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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을 누르면 대신 죽여드립니다,『국민사형투표』

강아지 탈을 쓴 범인(이하 '개탈')은 무슨 수를 썼는지 스마트폰을 가진 모든 국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국민사형투표'를 진행한다. 친절하게 팝업으로 동영상까지 송출하며 투표 대상으로 선정된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보험금을 노리고 연인을 살해했지만 '핫도그를 먹다가 질식사'한 것으로 위장해 무죄방면 된 자, 이웃집에 살던 여자아이를 살해했고, 목격자의 증언도 있었지만 목격자가 지적수준이 의심되는 어린 아이였기에 증언으로 채택되지 않아 무죄방면 된 자 등 시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이들로만 선별해 공개재판의 링에 올린다.

『국민사형투표』, 엄세윤/정이품 지음, 다음 만화속 세상/카카오페이지 일요일 연재

일 년에 겨우 서너 번 얼굴을 보고, 그보다는 조금 더 연락을 자주 했던 지인은 교도관이었다. 가끔 만나면 그는 여기저기 늘 조금씩 다쳐있었다. '손님(교도관들의 은어로, 수감되는 죄수들을 가리키는 말)'이 난동을 부려 제압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날은 손을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함께 거나하게 취했던 어느 저녁,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는 말했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토막 낸 그 작자는 사방에 들어앉아 인권존중을 방패삼아 편히 지내고 있고, 그런 아들 둔 죄인인 부모님이 면회를 왔는데 '시장에서 산 싸구려 양말 못 신겠으니 브랜드 양말 사오라'고 부모님에게 큰 소리 치더라. 신이 있다면 저런 인간 안 죽이고 뭐하나.... 안에서 보고 있으면 사형제도폐지, 그게 정말 인도적인 건지 회의가 든다."

1997년 12월 30일.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날이었다. 우리는 흔하게 '죽어 마땅한'이란 표현을 쓰지만 이미 18년 동안, 지인이 분노했던 어린이 토막 살인범을 포함한 '죽어 마땅한 흉악범'들 중 누구도 실제로 교수대에 서는 일은 없었다. 한국은 실질적으로 사형 폐지국가로 분류된다.

『국민사형투표』는 사형폐지론이라는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흐름에 파문을 일으킨다. 서희경찰서 소속 강력반 팀장 주혁은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다. 너무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바람에 직속 상사와도 부딪히는 경우가 다반사고, 동료들은 그를 어려워한다. 그가 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실적이 좋아서다. 우직하게 원칙을 지키며 수사해 높은 검거율을 기록하니 사람들은 불만을 품으면서도 그를 따르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 어느 날 저녁 도착한 장난 같은 메시지. '누구누구를 사형 시키겠습니까?'라고.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그 '누구누구'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자 장난은 사건이 된다. 주혁이 이 사건의 수사를 맡고, 범인을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강아지 탈을 쓴 범인(이하 '개탈')은 무슨 수를 썼는지 스마트폰을 가진 모든 국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국민사형투표'를 진행한다. 친절하게 팝업으로 동영상까지 송출하며 투표 대상으로 선정된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보험금을 노리고 연인을 살해했지만 '핫도그를 먹다가 질식사'한 것으로 위장해 무죄방면 된 자, 이웃집에 살던 여자아이를 살해했고, 목격자의 증언도 있었지만 목격자가 지적수준이 의심되는 어린 아이였기에 증언으로 채택되지 않아 무죄방면 된 자 등 시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이들로만 선별해 공개재판의 링에 올린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귀여운 변장, 귀에 착착 감기는 프레젠테이션, 클릭 한 번이면 지엄한 심판자가 될 수 있는 간편함, 참여하는 수만큼 나누어지는 죄책감과 책임감,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에서 채택한 공정에 가까운 방법까지. 개탈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국민사형투표'를 개시한 걸까? 처음에는 이게 뭔지 갸웃거리던 사람들도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세간에 공개되자, 찬반세력이 격렬히 맞붙으며 저마다 투표에 찬성과 반대를 던지게 된다.

주혁의 여동생인 고등학생 '주인'은 기자 지망생으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만약 저 살인범들이 네 가족을 죽였어도 이 투표에 냉담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주인의 말문이 막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 가족을 죽여 놓고 법을 이용해 교묘히 빠져나간다면 용서보다 복수를 떠올리는 게 더 쉬운 일이니까. 그런 점에서 "그럼 너희들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국민을 처벌할 수 있는 국가에서 다시 살고 싶어?"라는 주혁의 일갈은 깊이 새겨봄직하다. 사형집행이 있었던 20세기, 1948년부터 1997년까지 약 250명의 정치범이 사형 당했고 그중 간첩조작사건이나 독재시절 정치적 이해관계에 희생된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때 사형은 정권 유지를 위한 편리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다시 독재정치로 회귀하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있을 무고한 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기에 현재의 '실질적 사형폐지 국가'라는 상태가 된 것이다.

『국민사형투표』 중에서. '개탈'의 정체는...?!

아직 개탈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밝혀질 날도 머지않았다. 개탈은 매주 월요일마다 투표를 개시하고 경찰이 어떤 방법을 써서 저지하려 해도 기가 막힌 묘수로 투표로 사형판결이 내려진 자에 대한 심판을 멈추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입장에 가까운가? 죽어 마땅한 자를 확실히 죽게 만드는 것, 아니면 만에 하나라도 발생할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아무도 죽지 않게 하는 것.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 『국민사형투표』. 작품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일독을 권한다.

글_임지희/에이코믹스 에디터

* 이 글은 에이코믹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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