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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목숨을 구한 남자

소련의 젊은 소위 야코프 노비첸코는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막았고 그로 인해 김일성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노비첸코는 자신의 외투 속에 두꺼운 책을 품고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한쪽 손을 잃었고 눈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행동으로 노비첸코는 김씨 일가와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북한에서 추앙받는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합니다.

  • NK News
  • 입력 2015.11.19 08:19
  • 수정 2016.11.19 14:12

북한에서 유일하게 추앙받는 외국인 야코프 노비첸코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3.1절을 기리기 위해 김일성과 군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북한과 소련의 고위 관리자들이 가득 찬 행사장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백의사라 불리는 정치 테러 단체의 공작원들도 숨어 있었습니다. 행사 도중 그들은 소련과 북한 고위 공직자 그리고 김일성이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 수류탄을 던집니다.

소련의 젊은 소위 야코프 노비첸코는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막았고 그로 인해 김일성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노비첸코는 자신의 외투 속에 두꺼운 책을 품고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한쪽 손을 잃었고 눈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행동으로 노비첸코는 김씨 일가와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북한에서 추앙받는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합니다.

북한과 친한 국가, 예를 들어 러시아나 중국 출신의 외국인들은 때때로 북한의 선전선동 매체에 등장합니다. 같은 형제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은 북한의 선전 벽보와 신문 기사를 통해 김일성 숭배와 같은 북한의 가치를 공유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노비첸코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김일성과 그의 부인은 생명의 은인인 그를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가 병원에서 회복 중일 때 김일성은 "영웅 노비첸코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 의장 김일성" 이라고 새겨진 궐련갑을 선물했습니다. 노비첸코의 증언에 의하면 병원에 있는 동안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자 북한의 항일 영웅인 김정숙은 문병을 오고 손수 만든 음식을 차려 줬다고 합니다.

호주 국립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레오니드 페트로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야코프 노비첸코 소위의 세대는 조국, 당 그리고 지도자를 위해서는 초개같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된 세대입니다. 스탈린 휘하의 소련에서 인명은 모래알보다도 값싸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애국심과 임무에 대한 충성도는 이상하리만큼 높았습니다. 1946년 노비첸코가 한 행동은 당시 그 어떤 다른 소련 장교들이라도 행했을 법한 일입니다"

1960년대, 소련과 북한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노비첸코에게 꾸준히 연락했고 매년 평양에 그와 그의 가족을 초대했습니다. 1984년 소련 방문 중 김일성은 노비첸코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무려 4,100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 지방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반나절 동안 머물렀습니다.

야코프 노비첸코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기차역에서 노비첸코는 김일성을 맞이했고 둘은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김일성은 "왜 저에게 단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으셨습니까? 저야 나랏일 때문에 바빴지만, 당신은 편지를 써 보낼 줄 알았습니다. 곧 평양에 방문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둘은 함께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둘러보았고 김일성은 노비첸코에게 북한에서 가장 높은 등급 훈장인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그러자 북한에서 노비첸코의 유명세는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북한의 부모들은 새로 태어난 자녀들의 이름을 '야코프'로 작명하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국제주의자 노비첸코'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노비첸코와 그의 가족은 1980년대 말 평양을 방문했고 김일성과 대면했습니다. 김일성의 목숨을 구한 노비첸코의 이야기는 1985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와 소련의 모스필름(Mosfilm) 스튜디오의 합작으로 '영원한 동지'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노비첸코가 김일성의 목숨을 구한 것은 40년대의 일입니다. 왜 그는 무려 38년이나 지나서 북한의 선전선동에 동원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실마리는 1980년대 중반에 급변하던 냉전의 양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국민대학교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노비첸코에 대한 영화는 공식적으로 '소련-조선 친선'이란 용어로 소개된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라면서 "야코프 노비첸코를 영웅화하는 양상은 1983-1984년 사이 큰 진척을 보였다. 당시 중국의 시장화와 사실상 중미 동맹이 결성되면서 김일성은 소련과 더 근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위기를 헤쳐나가려 했다. 한동안 북한에서 소련의 힘을 빌린 해방이란 사실은 그 때까지 암묵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냉전 양상의 변화를 통해 이 주제는 수면으로 떠오르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야코프 노비첸코는 1996년 사망했습니다. 노비첸코의 부인과 그의 가족은 김씨 일가와 꾸준히 끈끈한 관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둘 다 잔혹한 독재자 였지만 김정일은 친화력 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고립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2001년 김정일은 기차를 통해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김정일은 노비첸코의 부인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만나게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그녀가 기차역에서 기다리게 내버려두었고 20분간 잡혀있던 면담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정부 관계자를 보내 노비첸코 부인에게 선물을 대신 전달했습니다. 김정일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만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북한 국영 언론에 의하면 김일성은 '국제주의자 노비첸코'를 '가까운 친구이자 동생'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2015년 3월에 노비첸코 부인이 타계하자 김정은은 그녀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했고 북한 대사관의 직원들을 그녀의 장례식에 파견했습니다.

북한에서 노비첸코만큼 유명한 외국인은 없습니다. 란코프 교수는 그 "대단한 용기와 책임감이 있으며, 그 모든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페트로프 교수는 노비첸코의 희생 사례는 북한의 사상과 가치를 수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노비첸코의 용감한 행위는 북한에서 인민들에게 김일성 개인에 대한 우상화를 기획하고 전파하는 상징적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병사의 이미지는 주체사상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 선군 정치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벤자민 영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역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입니다. 안재혁이 번역했으며 메인 사진은 벤자민 영의 소유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NK News 한국어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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