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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의 맏딸은 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나

  • 김병철
  • 입력 2015.10.31 12:29
  • 수정 2015.10.31 12:30
ⓒ연합뉴스

기묘한 추도식이었다. 망자의 유골도 없고, 상주도 명확하지 않았다. 사후 2달이 지나서야 열린 식장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8월6일 미국에서 타계한 사실이 최근 국내에 전해진 천경자 화백(1924~2015)의 추도식이 30일 오전 기증작품실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현관에서 열렸다. 고인의 장례를 치른 뒤 별세 사실을 처음 국내 언론에 알린 맏딸 이혜선(70·섬유공예가)씨는 불참한 채 동생 등 다른 유족이 주최한 추모행사였다.

김종규 추도위원장과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박우홍 화랑협회장 등 문화계 인사와 시민 200여명이 나와 꽃을 바치며 명복을 빌었다.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삶의 그림과 함께. 인생의 고달픈 길동무처럼 이어갈 것이다.”

맏아들 이남훈(67·건축가)씨가 대신 읽은 천 화백의 과거 글귀들이 지각 추모식이 열린 곡절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외국 땅에서 더 이상 힘겨워하지 마시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에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말을 건넸다.

모든 이의 추모 속에 장례를 못치른 허물을 의식한 듯 김종규 추도위원장도 “고인의 탄생 100주년인 2024년에는 유족, 후학과 상의해 추모 행사를 잘 준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추도사를 맺었다. 참석한 제자 등 고인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이런 상황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나왔다.

지난 8월 별세한 고 천경자 화백의 추도식이 열린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로비

사후 두달여 뒤 알려진 천 화백의 이상한 부고를 둘러싸고 입길이 끊이지 않는다. 부고와 장례 과정에서 인륜을 벗어난 파행적 상황이 드러나면서 유족 사이 갈등이 표면화될 조짐도 보인다.

1998년 미국에 간 천 화백을 뉴욕 집에서 보살펴온 맏딸 혜선씨가 구설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그는 다른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일부 언론에 먼저 제보를 하는 상식밖의 방식으로 타계 소식을 알렸다.

시신을 화장해 비밀리에 장례를 치른 뒤 8월 중순 유골함을 들고 한국을 찾아 서울시립미술관 2층의 기증전시실을 돌았다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으나 유골 봉안처는 끝내 숨겼다. 미술관 쪽은 이씨의 행적을 알고서도 그의 부탁으로 함구했다가 타계 사실이 보도되자 뒤늦게 헌화대를 차리고 추모행사를 준비하는 민망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씨를 뺀 다른 유족들은 타계사실을 한참동안 몰랐다. 고인의 맏아들 이씨와 둘째딸 김정희(54·미국 몽고메리칼리지 교수)씨, 남편이자 고인의 사위인 문범강(61·미국 조지타운대 교수)씨, 작고한 둘째 아들 김종우씨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서재란(52·세종문고 대표)씨는 지난 27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달 중순에야 모친의 타계를 알게됐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이달 18일 국내 한 은행으로부터 어머니 통장 계좌의 해지 동의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서야 사망 사실을 인지했다고 한다. 고인이 살던 곳인 서울 압구정동의 주민센터에서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어보니 8월6일 사망했다는 공식기록을 확인했다는 얘기였다. 둘째딸 김씨는 “97년 미국에 가신 뒤로 종종 언니집에서 만났다. 올해 4월 5일 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천경자 화백의 유가족들이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가족간에 관계가 나빠도 부모의 임종이나 기일에는 연락해 함께 제례를 치르는 것이 상식이다. 왜 혜선씨는 동생들에게 임종을 숨기고 언론에 먼저 알린 것일까. 실제로 회견장의 유족들은 혜선씨를 원망하는 빛이 뚜렷했다.

김씨는 “언니가 유골함을 들고 8월 서울을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할 기회도 없이 떠나 보내야 된다는데 망연했다. 유골이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알려달라는 게 우리의 요구”라고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유족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혜선씨의 행동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어머니에게 누를 끼칠 수 없어 참고 참아왔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언니가)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하길 원했다”며 “이해할 수 없는 언니의 인격과 행동을 어떻게 분석해 말할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천 화백은 생전 두번의 결혼을 했다. 1944년 일본 유학 당시 현지에서 도쿄제국대학 유학생 이철식씨와 결혼해 맏딸 이혜선씨와 맏아들 이남훈씨가 태어났으나 곧 헤어졌다. 해방 뒤 광주 전남여고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지역 신문기자였던 유부남 김남중과 열애해 사실혼 상태에서 둘쨋딸 김정희씨와 둘째아들 김종우씨를 낳았다. 그래서 두 김씨는 법률상의 호적에 올라있지 않다.

고인의 그림을 보고있는 유족들

유족과 주위 말을 들어보면, 97년 혜선씨가 혼자 살던 천 화백을 갑자기 미국으로 데려간 것이 사이가 소원해진 기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언니는 미국에서 십여년간 희생적으로 어머니를 돌봐왔지만, 모시고 떠날 때 다른 가족들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 떠날 때 어머니의 금융재산 등 전권을 독점한 상태였다.” 누가 모친을 모실지, 재산관리는 어떻게 할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유족들은 혜선씨의 허락이 있어야 미국에서 모친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소통이 안될 때는 일년 가까이 못 만난 적도 있다. 어머니가 계신 집 근처에 갔다 경찰이 출동해 체포될 뻔한 적도 있다. (국내 인사들이)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어머니 뜻과 다르다. 어머니는 한국에 오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전했다.

고인의 재산을 둘러싼 다툼에서 갈등이 비롯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정색하며 부인했다. 김씨는 “언니가 재산권과 작품관리 등 모든 전권을 갖고 있다. 다른 유족은 작품이 한점도 없다”고 했다. “작품은 어머니 것이기에 소중하다고 생각할 뿐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른 유족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에 대해 언니 혜선씨는 28일치 <동아일보> 현지 인터뷰에서 동생들이 엄마를 모시기 힘들다고 해서 모시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매체에는 혜선씨의 국내 지인이 어머니 작품 관리를 둘러싸고 다른 유족과 이견이 있다는 식으로 말한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 김씨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언니가 일방적으로 모시고 갔고, 지금도 재산, 작품 등 모든 전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게 없다.”

1987년 8월1일. 천경자 화백의 서울 압구정동 자택에서. 탁기형 선임기자

그렇다면, 혜선씨가 어머니를 국내 인사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고, 고인의 부고를 언론에 먼저 제보하는 등의 기행을 벌인 배경은 무엇일까. 천 화백의 홍대 교수시절 제자였던 화가 이화자 (72)씨는 고인에게 분명한 치매증세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2002년 뉴욕의 한국영사관에서 우연히 딸 혜선씨와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안녕하십니까’란 인사를 해 마음이 아팠다. 혜선씨가 치매증세라고 말하더라”고 그는 전했다. 지인들도 못알아보는 어머니를 딸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란 추정이었다.

미술계에서는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 진위작 논란에서 비롯된 정신적 상처가 근본 요인이 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가짜라는 작가 판단을 무시하고 진작이라고 강변한 미술관과 화랑, 전문가들의 태도가 천 화백과 딸에게 극도의 피해의식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예술원이 회원인 천 화백의 의료 증빙서류를 달라고 요구하자 혜선씨가 명예훼손이라며 거부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혜선씨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병석에 누운 엄마가 누굴 만나겠느냐. 어머니가 ‘내가 아플 때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다”면서 외부 접촉을 사생활 침해로 보는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동생들에게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는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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