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 고담의 전설과 공포스런 동요들

2006년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204~206호에 연재된 '고담의 광인들'이라는 스토리 아크에서 작가인 저스틴 그레이는 고담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전설에 나오는 고담은 브루스 웨인의 조상이 미국에 건설한 가공의 대도시 고담이 아닌, 영국 노팅엄셔 주에 실재하는 마을이다.
때는 시간을 거슬러 로빈 후드가 셔우드 숲의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의적단을 결성하고 부자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던 13세기 영국.

  • 이규원
  • 입력 2015.11.16 11:33
  • 수정 2016.11.16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8]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 고담의 전설과 공포스런 동요들

배트맨이 살아가는 고담 시. 이곳은 골목골목마다 무서운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광인의 도시다. 그 전설과 노래들은 고담만의 독특한 히어로와 빌런에 버금가는 이 도시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배트맨 작가진은 이런 전설과 노래를 실재하는 역사와 전설, 전래 동요에서 빌려오기도 하고, 또한 기발하고 천재적인 창작력으로 고담에 어울리는 전설과 노래를 직접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오늘은 고담에 전해지는 전설과 노래들에 대해 알아보자.

광인의 도시 고담

영국 민담을 고담의 기원과 연결지은 「고담의 광인들」 에피소드가 실린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204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04?file=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04.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2006년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204~206호에 연재된 '고담의 광인들'이라는 스토리 아크에서 작가인 저스틴 그레이는 고담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전설에 나오는 고담은 브루스 웨인의 조상이 미국에 건설한 가공의 대도시 고담이 아닌, 영국 노팅엄셔 주에 실재하는 마을이다.

때는 시간을 거슬러 로빈 후드가 셔우드 숲의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의적단을 결성하고 부자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던 13세기 영국. 로빈 후드는 처음부터 무작정 의적질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 백성들은 셔우드 숲과 같은 넓은 숲을 삶의 근거지로 살았는데, 탐욕스러운 존 왕이 숲을 왕실 소유로 귀속시키면서 백성들의 출입을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졸지에 먹고 살 터전을 잃어버리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셔우드 숲 사람들은 로빈 후드를 중심으로 의적단을 결성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혼내는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욕심쟁이 왕에게 맞서 용감하게 들고 일어선 셔우드 숲의 의적들과 달리 기발한 아이디어로 왕의 폭정을 피한 곳도 있었으니, 바로 고담 마을이었다. 얘기는 이렇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고담 마을에 어느 날 급보가 날아든다. 위대하신 존 임금님께서 고담에 사냥터를 만드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말이 좋아 사냥터이지 백성들 입장에서는 땅은 땅대로 뺏겨, 임금님 사냥터니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어, 왕의 군사들이 오고갈 때마다 밥 먹이고 빨래하고 숙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애지중지 키우던 가축까지 언제 고기반찬이 될지, 딸들도 높은 분 눈에 들어 노리개로 끌려갈지 몰라 전전긍긍이다. 심지어 왕이 행차하는 날에는 도로 정비와 건설 노역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 회의가 열린다. 천지도 분간 못 하는 개망나니 왕 앞에 미약한 힘이나마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사냥터를 짓지 말라고 간청이라도 해 볼 것인가. 미천한 백성의 항의를 들을 왕이었으면 애초에 사냥터를 짓지도 않았을 터. 마을 주민들은 고담 마을을 사냥터 부적합지로 만들어 계획을 취소시키기로 하고 집단으로 미친 척을 하는 작전을 세운다. 당시만 해도 미친 사람이 있으면 광증이 옮을까 염려하여 곁에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미치광이 마을에 사냥터를 만들었다가 왕이 광증에라도 걸리면 큰일 아닌가. 그래서 왕의 전령이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머리를 짜내어 온갖 해괴망측한 짓을 해 댄다. 해를 뜨게 하겠다고 언덕 위로 돌을 굴리는 놈, 새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려고 울타리를 짓는 놈, 뱀장어를 잡겠다면서 물에다가 뱀장어를 익사시키려는 놈, 벌을 잡겠다면서 지붕 위에 불을 질러 버리는 놈 등등 가지가지였다. 결국, 전령의 보고를 전해 들은 왕은 고담 근처에 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훗날 이 전설을 바탕으로 '고담의 세 현인(賢人)'이라는 동요가 만들어지는데,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고담의 세 현인이 사발 속의 바다로 들어간다네, 사발이 더 튼튼했더라면 내 이야기가 더 길어졌을 텐데.' 2000년 출판된 『아캄의 배트맨』에서는 조커가 실제 이 이야기가 기록된 책인 『고담의 광인들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라는 책을 펼쳐 들고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등장한다.

