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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추억 | 북한 주민, 외국인들이 회상한 북한 생활

내가 더 이상 미국 캔자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줬던 두 번째 수업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북한에 온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완전히 다른 환경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 스스로에게 설명이 필요한 것들 중 하나는 '위대한 지도자들' 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로, 그들 동상이나 기념비에 허리 숙여 절하는 일이었다.

  • NK News
  • 입력 2015.11.17 11:37
  • 수정 2016.11.17 14:12

평양에 거주했던 시간 동안 외국인과 탈북자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경험들

평양에는 외국인이 별로 없다. 외교관, 국제 구호단체 직원, 사업가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외국인 집단이 없다.

물론, 북한은 외부인들에게 거의 개방되지 않은 사회다. 그리고 북한 정부의 관심사는 북한 주민들을 외국인과 외국 사상으로부터 계속 차단시키는 일이다. 선택된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북한 주민 대부분은 평생 북한사람이 아닌 외국인을 볼 기회 자체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회는 변화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외국인들이 현재 북한에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이들은 대개 교육이나 문화 교류 부문에서 외교 사절단으로 혹은 평양 경제계의 일부로 북한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사회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북한은 그들의 정치, 경제 시스템과 북한 사람들의 자주성에 대한 증거로 수도인 평양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평양에 사는 많은 이들은 굉장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보통 국가에게 충성을 다한 보상으로 고급 아파트와 좋은 학교 등의 혜택을 받은 북한의 지배계층이나 노동당원들이며 평양은 그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설된 도시이다.

NK News는 평양에 이전에 거주했거나 현재 거주하고 있는 7명의 외국인, 탈북자들과 북한의 가장 큰 도시인 평양에서의 일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의례와 의무로 묶여있는 매우 순응적인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많은 이들은 북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 진짜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 알레산드로 포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했던 학생 (북한을 떠난 지 6개월도 안 되었음)
  • 외교관 A: 익명을 요청한 유럽의 고위급 외교관 (평양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었음)
  • 제임스 호어: 2001년에서 2002년 사이에 평양 주재 영국 대사관을 세운 고위급 외교관
  • 외교관 B: 익명을 요청한 유럽의 외교관 (평양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었음)
  • 강지민: 평양에 거주했던 주민으로 현재 NK News의 '북한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코너 기고자 (2005년에 평양을 떠남)
  • 대학 교수: 주기적으로 평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외국 대학 교수로, 익명을 요청함
  • 자카 파커: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출신 사진작가

북한의 어린이들 | 사진: Eric Lafforgue

"평양에서 거주했던 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무엇이었나?"

알레산드로 포드 (Alessandro Ford)

내가 더 이상 미국 캔자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줬던 두 번째 수업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북한에 온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완전히 다른 환경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 스스로에게 설명이 필요한 것들 중 하나는 '위대한 지도자들' 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로, 그들 동상이나 기념비에 허리 숙여 절하는 일이었다.

처음 몇 주 동안 다른 학생들은 나를 수업에 안내했고, 나는 곧 그러한 일상에 적응하였다. 우리들은 대학교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장난치며 떠들었으나, 입구에 다다라서는 히죽히죽 웃던 것을 멈추고 넥타이를 바로하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우리는 교복을 검열하는 선도부 학생을 지나친 후,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고, 몇 분 후,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상에 다다르면 우리는 머리는 숙여야 했다. 모자를 벗고, 가방도 벗어야 했으며, 각 학생들의 근엄한 표정 때문에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정중하게 물러섰고 다시 갈 길을 가면서 굳어 있던 표정들이 웃음으로 누그러졌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수업 두 번째 날 위험을 무릅쓰고 진지하게 동상에 절하는 행위에 대해 난처할 수 있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친구들 무리와 나는 진지하게 6미터 정도 되는 위대한 지도자 동상에 허리 숙여 인사하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대학 경비를 지나쳤다. 그 후, 친구 한 명에게 "만약 위대한 지도자 동상에 인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나를 되돌아보고서는 "음, 화났을 때 한 번 해 봐"라고 대답했다. 북한 주민들이 회사에 늦어서 동상을 빠르게 지나치면 이론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더 대답하도록 그 친구를 재촉했다. 그 친구는 "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 후 스스로 그렇게 분명하게 답한데 대해 살짝 당황한 듯 잠시 멈칫하다가 결정타를 날렸다. "왜 동상에 인사하려 하지 않는 거야? 그는 정말 위대한 지도자야!"라고 말이다.

외교관 A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평양에서 원산을 잇는 도로에서 목격한 한 여성이다. 그 여성은 어깨를 짓누르는 큰 나무들을 지고 넘어져서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고, 매우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였는데 그 친구는 그녀를 도우며 진정시키려 했다.

좀 일반화하자면 북한에서 시골로 떠났던 모든 여행은 여성들이 가장 힘든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종종 평양과 그 인근에서 겨울에 작은 도구와 맨손만을 이용해 도로에 있는 얼음을 제거하고 있는 여성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대개 그 주위에 몇 남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서있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는 일은 마치 노예들의 노동을 보는 것과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왜 남자들은 여성들을 돕지 않는가? 그리고 왜 도로에서 얼음을 치우는 기계들이 없는가? 왜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하는 것처럼 소금(염화칼슘)을 뿌리지는 않는가?

