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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내부 목소리 보도가 중요한 이유 | 아시아프레스 이시마루 지로 팀장 인터뷰

1997년에서 98년 당시 국경에 가면 북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일본인이 국경지대에서 북한을 취재한다는 사실을 반가워하는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관심을 보이고, 내가 하는 일에 참여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믿음이 생기면 조금씩 취재 기법을 알려줬다. 국경지대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 90퍼센트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람들이 잠재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나와 한 약속을 지키고 다시 만나면 또 다른 북한 내부조사를 하는 식이었다.

  • NK News
  • 입력 2015.11.16 12:59
  • 수정 2016.11.16 14:12

점점 어려워지는 북한 취재, 핵심은 '정보 검증', "언론인들의 역량과 전문성이 중요"

전 세계의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아시아프레스의 북한 내부 정보망을 높이 평가한다. 1987년 창립된 프리랜서 언론인들의 네트워크인 아시아프레스는 주로 이라크, 시리아와 같은 분쟁 현장을 취재한다. 북한취재팀의 이시마루 지로 팀장는 오사카를 거점으로 한국과 북중 국경지대를 오가며 북한 내부 정보망을 관리하고, 북한 내부 소식지 '림진강'을 발행하고 있다.

NK News는 지난 10월 서울을 방문한 이시마루 지로 팀장을 만났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북한 내부 정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데 한계를 느껴 북한 내부 취재팀을 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시마루 팀장은 북한 사람들을 언론인으로 양성해온 경험과 함께 김정은 시기 들어 촘촘해진 감시망으로 인한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최근에는 중국 스마트폰을 통해 취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한국 언론이 북한보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언론인들의 역량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시마루 팀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북한의 실제 모습을 바깥 세상에 알리기 위해 낯선 외국인에게 자신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기꺼이 털어놓은 북한 사람들을 꼽았다.

NK News: 어떤 동기로 인해 북한 보도를 시작하게 되었나?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에는 재일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다. 김대중납치 사건 등 한국의 군사정권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위가 많았다. 나도 모르게 한국에 대해 의식하며 자랐다. 나는 한국으로 치면 386세대에 해당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도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은 북한보다 이미지가 나쁜 독재국가로 인식되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에도 참가했다.

1988년 한국에 와서 2년 반 동안 어학당에 다니던 시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태가 있었다. 다음은 북한이 붕괴될 차례가 아닌가 하는 시각이 세계적으로 대두했다. 북한 체제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북한을 알아야 하는데, 잘 몰랐다. 나는 좌파 학생이었으니 북한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고, 북한을 적대시하는 일본의 정책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북한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93년 7월, 8월 두 달 동안 조중국경 취재를 갔다.

NK News: 당시 조중국경 취재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나?

기자라는 직업은 정보의 핵심을 찾아가야 하는 일이다. 나는 95년 평양을 다녀왔다.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정보가 한국으로 조금씩 전해졌는데 평양에서는 이런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95년에도 지방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북한에 가봤자 정보의 핵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98년 3월, 4월 약 3주 동안 일본 단체의 북한 식량 지원사업을 감독하러 함경북도 나진, 선봉시, 은덕군, 샛별군에 들어갔다. 계속 감시하는 사람이 붙었다. 외국인으로서 많은 정보를 본 것은 맞지만, 그래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은덕군에서는 차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북한의 핵심에 접근하자면 북한에 들어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는 탈북자들이 많던 시절이라 중국에 건너온 북한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장마당이 생기고 있다, 꽃제비가 많다, 아사자가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기사를 썼고 TV보도도 나갔지만 일본 전문가들이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당시 100만 이상 아사자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반박 당했다.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한 증거를 가지고 보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3년 즈음부터 북한 내부 사람들과 함께 취재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1997년에서 2000년 사이에 조중국경 취재를 계속하면서 몇 백 명의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 갈 데가 없는 탈북 난민과 같이 살기도 했다. 1998년도에 함께 살던 북한 출신 친구가 자신이 북한에 들어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북한의 원산에 들어가서 장마당 모습을 찍어왔다.

세계에 공개된 최초의 꽃제비 동영상이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영국을 비롯해서 엄청난 반응이 있었다.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 문제를 북한 사람의 목소리로 설명할 수 있도록, 당사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NK News: 취재 교육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나?