살육의 늪과 솔로몬 그런디

고담처럼 실존하는 전설이나 전래 동요가 모티브가 된 대표적인 인물로 '솔로몬 그런디'가 있다. 솔로몬 그런디는 사이러스 골드라는 이름의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죽은 뒤에 고담 시 외곽에 있는 살육의 늪에 그 시체가 던져졌고, 50년 뒤인 1944년에 그 시체가 하얀 좀비 괴물의 모습으로 깨어난다. 이 괴물은 50년 전 과거는 기억하지 못한 채 '월요일에 태어나'라는 노래만 부른다. 그런데 이 노래는 원래 "솔로몬 그런디는, 월요일에 태어나서, (삭막하고 폭풍우 쳤던) 화요일에 세례받고, (흐리고 섬뜩했던) 수요일에 결혼하고, (온화하고 감미로운) 목요일에 병들어서, (화창하고 바람 부는) 금요일에 위독해져, (기분 좋고 영광스런) 토요일에 사망하고, (찌는 듯이 뜨거웠던) 일요일에 매장됐네, 그렇게 살다 갔네. 솔로몬 그런디는."이라는 영국 전래 동요의 한 대목이다. 괄호 안의 가사를 더 넣으면 긴 버전, 빼고 부르면 짧은 버전인데, 『배트맨: 롱 할로윈』 12장에서 하비 덴트가 솔로몬 그런디를 만나는 장면에 이 노래 전문이 나온다.

영국의 전래 동요에서 모티브를 얻은 DC코믹스의 언데드 슈퍼 빌런, 솔로몬 그런디

(사진 제공: 세미콜론)

1995년 《배트맨: 박쥐의 그림자》 39호를 보면 솔로몬 그런디의 또 다른 탄생기가 나온다. 여기에 따르면 부유한 상인 솔로몬 그런디는 살육의 늪에서 레이철 라이켈이라는 이름의 매춘부를 만나게 된다. 사연인즉슨 6개월 전 골드가 이 매춘부와 잤는데 이후 그녀가 임신했고 아기 아빠가 골드라는 것이다. 골드는 레이철의 주장을 인정 못한다면서 돈을 주길 거부하고, 그러자 레이철을 따라왔던 포주 젬이 골드의 뒤통수를 후려쳐 그를 살해한다. 골드의 시신은 늪 속에 가라앉고 레이철과 젬은 그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리고 100년 후인 1995년, 늪지에서 헐크 같은 근육질의 하얀 좀비 괴물이 튀어나온다.

또 다른 버전은 그랜트 모리슨의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에 등장한다. 수전노 사이러스 골드가 소아성애자로 아이들을 납치해 살육의 늪으로 끌고 온 다음 못된 짓을 하고는 죽여서 늪에 버렸다는 소문이 퍼진다. 분노한 군중은 그를 잡아다 패 죽이고는 살육의 늪에 던져 버린다. 중간적인 장소인 살육의 늪에서 사이러스 골드가 진짜 소아성애자였는지, 아니면 군중 재판의 억울한 희생자였는지, 과연 솔로몬 그런디가 사이러스 골드의 환생인지에 대해서는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의 결말까지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솔로몬 그런디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살육의 늪을 배경으로 쓴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 1권에서는 솔로몬 그런디 전래 동요가 아닌 13세기 스코틀랜드의 시인인 '진실한 토머스'의 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열어 간다. '오 그대 보이지 않나, 저 멀리 좁은 길, 가시와 들장미 두터이 욱여싼 길. 저 길은 의로운 길, 정처 없이 따라갈 길. 그대 보이지 않나, 저기 넓고 넓은 길, 백합 계곡에 가로놓인 길, 저 길은 악의 길... 더러는 천국의 길이라 일컫는 길.' 진실한 토머스와 요정 여왕의 만남에 관한 전설 또한 실제 전설을 가져다가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특색 있게 변주했다.

