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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오후에 만난 어떤 선배

정희진 선생은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통과한 후 어떻게 변했나를 뜻한다"고 말했다. 사람도 그와 같지 않은가. 개개인은 각자 고유한 텍스트이니까. 한 사람을 만난 후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안다. 김 선배는 내게 좋은 책 한 권 같은 분이다. 그를 만난 후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변한 건 나뿐이 아니다. 오늘 김 선배 곁에 모인 이들이 모두 그를 텍스트 삼아 읽고 성장했을 것이다.

  • 정경아
  • 입력 2015.11.17 13:10
  • 수정 2016.11.17 14:12
ⓒgettyimagesbank

가을비 내리는 오전, 구파발역 1번 출구 밖에 넷이 모였다. 한 계절에 한 번 김 선배를 찾아뵙는 날. 김 선배가 사는 경기도 고양과 파주의 경계 지역까지는 차로 가야한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밖에서 먼저 먹고 김 선배 댁에서 차를 마시기로 한다. 70대 중반인 김 선배는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왔다. 오늘의 메뉴는 누룽지오리백숙. 뜨뜻한 온돌방에 둘러앉으니 서로 얼굴만 쳐다봐도 정답다. 한때 우리는 영자신문사에서 함께 일했다. 그 자리에 없는 선후배들의 안부가 궁금해 서로 묻고 답한다. 나이 50에 첫 결혼을 하게 된 후배가 띠동갑 연하 여성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가장 핫한 뉴스다.

김 선배가 우리에게 음식을 자꾸 권하며 한 사람씩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떠들어 대는 60대 후배들이 그저 귀엽다는 표정. 그런데 어떡하나. 평생의 절친인 소주를 오늘은 마실 수 없다. 얼마 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넘어지는 바람에 약간의 뇌진탕을 겪은 때문.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우리는 그를 마구 놀려댄다.

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김 선배의 초기 치매 증세. 얼마 전에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집을 찾지 못해 다른 동 앞에서 서성거리는 남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는 거다. 치매의 진행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대책. 사람들과 자주, 많이 만나게 하는 것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20세기 중후반 언론계에서 종사했던 이들 중 일부에게 알콜성 치매는 일종의 카르마 같다. 왜들 그렇게 마셔댔는지. 호연지기와 무절제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했다. 엄청난 주량을 과시하던 선배들 중 몇몇은 이미 뇌혈관 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다. 60대 후반부터 알콜성 치매를 앓기 시작한 선배 한 분은 요즘 송년 모임에조차 나오질 못한다.

소주를 못 마시게 된 김 선배는 금단현상에 시달린다고 한다. 입에도 대지 않던 과자를 자꾸 먹게 돼 체중이 늘고 있다. 문제는 운동 부족. 넘어져 머리를 다친 후부터 좋아하던 산책을 포기하다시피 했다니. 움직임이 둔해지자 늘어난 체중 때문에 더욱 바깥나들이를 기피하는 증세가 생겼다고 부인은 울먹거린다. 김 선배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대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김 선배는 '편집 기술자'였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조리 정연하게 시대의 모순을 질타하던 여느 구성원들과는 달랐다. 그는 잘 듣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짤막하게 논평했다. 그가 말을 적게 했기에 우리들은 더 그의 평가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은밀하거나 공공연한 사내 파벌 내지 정치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가 가장 싫어했던 건 뒷담화. 사무실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끼리끼리 모인 술자리에서도 그는 뒷담화에 가담하지 않았다. 뒷담화에 열 올리는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한때는 그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란 입장의 모호함을 참지 못했던 시절이다.

회사를 떠난 한참 뒤, 내가 그를 닮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도 후배들의 말을 잘 듣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 내가 몸담은 조직 내에서든 밖에서든 몇 가지 돌출 사건 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려 나름 애썼다. 김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밥은 먹었냐?"라고 먼저 묻는 선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가 내뿜었던 사람의 온기를 내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때문일까.

정희진 선생은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통과한 후 어떻게 변했나를 뜻한다"고 말했다. 사람도 그와 같지 않은가. 개개인은 각자 고유한 텍스트이니까. 한 사람을 만난 후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안다. 김 선배는 내게 좋은 책 한 권 같은 분이다. 그를 만난 후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변한 건 나뿐이 아니다. 오늘 김 선배 곁에 모인 이들이 모두 그를 텍스트 삼아 읽고 성장했을 것이다.

김 선배 부인이 차와 과일을 차려온다. 김 선배는 묵묵히 뉴스 채널을 바라본다. 떠드는 우리를 무심히 바라보며 가끔 빙긋 웃는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는 기분이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사소한 경계를 넘어버린 것 같다. 그는 마침내 자유로워진 것일까. 떠날 시간이다. 11월의 늦은 오후 풍경 속, 우리가 탄 차를 향해 김 선배는 오래 손을 흔들고 있다. 그분의 생애가 11월과 겹쳐 보인다. 이제 곧 12월. 겨울은 코앞이다.

그리고 보니 동지가 멀지 않다. 서구 중심의 달력과 달리 한겨울 속 동지를 새해 첫날로 삼은 달력들도 있다. 농경민족들의 달력이다. 동짓날 해가 태어난다는 믿음엔 근거가 있다. 추분 이후 힘을 잃었던 햇빛은 동짓날부터 실제로 강해진다. 죽음처럼 느껴지는 겨울 속에 문득 드러난 봄의 씨앗. 사람의 생애도 그와 같지 않은가. 한 생애가 저물어도 그가 남긴 불씨는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 때로는 자식을 통해서, 때로는 제자나 동료 후배들을 통해서. 우리 생애의 12월이 와도 억울할 게 하나도 없는 이유다.

스콧 니어링 (1883-1983)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동네 사람들이 들고 온 깃발엔 "스콧 니어링이 살다 가서 지구는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던가. 그 말을 슬쩍 빌리자면 김 선배가 살고 있어서 지구는 이미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다. 그의 12월이 따뜻하고 평안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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