또한 덥고 먼지투성이인 여름에 여성들이 빗자루를 손에 쥐고 몇 시간 동안이나 큰 도로에서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 시골에서 자전거를 이용해 무거운 짐들을 옮기는 여성들도 보았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계절과 상관없이 오랜 시간동안 일한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는 남자들도 일부 목격했지만, 가장 흔하게 본 것은 거대한 무리의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어떤 장소에 가서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제임스 호어 (James Hoare)

나는 여태까지 북한을 굉장히 많이 방문했고, 2001년 5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다. 북한에서 거주하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매우 특별했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기는 어렵다. 나는 평양에 있는 외교관으로,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짧지만 일본에 학생으로 거주한 경험도 있고, 서울과 베이징에 외교관으로 배치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평양은 이 나라들과 굉장히 달랐다.

처음에는 북한에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그 어떤 관계도 없었던 북한에 살면서 일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영국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이라든가 내가 북한에서 영국의 첫 북한 주재 대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지만, 커리어 막바지에 북한에서 대사로 일하게 되어다.

평양에서의 활동은 영국과 이미 외교관계가 확립된 국가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는 물론 달랐다. 서울과 베이징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일처리의 세련됨이나 능숙함도 부족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공관에는 단 두 명만 있었다. 겨울에 불편한 호텔에 거주하며 매우 낡은 건물에서 일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2001년 분위기는 그 후에 형성된 분위기와 달랐다. 당시에는 아직 제네바 합의와 햇볕정책에서 얻은 희망이 존재했다.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공관을 연 데 대해 매우 기뻐하면서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역사의 일부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역사를 창조하였다. 꽤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외교관 B

상대적으로 솔직하고 개방된 북한 주민들과의 교류가 평양에서 경험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북한 주민들이 실제로 나를 충분히 믿고 그들의 걱정이나 진심어린 의견을 나누기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마침내 내가 평양 주민들의 실생활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해주는 사람들이 적어도 몇 있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기억에 남는 일은 마치 타임캡슐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한 진압 장면과 매일하는 선전 행위이다. 우리 시대에 이렇게 의심의 여지없이 독특한 나라에 거주하는 것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평양에서의 경험으로 실제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에 감사하게 되었으며 삶에서 우선순위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정하게 되었다.

강지민

평양에 사는 동안 서구 문화를 갈망했다는 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솔직히, 한국 미디어나 대중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대기근 전에는 이 기회가 더 드물었다.

각 가정이 일본에서 온 첨단 가전제품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국 라디오와 프로그램들에 좀 더 끌리게 되었다. 북한 정부는 주민들의 한국 라디오를 청취를 막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매일 밤, 우리는 조심스럽게 아름다운 노래뿐 아니라 라디오 방송 진행자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가득 찬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북한은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이며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강조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한국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보다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동안 계속 북한 정부에 속은 것이다.

또, 중국에서 수입되거나 밀반입된 DVD들은 북한 사회에 한국 대중문화를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한국 DVD들을 구입하기 위해 큰 돈을 지불했으며, 구입 후 친구들과 함께 모여 시청했다.

요즘에도 여전히 나는 기타를 연주한다. 나는 단지 한국 노래들을 연주하기 위해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기타로 한국 노래들을 연주할 수 있다면, 평양에서 이러한 이유만으로 인기인이 될 수 있다. 내가 노래를 부르며 한국 노래들을 기타로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모르던 반 친구들조차도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대학 교수

북한에서 보냈던 시간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단 한 가지는 아니었지만, 단 한 가지만 고르자면, 그것은 매스게임에 참여했던 일이다.

그것은 대단한 공연이었고, 그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모든 참여자들이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 내용 자체는 흥미롭지 않았고, 선전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사람들의 참여 열기가 전체 공연에 매력 요소를 더했다.

내가 평양에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남다른 답변을 기대하겠지만, 평양에서의 삶은 꽤 지루했기 때문에 매스게임 참여가 가장 두드러진 경험이었다. 평양은 그 자체가 매력적인 '도시'이다. 평양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도시에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 전체에 걸쳐 매우 인상적인 몇몇 건물들이 산재한 대부분의 장소가 큰 시골마을과 같이 느껴졌다. 평양에 살면서 겪은 모든 경험은 세계 다른 어느 지역에서의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다.

자카 파커 (Jaka Parker)

나는 평양에서 길을 잃었다. 북한에 거주한 지 8개월이 된 후, 우리는 다른 손님을 동행하여 평양 동쪽 끝 지역에 위치한 단군묘소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늦잠을 잤고, 1시간 전 이미 출발한 다른 동료들을 따라가기 위해 늦게나마 출발했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섰고,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평양 밖까지 간 것이라고 인지하진 못했다. 이후 지역 검문소에 다다랐고 공무원들과 군인들은 차를 세웠다가 통과시켜 주면서 길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곧 나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로는 진흙투성이였고, 주위에는 농가밖에 없었으며, 핸드폰의 통화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이전에 통과한 검문소를 다시 지나가자, 군인들은 나를 의심스럽게 보며 소지품을 검사하기 전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하였다. 몇 번의 검열 후 군인들이 놓아주어 안심하였다. 그러나 검문소로부터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두 명의 군인이 다시 차를 세우고 나와 뭔가 얘기를 해 보려고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차로 동행했고, 차 안에서 그들은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줬다. 나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고 안심했다.

평양에 도착하자 그 군인들은 차에서 내리며 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이 일을 겪은 후, 나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현재는 더 이상 길을 잃을까봐 두렵지 않게 되었다.

이 글을 쓴 올리버 호담(Oliver Hotham)은 현재 프리랜서로 NK News에 기고하고 있으며, 과거 Sunday Times와 politics.co.uk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박현비가 번역했으며 메인 이미지의 출처는 NK News입니다. 원문은 이곳에서 읽을 수 있으며, 이어지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탈북 전문가들의 답변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NK News 한국어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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