어둠속에 숨어 있는 미지의 힘.

올빼미 법정, 미드나잇맨, 사이먼 다크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비밀 조직, 올빼미 법정의 존재를 암시하는 고담의 전래 동요.

(사진 제공: 세미콜론)

'화강암과 석회 뒤 그림자 속 횃대 위에서, 언제나 지켜보며 고담을 지배하는 올빼미 법정을 경계하라. 너희 화로에도 그들의 눈이 있고, 너희 침상에도 그들의 눈이 있으니, 그들이 속삭인 말을 발설치 마라. 그러지 않으면 탈론이 네 머리를 취하러 가리라.'

지금부터는 작가들이 만들어 낸 고담의 전설과 노래를 들어 보자. 위 내용은 『배트맨: 올빼미 법정』과 『배트맨: 올빼미 도시』에 나오는 동요로,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고담에 전해지는 노래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한낱 전래 동요쯤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이것은 은밀하게 고담을 지배하는 비밀 조직 올빼미 법정의 노래다.

십 대들의 장난을 통해 고담에 소환된 초자연적 존재, 미드나잇 맨과 배트걸의 대결을 그린《배트걸》 30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girl_Vol_4_30?file=Batgirl_Vol_4_30.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미드나잇맨이 시계를 멈추리라. 바람 한 점 없는 집, 벽은 얇으니, 미드나잇맨이 기어들어 오리라. 위스키와 꽃을 마루에 놓고, 노란 분필로 문을 만들면, 새벽이 낮이되고, 낮이 밤이 되니, 미드나잇맨이 불을 끄리라. '

이 오싹한 노래는 고담의 학생들이 즐기는 공포 게임 '미드나잇맨'의 노래다. 우리 나라 식으로 하면 분신사바같이 귀신을 부르는 의식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2014년 《배트걸》 30호에서는 고담의 학생들이 재미삼아 이 의식을 하다가 초자연적인 존재인 미드나잇맨을 세상에 불러내고, 근처에 있는 배트걸이 그들을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이 노래를 소개한다.

고담 시의 새로운 영웅? 악당?

가죽 가면을 쓴 프랑켄슈타인 소년, 사이먼 다크가 활약하는 《사이먼 다크》 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Simon_Dark_Vol_1?file=Simon_Dark_Vol_1_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공원에 숨어 있네. 사이먼. 사이먼. 사이먼 다크. 네가 만일 잘한다면 그는 오지 않을 거야. 네가 만일 못한다면 그에게 값을 치러야 해.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공원에 숨어있네. 사이먼. 사이먼. 사이먼 다크.'

이 노래는 고담 시의 소녀들이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전래 동요는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동네 아이들이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래의 주인공인 사이먼 다크는 고담 시에서 활동하는 한 무법자의 이름으로,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만화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의 원작자 스티브 나일즈가 2007년에 DC의 《사이먼 다크》라는 새 만화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창작한 캐릭터다. 사이먼은 자신이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전혀 모른다. 태어난 기억도 없고, 자란 기억도 없는 그는 얼굴에 하얀 가면을 쓰고 있고, 어둠 속에서 살며, 에드거 앨런 포의 『미스터리와 상상의 이야기』를 읽는다. 가면 아래에는 17~18세 소년의 얼굴이 있고, 몸은 여러 시신에서 떼어다 붙인 듯 꿰맨 자국이 가득한데, 총을 맞아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며 뛰어난 몸놀림과 살인 기술을 지니고 있다. 아마 배트맨이 이런 존재를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려 했겠지만 《사이먼 다크》 시리즈 전체 18 이슈 동안 사이먼의 고담 시에는 배트맨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배트맨과는 전혀 다른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고담 시를 만끽하고 싶은 팬들에겐 신선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배트맨 #고담 #공포 #batman #세미콜론 #dccomics #올빼미법적 #올빼미도시 #그래픽노블 #문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