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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탓이 아니다

중동의 갈등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때문인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분쟁을 합리화할 때 종교적 상징과 언급을 들먹이며, 양측 모두에게 신성한 의미들이 잔뜩 있는 지역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기념비들이 그들의 갈등을 상징하게 되긴 했지만, 사실 이건 모스크, 교회, 사원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건 땅, 몰아내기, 정착, 점거, 해방에 대한 의지의 문제이다. 이들의 관계는 유대인과 무슬림/크리스천의 관계라기보다는 점령자와 점령 당한 자의 관계다.

ⓒsirup via Getty Images

종교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동전 하나씩을 받았다면 나는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로, 존 레논이 말한 종교가 없는 세상만 있었더라면, 전쟁이나 갈등은 없었을 것이고 모두 이웃을 사랑했을 것이다. 신학자, 목사, 물라, 사제들이 잘 지낼 수만 있다면 세계의 문제들은 뚝딱 해결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위기와 갈등에서 종교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사실은 사회 정치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종교를 통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면 중동의 갈등이 그렇고 북 아일랜드 분쟁이 그렇다. 거기서 싸우는 사람들은 가톨릭, 신교,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등을 믿지만, 그들이 싸우는 건 종교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종교를 내걸고 종교의 언어로 소통하지만, 그들의 불만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종교는 종종 세속적인 갈등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종교가 분열을 초래한다는 말은 눈 앞의 문제를 분석하지 않는 일이다. 밑에서 끓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표면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종파간의 유혈 사태를 보라.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 하루에 10명 이상씩을 죽이고 있다. 당신의 이름이 하산이라면 수니파 지역에 들어가면 안 된다. 한편 당신 이름이 오마르라면 사드르에서 길을 잃었다간 목을 베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남들이 우리가 묻지 않길 바라는 질문들을 던지자.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여러 해 전에는 서로 죽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그러는 걸까? 예전에는 공존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불가능해진 이유가 뭘까? 이라크의 모든 부족과 가문은 수니파와 시나파에 들어간다. 그들은 섞여서 지내며 서로 결혼도 했고, 이웃으로 옆 집에 살았을 뿐 아니라 가족이 되어 같은 집, 같은 침대에서도 살았다. 심지어 사담 후세인이 독재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그때, 그리고 그 이전의 이라크는 몇 세기 동안 세상에서 가장 다양성이 있는 곳이었고, 종교, 민족, 종파와 교파의 진정한 모자이크였다. 무슬림, 크리스천, 사비 교도, 예지디,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 투르크멘들이 평화롭게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

그건 예전의 이라크다. 미국/영국이 침공하고 폴 브리머 문민행정관이 잠정 권력을 쥐었던 이후의 현재의 이라크는 이렇지 않다. 이라크의 정치적 질서는 파괴되었고, 종파주의와 민족 파벌주의에 기반한 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국가의 정체성은 산산조각 났고, 좁은 집단에 대한 소속만이 남아있다. 그 이후 찾아온 카오스 속에서 모든 분파들은 주도권을 잡고 싶어했고, 남들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다. 종파의 인맥이 존재하는 새 이라크에서 보안과 경찰력을 조직하려 하자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한 분파에게 경쟁 상대를 쓸어버리는데 사용하는 장비를 준 셈이 되었다.

이건 시아교와 수니교의 책임이 아니다. 부시, 블레어, 브리머의 책임이다.

중동의 갈등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때문인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분쟁을 합리화할 때 종교적 상징과 언급을 들먹이며, 양측 모두에게 신성한 의미들이 잔뜩 있는 지역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기념비들이 그들의 갈등을 상징하게 되긴 했지만, 사실 이건 모스크, 교회, 사원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건 땅, 몰아내기, 정착, 점거, 해방에 대한 의지의 문제이다. 이들의 관계는 유대인과 무슬림/크리스천의 관계라기보다는 점령자와 점령 당한 자의 관계다. 코란이나 구약 성경보다는 밸푸어 선언과 이 지역의 길고 고통스러운 드라마를 낳은 강대국들의 중동 전략의 문제다.

사회 정치적 운동과 현상을 종교적인 의미로만 피상적으로 해석하는 사례들은 그 외에도 많다. 16세기 유럽의 종교 개혁부터, 21세기 이슬람 극단주의까지 전부 해당된다. 종교는 모든 선의 뿌리도, 모든 악의 원인도 아니다. 좋은 상황에서는 좋은 종교가, 나쁜 상황에서는 나쁜 종교가 나온다. 현실의 악은 사악한 종교로 바뀌곤 한다. 전쟁에 상처 받고 위기를 겪은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중동이 알 카에다와 ISIS의 극단적인 폭력 사상을 낳고 키웠다.

인간과 사회는 백지가 아니다. 깊은 문화적, 상징적, 역사적 유물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그 유물을 통해 의사 소통을 하고 현실을 이해한다. 인간과 사회는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평화로울 때도 반드시 내장된 가치, 이미지, 기준의 저장소를 사용하게 되고,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는 더욱 많이 사용한다. 긴장 상황에서는 문화, 종교, 국가의 정체성이 눈을 뜨고 작동을 시작하며 강렬해진다.

이건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가 불필요한 환상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종교는 개인과 집단의 집단적인 기억과 의식의 한 부분이다.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동을 정당화 한다. 안정적일 때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기능하다, 위기와 격동을 맞으면 목소리가 커지고 눈에 띄게 되며 가끔은 폭발적이 된다. 선천적으로 평화로운 종교도, 선천적으로 공격적인 종교도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보라. 기독교는 금욕주의와 비세속성을 설파했는가하면 16세기에는 갈등과 분립의 불꽃을 지폈고, 십자군 전쟁 같은 종교 전쟁도 일으켰다. 그 자체만으로 독립된 종교란 없다.

즉 우리는 사상과 교리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보는 걸 피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인간들은 머리가 아니라 발로 걷는다.

허핑턴포스트US의 Religion Is Not to Blam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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