1997년에서 98년 당시 국경에 가면 북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일본인이 국경지대에서 북한을 취재한다는 사실을 반가워하는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관심을 보이고, 내가 하는 일에 참여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믿음이 생기면 조금씩 취재 기법을 알려줬다. 국경지대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 90퍼센트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람들이 잠재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나와 한 약속을 지키고 다시 만나면 또 다른 북한 내부조사를 하는 식이었다.

2003년 무렵 중국 휴대폰이 북한으로 유입되었다. 국경 지역까지만 오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부 상황을 알려주고 다시 통화하거나 만날 약속을 잡았다. 여러 차례를 통해 믿을 수 있다고 검증되면 기자 교육을 시작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해야 하고, 근거가 있어야 하고, 조사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아는 것만 알려주는 것은 개인 인터뷰이고, 직접 장마당에 가서 쌀값을 확인하는 일이 조사다'라고 알려주었다. 사진과 비디오, 문서 등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조사하도록 했다. 가능한 범위에서 하되, 위험하면 취재를 하지 말라고 했다. 자원하는 사람에게는 카메라를 다루는 법도 알려줬다. 조사 대상자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취재 윤리도 가르쳤다.

조선족 출신의 협력자들이 중국에 머물고 있는 적합한 북한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해준다. 그럼 내가 가서 직접 만나보고 우선 인터뷰한다.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본인이 북한 내부 조사에 관심을 가지고 해보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한 사람과 간단한 일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연락 없이 그만두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정말 많다. 이제까지 잃어버린 휴대폰이 100개가 넘었을 거다. 비디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북한으로 넘어가서 아무 연락도 없는 사람, 비디오 카메라를 장마당에 팔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약 10명 정도가 북한에 머물며 취재 활동을 하고 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년 정도 중단하기도 한다. 함께 활동하던 중 병으로 사망하거나 아파서 활동을 멈춘 사람도 있다. 지금은 조를 짜서 취재 협력자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다.

NK News: 취재 협력자들이 위험에 처하는 경우도 있나?

일본이나 한국에서 동영상을 발표하면 북한 정부에서도 보고, 누가 찍었는지를 찾는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는 절대로 동영상 작업을 하지 않는 등 많이 신경을 쓴다. 아직 위험에 처한 사람은 다행히도 없다. 한 번은 우리 멤버가 보위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과 술을 마셨다.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영상을 찍고 다닌다. 남조선에서 이게 공개가 되어서 중앙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어떻게 찾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한동안 정말 조심하라고 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영상을 발표했다. 나를 잡아라, 타도하라, 중국에 오면 조사해서 아시아프레스 조직에 타격을 줘라, 이런 지시를 김정은이 직접 했다고 북한 보위부 사람에게서 들었다. 한국 정부에서 정말 조심하라는 연락도 왔다. 중국이나 한국을 오갈 때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는 언론이기 때문에 한국 국정원과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활동해야 한다. 우리가 국정원 사람을 취재할 경우는 있지만, 우리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NK News: 김정은 시대 들어 통제력이 강해졌나?

김정일 말기 2009년부터 많이 엄해졌다. 그래도 틈이 있었는데 김정은 시대 들어 정말 엄해졌다. 연락에 지장이 많이 생겼다. 전화기에 대한 단속과 전파탐지 활동이 강해졌다. 신호상태도 많이 나빠졌고, 전화하는 것을 사람들이 많이 두려워한다. 넘어오는 것도 정말 어려워졌다. (국경지대 군인에게 줘야 하는) 뇌물 값도 많이 올라갔다. 중국 쪽도 탈북자들의 범죄를 우려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시마루 지로 팀장 | 사진: NK News

NK News: 통제 강화가 보도의 양이나 질에 영향을 미치나?

당연하다. 취재 협조자가 중국에 나오겠다고 하면 내가 만나러 간다. 위험하니까 무리해서 나오라고 못한다. 8월에도 내가 갔는데 그 사람이 넘어오지 못했다. 물질적인 통제 강화에 대해서 우리도 대응해야 한다. 취재 협조자들에게 스마트폰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중국 스마트폰을 보내면 사진과 문서를 다 보낼 수 있다.

NK News: 북한 내부 정보를 보도하는 다른 언론사들이나 탈북자 단체의 정보원을 어떻게 평가하나?

어떤 때는 우리 정보와 일치하고 차이가 날 때도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높게 평가한다. 현재 북한 전문 언론기관 중에서는 정보 양이나 질에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일본이나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 역시 자기 친척이나 친구에게서 받은 정보를 가지고 독자적인 통신원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주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내부와의 연계가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돈도 많이 든다.

