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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대학에 가다 | 청년 딕 그레이슨과 미국 학생 운동

2015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코앞이다. 소년들을 열광시켰던 배트맨의 사이드킥 로빈에게도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대학에 가 홀로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이 있었다. 우리와 같은 시대인 2010년대라면 더 좋겠지만, 75년 역사를 가진 DC 코믹스 세계관에서 그 시절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정부가 유혈 충돌을 일으켰던 1960~1970년대 미국 대학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이규원
  • 입력 2015.11.09 09:32
  • 수정 2016.11.09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7] 로빈, 대학에 가다

─ 청년 딕 그레이슨과 미국 학생 운동

2015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코앞이다. 소년들을 열광시켰던 배트맨의 사이드킥 로빈에게도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대학에 가 홀로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이 있었다. 우리와 같은 시대인 2010년대라면 더 좋겠지만, 75년 역사를 가진 DC 코믹스 세계관에서 그 시절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정부가 유혈 충돌을 일으켰던 1960~1970년대 미국 대학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트맨의 사이드킥 로빈이라면 저마다 딕 그레이슨, 제이슨 토드, 팀 드레이크, 데미안 웨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배트맨 만화 세계에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캐리 켈리 같은 여자 로빈도 존재하지만, 보통은 이 넷을 대표로 꼽는다.

제이슨 토드는 『배트맨: 패밀리의 죽음』에서 조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던 로빈이다. 스토리에서야 그렇지만, 사실은 제이슨을 죽일지 말지 독자 투표를 해서 결정한 스토리니 엄밀히 따지면 배트맨 팬들이 죽였던 셈이다. 팀 드레이크는 제이슨 토드의 뒤를 이은 3대째 로빈이고, 데미안 웨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브루스 웨인의 친아들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로빈 하면 지금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초대 로빈, 딕 그레이슨이다. 그는 본래 서커스단의 공중그네 팀 '플라잉 그레이슨' 가족의 일원이었다. 쇼를 할 때마다 많은 관객이 모이며 많은 돈이 오고가는 서커스단은 갱단의 타겟이 되었는데, 보호비 상납을 거절하는 서커스단 단장을 협박하기 위해서 갱단이 그레이슨 가족이 타는 그네의 줄을 사고로 위장해 끊어 버린다. 이 일로 딕 그레이슨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다. 마침 사고가 일어나던 현장에는 브루스 웨인이 서커스를 보러 와 있었고, 그는 어린 시절 강도의 총에 부모를 잃은 자신과 똑같은 비극을 겪은 이 소년을 로빈으로 삼는다.

딕 그레이슨 연대기

국내 정발된 만화들 중에서는 『배트맨: 다크 빅토리』가 딕 그레이슨이 배트맨과 만나 로빈이 된 사연을 잘 그리고 있다. 영화 중에서는 「배트맨 포에버」가 배트맨이 로빈을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영화적으로 각색한 부분이 많아 원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런데 국내 정발된 작품들을 차례로 읽다 보면 『다크 빅토리』 이후에 딕 그레이슨의 성장기를 제대로 그리고 있는 작품은 눈에 잘 띄질 않는다. 『패밀리의 죽음』에서 갑자기 제이슨 토드라는 로빈이 나와서 죽고, 『배트맨: 나이트 폴』에서는 팀 드레이크라는 또 다른 로빈이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로빈이 배트맨의 아들인 데미안 웨인으로 바뀌어 있다. 『배트맨: 블랙 미러』에서는 그레이슨이 2대째 '배트맨'으로 등장한다. 물론 『배트맨: 허쉬』 등에서는 2대째 배트맨이 되기 이전 딕 그레이슨이 '나이트 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모습도 보인다.

로빈이 되기까지, 그리고 2대째 배트맨이 되기까지 딕 그레이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배트맨: 다크 빅토리』와 『배트맨: 블랙 미러』 표지.

(사진 제공: 세미콜론)

하지만 어쨌든 국내 정발된 작품만으로는 딕 그레이슨이 '로빈'으로 제대로 활약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그가 활약한 시대가 1940년대~1960년대의 30년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딕 그레이슨은 배트맨과 함께 지독하게 어두운 범죄의 세계와 원색으로 채색된 환상의 세계를 오고가며 수많은 모험을 했다.

