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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에게 교육감 선거권을 주자"

역사적으로 존재한 민주주의체제는 항상 민주적 의사결정을 결정능력을 가진 자에게만 허용한다는 식의 제약을 걸어왔다. 민주주의의 역동성 그리고 좋은 점은 바로 그런 제약들을 깨뜨려왔다는 데 있다. 1848년에는 계급의 제약이, 1893년 여성에 대한 제약이, 미국을 기준으로 한다면 여성을 포함한 흑인 전체에 대한 제약이 1920년에 제거되었다. 아마도 남아 있는 유일한 선거권 제약은 연령일 텐데, 그조차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니 16세 이상에게 국회의원선거도 아니고 교육감선거를 허용하자는 이야기는 정말 온건한 개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 김종엽
  • 입력 2015.11.06 09:20
  • 수정 2016.11.06 14:12
ⓒgettyimagesbank

중요하고 가치있는 제안, 그렇기 때문에 설령 채택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중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 제안들이 있다. 하지만 종종 그런 제안이 전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지난달 초 이재정 경기교육감이 했던, 16세 이상의 청소년들에게도 교육감 선거권을 주자는 제안도 그런 경우다. 물론 어떤 제안이 정치적 유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제안 자체의 타당성과 합리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절한 시점의 선택, 예상 가능한 반박에 대비한 현실성있는 정책의 준비, 제안을 듣는 즉시 찬성하진 않더라도 설득을 거치면 금세 고개를 끄덕일 우호적인 집단에 대한 사전 계몽 등이 필요하다. 그렇게 보면 이재정 교육감의 제안이 잘 준비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정치적 개입의 적실성을 고민해야 할 부담이 적은 나 같은 연구자는 어느 때이든 그런 제안을 이어갈 의무가 있다.

선거권 확대의 민주적 당위성

교육감선거를 16세 이상의 청소년들에게도 개방하는 것이 가진 민주적 타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모두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는 통찰에 기초한 정치질서이다. 따라서 교육감의 선출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집단이 학생이니 그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까다로운 일은 오히려 16세 이하에게는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민주주의체제는 항상 민주적 의사결정을 결정능력을 가진 자에게만 허용한다는 식의 제약을 걸어왔다. 민주주의의 역동성 그리고 좋은 점은 바로 그런 제약들을 깨뜨려왔다는 데 있다. 1848년에는 계급의 제약이, 1893년 여성에 대한 제약이, 미국을 기준으로 한다면 여성을 포함한 흑인 전체에 대한 제약이 1920년에 제거되었다. 아마도 남아 있는 유일한 선거권 제약은 연령일 텐데, 그조차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니 16세 이상에게 국회의원선거도 아니고 교육감선거를 허용하자는 이야기는 정말 온건한 개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는 "애들을 정치판에 끌어들이냐"며 말문을 막는 선동이 판을 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교육감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의 교육적 가치는 매우 크다. 정치적 참여와 자신의 삶 사이의 연계성을 뚜렷이 체험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에게 교육적 체험이 될 것이며, 정치판에 '끌려들어간' 청소년들이 얼마나 빨리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지 목도하게 될 테니 성인들에게도 교육적 체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정치영역과 경험을 확대하는 일은 긍정적 순환을 형성하면서 더 많은 정치를 향한 길로 우리 사회를 이끌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정치의 확장은 우리 사회의 다른 병리들을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학벌 문제나 입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말이다. 학력과 학벌에 의한 차별에 대한 논의가 많았는데, 대개 해결책의 방향은 노동시장 개혁으로 향했다. 기업이 학력과 학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학벌이나 입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이 학력과 학벌을 형성하는 능력과 아예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업이 상대해야 하는 정부 부문이 학력과 학벌에 깊이 침윤되어 있으니 그 점에서도 학력이나 학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히려 정치의 확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 사회의 엘리트 충원방식을. 거개가 시험이다. 대기업 입사도 그렇고, 공무원이 되는 것도 그렇다. 선출직 공직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좋은 대학 들어가서 고시 합격하고 검사 되고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다반사니 결국 선출직도 시험 잘 본 사람들 가운데서 뽑는 셈이다. 그러니 시험 공화국이 되고 입시경쟁이 끝 간 데 없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확장하면, 즉 더 많고 다양한 분야에 선출직을 늘리고 더 많은 이들이 선거권을 가지고 참여하면, 예컨대 동장도 선거로 뽑고 지방 검찰과 경찰의 최고위직도 선거로 뽑는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런 말 꺼내자마자 연세 지긋한 분들 가운데 동장도 선거로 뽑았던 제2공화국의 혼란상을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촘촘하게 전국적으로 갖추어진 선거관리위원회와 발전된 선거 테크놀로지에 비추어보면 그런 우려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이라면 동장선거야말로 사람들에게 정말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치과정이 성과를 낸다면 청년들은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노량진 학원에서 몇년을 씨름하는 길과 지역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필요한 정책을 개발하고 적절한 기회가 있다면 동장에 출마하는 길 사이에서 어디를 선택할지 조금은 고민해보게 될 것이다.

정치의 확장, 더 넓은 사유의 길

이렇게 정치의 확장은, 사회적 엘리트 가운데 적어도 선출직 공직자라는 범주가 대중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며 좋은 정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이들에게 맡겨지는 길을 열 것이다. 중앙정치보다 지역의 작은 정치가 더 그런 효과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학벌은 좋지 않아도 유권자에 대한 봉사의 마음과 그들을 이끌 힘을 가진 이들이 정부 곳곳에 파고들고, 또 그들이 시험 잘 쳐서 공무원이 된 이들을 부리게 된다면, 이런저런 정책들이 보이지 않는 학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기업도 정부와의 접촉면을 고려한 학벌주의에서는 벗어나게 될 것이다.

다시 교육감선거로 돌아가보자. 청소년에게 교육감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제안은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정부가 2017년부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기로 결정했으니 아마도 전국 시·도 교육감 가운데 이른바 '진보교육감'들은 그런 정부조치가 실효성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시도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교육자치제를 파괴하고 교육감을 임명할 길을 찾으리라 예상된다. 그런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수세적으로 교육자치제를 지키는 데서 그치기보다 더 대담한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들에게 교육감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관련해서도 규범적 정당성을 갖는다. 어떤 교과서로 공부할지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가 토론해보는 사회, 그런 토론의 결과를 교과서 결정의 과정에 간접적으로라도 투입할 수 있는 사회가 더 민주적인 사회이며, 교육감선거는 그런 길을 열어주는 셈이니 말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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