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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왕국의 십상시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국정화가 옳지 않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절대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청와대와 내각, 그리고 여당 인사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거짓말로 여론을 조작하려 들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황교안 총리가 국정화에 즈음한 대국민 담화에서 기존 역사교과서의 문제로 든 대목부터 왜곡투성이다.

  • 권태선
  • 입력 2015.11.03 11:26
  • 수정 2016.11.03 14:12

정부가 국민 절대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확정고시했다. 야당은 밤샘농성을 시작했고, 거리는 국정화에 대한 찬반 시위로 뒤덮였다. 국론분열을 막겠다는 목표를 내건 국정화 논란이 우리 사회를 더 큰 분열과 갈등의 장으로 변화시켜버린 것이다.

수출이 뒷걸음치면서 우리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갈등하는 미중 사이에서 외교는 갈피를 잡지 못하며,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자영업자 도산 등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는데 이 정부는 왜 역사 교과서 문제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 몇몇 언론사의 주요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 문제가 당연히 화제에 올랐다. 일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서 교과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됐다. 하지만 다수는 그것보다는 박 대통령의 잘못된 소신 탓이라고 보았다. 집권 전부터 역사 교과서 문제에 집착해온 박 대통령이 정파적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을 누구도 말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상파 방송의 한 간부는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도 국정화는 잘못된 방향이라고 여기지만 감히 박 대통령에게 진언을 하지 못하는 게 오늘의 사태를 빚은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국정화를 지지할 수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한때 청와대의 문고리 권력을 조롱하는 말로 십상시라는 이야기가 회자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대일외교에서 지렛대를 잃는 비애국적 조처이며,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국정화가 옳지 않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절대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청와대와 내각, 그리고 여당 인사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거짓말로 여론을 조작하려 들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황교안 총리가 국정화에 즈음한 대국민 담화에서 기존 역사교과서의 문제로 든 대목부터 왜곡투성이다.

그는 6·25 전쟁과 관련해 "너무나도 분명한 6·25 전쟁의 책임마저 북한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 할 우려가 있다"며 "남북간 38선의 잦은 충돌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인 것처럼 교묘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8종 역사 교과서 가운데, 6.25가 북한의 침략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단 한 권도 없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할 무렵 남북 사이의 잦은 충돌이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두 사실을 함께 기술했다고 해서 북한의 남침 책임을 부인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더 억지스런 주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북한정권 수립에 대한 기술에 관한 주장이다. 황 총리는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으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기술된 역사교과서가 있다"며 "대한민국은 국가가 아니라 정부단체가 조직된 것처럼 의미를 축소하는 반면, 북한은 국가수립으로 의미를 부여해 북한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의미를 왜곡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정부 수립 행사.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이란 현수막이 내걸렸다.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1945년 11월 3일 중경 청사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27년'이란 설명이 있다. (사진=김구재단)

그러나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듯이 대한민국을 정부수립으로 기록한 것은 우리 헌법에 기반한 정확한 기술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수립은 1919년이고, 마침내 임시정부가 아닌 본격적인 정부를 수립한 것이 1948년인 것이다. 우리의 실효적 지배범위를 벗어난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의 나라가 설립됐다고 하지만, 3.1운동 이래 한반도를 대외적으로 대표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어받은 적통은 남한의 대한민국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것이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 대한민국 건국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이란 플래카드가 내걸린 이유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총리이며 법을 전공한 황 총리가 헌법 전문의 정신을 살려 역사학자들이 정부수립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을 모르고 이런 소리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교과서에서 교육부의 지시대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음에도, '우리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은 또 어떤가.

그렇다면 정부 여당이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너무나 쉽게 거짓말에 속아주었던 탓이다. 정확한 사실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지 않고, 선전 선동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의 거짓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깨어 있는 국민이라야 산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들이 깨어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할 때 대한민국은 거짓의 왕국에서 진실의 공화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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