문제를 놓고 헌법적 검토를 마치고 헌법원칙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다. 법적심판도 이미 끝난 셈이다. 특히 교육적인 고려와 이해가 돋보이는 명판결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더하고 뺄 것이 없을 정도라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거를 인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9. 국정교과서가 생기고 국정교수안이 나오면 전문성과 의욕이 높은 교사들부터 제일 맥이 풀릴 게 틀림없다. 교재구성권은커녕 교재선택권까지 박탈하면서 교사에게 무슨 전문성 신장을 기대하겠는가. 교사를 못 믿고 교사의 전문성을 죽이면서 교육에서 뭘 기대하겠는가.

10. 아이들의 관점에선 어차피 한 권의 역사책으로 배우는 건 종전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보다 질이다. 그리고 그걸 결정짓는 것은 교수방법이다. 역사를 주입식, 암기식으로 교육하는 건 옳지 않다. 역사는 집단 운명의 서사시이자 통시적 사회과학으로서 반드시 토론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가르쳐져야 한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 선별의 원칙과 기준으로 작동했을 숨은 사관을 이끌어내는 훈련이 중요하다.

11. 중고등학생용 국사책은 모름지기 공동체 안에 정의와 평화, 번영이 탄탄하게 자리 잡으려면 어떤 집단적 지향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성공의 교훈과 실패의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대만 역사책에 백색테러시대의 잔혹상과 재생산기제가 제대로 그려지고 한국 역사책에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의 발견과 권고가 충분히 반영된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일까, 자학사관의 발현일까? 역사 서술이 소수의 역사를 넘어 오랫동안 배제된 관점과 목소리를 소화하며 민주화한다는 것은 한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자 과거의 은폐기제가 극복되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부끄러운 역사를 덮어놓으면 반드시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부끄러운 역사는 더 높은 가치와 원칙을 부여잡고 고통스럽더라도 직시하고 성찰할 때만이 재발을 막을 수 있다. 대만의 역사도 대한민국의 역사도 부끄러움을 가르치기에는 아직 멀었다. 박근혜정권이 바라는 부끄러움 없는 역사는 역사책을 고쳐쓸 게 아니라 민주주의와 민생의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때 가능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지금에라도 국민의 뜻에 항복할 때만이 역사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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