북한 보도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한 게 검증 문제이다. 장마당 물가 같은 경우는 검증이 간단하다. 가까운 지역의 장마당 물가는 거의 비슷하니까. 어려운 부분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을 취재하는 것이다. 2012년에 황해도에서 있었던 기근과 같은 사건이다. 기근에 관한 증언이 2012년 2월, 3월에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도 입수했고 다른 매체들도 입수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을 하고 확신을 가졌다. 어디서, 무엇 때문에, 얼만큼 죽었는가를 취재했다. 황해도 출신자를 5-6명 정도 만났다. 김정은 정권 들어 아사자가 생기고 있다는 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잘못된 보도가 나가면 부끄럽지 않나. 작년 10월에는 당 간부 12명이 강건군관학교에서 총살당했다는 속보를 우리가 처음으로 발표했다. 당시 내부 협력자가 지방보위부장과 가까운 사이었다. 어느 날, 어디서, 누구를 몇 명 죽였다는 걸 알려줬다. 특종이라 빨리 나가야 하는데 오보가 되면 안되니까 몇 개 단체에 확인을 해 보았는데 모르더라. 마지막으로 국정원에 간접적으로 문의했더니 "대부분 맞다"고 답했다. 이후 한국 국회 정보위에서 일주일 후에 거의 비슷한 정보를 발표했더라.

NK News: 한국 언론의 북한 보도에 대한 평가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한국 언론에 바라는 바인데 북한 보도에 사람과 역량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담당 기자가 자주 바뀌는 것도 문제이다. 경험이 쌓이지 않고 전문성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방송의 경우 많이 느낀다. 북한 취재는 사람과 돈을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북자가 이렇게 말했다, 막연한 소식통, 누구의 통신원, 이 정도 수준에서만 보도하니까 검증이 어렵다. 한국 언론이 북한 내부의 1차 정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더욱 해야 한다. 북한 취재팀이 필요하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취재가 어렵다는 건 핑계다. 한국 언론들도 90년대, 2000년대에는 많이 했다. 저널리스트와 언론 기관은 국가보안법이 있든 없든 1차 정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거다.

한국 언론들이 최근 1년 반 동안 평양의 발전상에 대해 많이 보도했다. 하지만 이건 평양 방문자들의 주관적 인상과 북한 당국에서 발신하는 대량 동영상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김정은이 많은 투자를 했다. 북한 전체의 경제 규모와 시장 경제가 확대되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제가 좋아졌다 아니면 나빠졌다고 할 때에는 지표가 필요하다. 무엇이 언제에 비해 어떻게 좋아졌는가 혹은 나빠졌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경제상황을 평가하려면 북한 정부의 재정 상황과 민간경제, 인민생활 등등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경제 규모가 커졌지만 들어온 외화를 비(非) 생산시설 건설과 행사에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인민생활은 더 악화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생활 수준이 좋아졌다는 말을 하는 협력자는 전혀 없다. 특히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밀수가 힘들어지고 장사할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한다. 전기, 수도, 교통 인프라가 나빠졌다고 하는 협력자들도 증가했다.

NK News: 아시아프레스 북한취재팀의 단기적, 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단기적인 목표는 내부 정보를 계속해서 발신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팀을 유지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또 기록을 정리하고 싶다. 뉴스를 자료집으로 정리해서 전문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싶다. 작년에는 전문가용 영상자료집을 제작했다. 저널리즘의 역할은 북한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다. 정치인, 전문가들이 많이 이용했으면 한다.

NK News: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사람이다. 슬픈 인터뷰가 많았다.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된다.

한 번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보지 못한다. 한 번 만나면 끝인 거다. 그런데도 자신의 힘든 경험을 말해준다. 말해서 얻는 이익도 없는데. 우리는 취재의 대가를 사전에 약속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보상을 해주기도 하지만, 사전에 약속하지 않는다.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 앞에서, 엄청난 슬픈 경험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그 사람의 경험을 공개해서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실적을 쌓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건 공평하지 않다. 아픈 사람을 만나면 병원에 갈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녀와 함께 온 사람에게는 자녀의 옷을 사주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글쓴이 최하영은 NK News 서울지부 특파원입니다. 이 글에 실린 사진의 출처는 NK News입니다. 영문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NK News 한국어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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