오늘 소개하려는 1970년대 로빈의 대학 시절은 배트맨 연대기를 다룬 『배트맨 앤솔로지』 에서는 제3부 '밤의 피조물' 챕터에, 『DC 앤솔로지』 상에서는 브론즈 에이지 챕터에 해당된다. 참고로 이 시기는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로 세계관이 통일되기 이전의 스토리, 그러니까 후대 버전의 로빈과는 다른 '프리 크라이시스' 시대의 로빈 이야기다.

로빈이 경험한 대학교, 만화 vs 역사

1968년 11월 《디텍티브 코믹스》 381호의 커버에서 배트맨은 로빈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가라! 로빈! 이제 나 혼자 일할 테니까!" 그리고 1969년 5월 《디텍티브 코믹스》 387호의 커버에서는 배트맨이 양손에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와 《배트맨》 1호를 들고서는 "로빈, 또 30년을 같이할 준비 됐니?"라고 묻는다. 그리고 1969년 12월 《배트맨》 217호에서 배트맨의 곁을 30년간 지켜온 딕 그레이슨이 드디어 배트맨의 곁을 떠난다.

아기 새를 떠나 보내는 박쥐? 로빈의 독립을 암시하는 듯 그려진 《디텍티브 코믹스》 38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381?file=Detective_Comics_38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1968년 컬럼비아 대학교 사건

1969년 12월 《디텍티브 코믹스》 394호는 딕 그레이슨의 대학생 첫 날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신입생 등록을 하기 위해서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학생 시위대에게 건물이 점거를 당해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이들은 휴학을 요구하는데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한 학생이 로빈에게 "저 녀석들은 목소리를 가진 소수야, 하지만 침묵하는 우리 다수는 공부를 계속하길 원해. 우린 학생이니까." 라며 닉슨 대통령의 연설을 딴 말을 한다. 그런데 평화적인 대화를 하자던 총장의 말과 달리 현장에 경찰이 나타나서 시위대를 무력 진압 후 주동자를 연행한다. 처음에 점거 시위의 방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딕 그레이슨은 무력 진압에 학생들이 다치는 것을 막으려다가 뒤통수를 맞고 기절해 경찰에 끌려간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이 경찰이 실은 미국 대학가를 마비시킬 목적으로 침투한, 모습을 위장한 소련의 스파이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디텍티브 코믹스》 394호는 로빈이 이들의 정체를 학생들 앞에 밝힌 후에 학생들을 수업 현장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스토리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1968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반전 시위를 바탕으로 쓰인 것이다. 당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학교가 정부 후원을 받아 전쟁 무기 연구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학생들에 의해 그 사실이 밝혀지자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건물을 점거한 후 사업을 중단하라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점거를 풀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또한 같은 시기 대학교 체육관이 백인 학생용과 흑인 학생용 두 개의 출입구를 둔 사실 때문에 흑인 학생까지 점거에 가담하면서 시위의 규모가 커지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에 휴교와 건물 점거를 반대하는 '다수 연대'라는 이름의 보수 학생 단체가 일어나 양측이 무력 충돌할 조짐을 보인다. 시위 8일째에 대학 총장의 요청을 받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면서 점거에 가담자 외에 무고한 학생들까지 곤봉으로 폭행했고, 150명 가까운 부상자를 내고 700명을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디텍티브 코믹스》에 그려진 내용과 역사적 사건의 내용 사이에는 사실 많은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차이와 이유를 찾아보는 것도 배트맨 팬에게는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1970년 켄트 주립대학교 사건

1971년 《월드 파이니스트 코믹스》 200호에서도 현실과 관련된 사건이 소재로 등장한다. 로빈이 재학 중인 허드슨 대학교에서 기자인 클라크 켄트가 학생들의 반전 시위 현장을 취재 중이다.(이 무렵에 슈퍼맨은 방송 리포터로 활약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ROTC 건물에 폭탄을 투척하고 건물이 통째로 불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곧이어 주방위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학생들과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고, 보다 못한 슈퍼맨이 방위군 대장에게 주지사의 철수 명령을 전달하면서 현장을 정리한다.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형제간에도 전쟁을 놓고 의견이 갈라져 격한 언쟁이 벌어진다. 로빈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클라크 켄트는 형제와 형제가 갈등을 빚는 상황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것이라고 상황을 정리한다.

