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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국민주의와 인문학

관제국민주의라는 이념은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고 말았다. 그리고 학문의 자유가 비워진 바로 그 자리에 독재자 니콜라이 1세가 내세운 애국심이 자리했다. 19세기 중반 이념적 반동 노선을 내달렸던 니콜라이 1세 시절에 철학과 역사, 나아가 인문학 전체는 이러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로 이때에 러시아 문학은 '황금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문학으로 철학을, 문학으로 역사를 했다.

글 | 서광진 박사

1825년 11월 알렉산드르 1세가 급사하자 그의 동생 니콜라이 1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 해 12월 14일,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통치 첫날을 화려한 충성서약식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젊은 지식인들은 이 '대관식'의 날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결국 이 봉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후 러시아 저항 정신의 상징이자 곧 이어 등장하게 될 인텔리겐치야의 전범이 되었다. 이 봉기에 참여한 이들을 특별히 '12월 당원(러시아어로는 데카브리스트)'이라 부르며 지금껏 기리는 이유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입장에서 이 지식인 그룹들은 반가울 리 없었다.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자유주의적 혁명 기운은 반드시 진압해야 될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 동안(1825 - 1855)의 러시아는 반동적인 형태로 절대군주권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에 제정되었던 <러시아 제국 법전>의 제 1조 - "전 러시아의 차르(황제)는 독재하는 절대군주이며, 그 최고 권력에 외경심을 가지고 마음으로부터 복종할 것을 신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 는 이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니콜라이 1세 (사진출처: 위키백과)

니콜라이 1세는 사회개혁과 진보적 정신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의 치세는 '반동'의 시대라 칭해질 만큼 퇴행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아무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제 3부'라는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을 만들어 오로지 이 조직만을 신임하였다. 지식인들과 문인들의 출판물에 대한 검열은 물론이고, 민간인들에 대한 동향 감시를 본격적으로 시행 및 강화시켜 나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내 정치 상황을 강압적으로 단속한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니콜라이 1세는 국제 정치적으로도 러시아 제국이 '유럽의 헌병'임을 자처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세차게 불고 있었던 유럽의 혁명운동이 러시아에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의 황제들과 동맹을 맺고 유럽의 전제정을 수호하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공동 분할했던 폴란드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즉각 러시아의 군대를 투입해 봉기를 진압했으며, 나아가 폴란드의 주권을 빼앗아 폴란드를 러시아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리기도 하였다.

교육 정책 역시 반동적으로 변하였다. 니콜라이 1세의 심중을 특히 잘 파악하고 있었던 우바로프가 문교부 장관이 되면서 반동적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우바로프 스스로가 표현했 듯, '러시아의 발전을 50년간 유보'하면서까지 그들은 유럽의 혁명 기운이 러시아에 유입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고자 하였다.

'관제국민주의'를 주창한 세르게이 우바로프 (사진출처: 위키백과)

이러한 정책들의 이면에는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었던 이념이 있었다. 이른바 '관제국민주의'로, 이 이념의 핵심은 러시아정교, 전제정, 국민정신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러시아정교를 국민정신 통합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지상의 신'인 차르의 전제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한 포석이자, 러시아 고유의 애국심과 민족성에 호소하여 '국민정신'을 주조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지식인들의 활동을 억제시키는 한편, 국민들에게는 관제국민주의를 주입시키고자 했던 니콜라이 1세 정부가 취한 조치 중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대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대학의 총장은 물론 일반 교수들에 대한 임명도 모두 정부가 나서서 관리하였다. 나아가 강좌까지 간섭하였는데, 이를 테면 관제국민주의의 이념과 관련된 신학이나 교회사 관련 과목은 필수가 되었지만, 철학이나 역사, 헌법 과목 등은 폐강시켰다. 오늘날에도 철학과 역사 과목이 그렇게 '불온'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싶지만,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철학과 역사는 적(敵)들의 가장 강력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관제국민주의라는 이념은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고 말았다. 그리고 학문의 자유가 비워진 바로 그 자리에 독재자 니콜라이 1세가 내세운 애국심이 자리했다. 19세기 중반 이념적 반동 노선을 내달렸던 니콜라이 1세 시절에 철학과 역사, 나아가 인문학 전체는 이러한 대접을 받았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문학 이론가였던 로만 야콥슨은 학술회의와 정치집회는 그 근본에서 다음과 같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정치회의의 목표는 동의와 타협으로 전반적인 의견 일치를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학술회의는 그러한 의견 일치를 지향하는 순간, 비생산적이 되고 만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의견의 불일치가 그 자체로 새로운 탐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니콜라이 1세를 반추해 보면, 인문학에 정치 논리를 대입하는 순간 그 학문은 고사하고 말 것이고 나아가 전체 인문 정신이 고사하고 말 것이라는 것은 명확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로 이때에 러시아 문학은 '황금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문학으로 철학을, 문학으로 역사를 했다. 푸쉬킨이 그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벨린스키가 그랬다. 러시아에서 문학이 가졌던 독특한 위상, 즉 문학이 인문학 전체를 대변했던 현상은 차르 정부의 조직적인 인문학 죽이기와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 러시아의 문학은 자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1세의 인문학 죽이기가 초래한 이러한 예기치 않은 결과는 당대 러시아 지성사에만 시사하는 바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지,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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