슈퍼맨의 힘을 차지하려는 외계인에게 슈퍼맨, 로빈, 반전 운동으로 서로 반목하는 두 형제 학생이 납치되는 《월드 파이니스트 코믹스》 200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World's_Finest_Vol_1_200?file=World%2527s_Finest_Comics_200.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이 이야기는 1970년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을 그린 것이다. 1970년 5월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는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시위가 격해지는 가운데 켄트 대학교가 위치한 오하이오 주의 주지사가 주방위군 투입을 결정하고, 방위군 도착과 함께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시위대가 ROTC 건물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지사는 시위대를 '나치와 공산당보다 더 나쁜 존재'라고 비난했다. 시위대 해산을 요구하는 경찰, 방위군과 거부하는 학생들의 대치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오고가며 점점 격렬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방위군이 실탄을 발사하여 네 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미국 900여 대학교에서 400만 명에 달하는 대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었다.

1970년대 '웨더맨'과 배트맨

다시 로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71년 3월 《배트맨》 230호에서는 로빈이 허드슨 대학교 ROTC 건물에 폭탄을 투척한 범인을 뒤쫓는 과정을 그린다. 캠퍼스를 걷던 로빈이 주황색 테니스 슈즈를 신은 세 학생에게 기습 공격을 받는다. 이들은 로빈을 쓰러뜨리고는 자신들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떠난다. 로빈은 이들이 ROTC 건물에 폭탄을 던진 범인이라고 확신하며 그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주황 테니스 슈즈를 신은 대학생들이 SDA라는 학생 단체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SDA 리더는 자신들은 폭탄과 관계가 없으며 주황 테니스 슈즈의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저지하기 위해서 꾸민 짓이라고 주장한다. 로빈은 중간에 서서 양측의 싸움을 말리는데, 싸움을 그만두고 현장을 떠나려던 SDA 리더가 자신의 자동차가 폭발하면서 죽고 만다. 후에 자동차에 있던 폭탄이 ROTC 폭발 사건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임이 밝혀진다. 결국 ROTC 건물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SDA리더였고, 남은 폭탄을 차량에 싣고 있다가 죽었던 것이다.

폭탄 테러의 배후를 밝혀내라! 과격파 학생 운동의 양상이 반영된 에피소드가 실린 《배트맨》 230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230?file=Batman_230.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한편 실제 역사에서는 반전 시위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자 학생들이 급기야는 폭탄과 총을 들고 정부에 전쟁을 선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분노한 학생들은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조직을 결성, 정부 건물을 대상으로 폭탄 공격을 가했다. 그 중 대표적인 조직이 '웨더맨'이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은 기상 예보관이 없어도 알 수 있다'는 밥 딜런의 노랫말에서 착안한 이름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당시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웨더맨'의 활동상황과 다시 30년 이후 그 당시의 청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 「웨더 언더그라운드(The Weather Underground)」와 2012년 영화 「컴퍼니 유 킵(Company you keep)」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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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사례 외에도 이 시기의 로빈 스토리는 1970년대 혼란스럽던 대학가의 모습을 배경으로 많은 이야기를 펼치면서 스스로 세상을 익히고 미숙하나마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찾아가는 로빈의 모습을 보여 준다. 배트맨이나 로빈이나 눈에 띄는 문제들은 마치 두더지 잡기를 하는 것처럼 빠르게 처리할지 몰라도, 고담이 지옥을 방불케 하는 어둠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로빈 스스로도 이 문제에 대해서 묻는다. '나는 계속해서 양측의 중간에만 머물러야 할까? 언제쯤이면 내가 이 모든 폭력의 근원에 닿을 수 있을까?'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십 대에 들어선 로빈은 마침내 점점 배트맨의 그늘에서 벗어나 몇 년 뒤에 소년 소녀 그룹인 '틴 타이탄즈'의 리더로, 그리고 '나이트 윙'이라는 한 명의 독립적인 히어로로 일어서게 된다.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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