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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31일 08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01일 14시 12분 KST

트위터는 왜 죽어가는가(그리고 거기서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

Getty/Huffington Post

초여름. 나는 듀퐁 서클에 있다. 뭔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요즘 들어 트윗을 훨씬 적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 읽어야 할 책이 있어서, 그 생각은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접어둔다.

늦여름. 나는 매디슨 스퀘어에 서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트위터가 한산한 바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한 채, 어처구니 없어 하며 너무 빨리 자리를 뜬다. 어쩌면 다 휴가 중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가을이다. 나는 런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 와 있다. 어떻게 된 거지? 트위터는 공동묘지다. 유령들이 산다. 나는 그 유령들을 '이스트들 ists'이라고 부른다. 저널리스트들이 저널리스트들을 리트윗하고... 액티비스트(활동가)들이 액티비스트들을 리트윗하고... 이코노미스트(경제학자)들이 이코노미스트들을 리트윗하고... 어쩌다 한 번씩 이런 '이스트들' 집단 사이에 대전쟁이 일어나지만... 하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 다들 서둘러 떠나 버렸으니까.

트위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미스터리 아닐까?

아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 없었는지를 살펴보자. '경쟁'이다.

각광받는 새 스타트업들이 트위터와 경쟁하지 않았다. 경쟁사들은 기껏해야 트위터의 갑작스런 추락에 미미한 기여만 했을 뿐이다. 트위터의 추락을 경쟁사 때문이라고 하기엔, 일단 사람들이 경쟁사들의 앱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크게 보면 경쟁사들은 마이크로 메시지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트위터의 문제는 더 깊지만 더 간단한 곳에 있다. 너무 뻔해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트위터는 사실 스스로의 맹목의 피해자다.

내 이론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이거다. 어뷰즈.

나는 이 글에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어뷰즈가 테크와 미디어의 가장 큰 문제라고 주장할 것이다. 어뷰즈 문제가 오늘날 웹이 마주한 가장 큰 문제다. 검열, 규제, 이윤 추구보다 더 큰 문제다.

굉장히 심각하고 스케일이 엄청나게 큰 문제다. 게다가 비용도 많이 든다. 테크가 사랑하는, 코드 패치나 업데이트 같은 싸고 간단한 해결책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내가 말하는 어뷰즈가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폭력적인 위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논쟁, 예측 가능한 헐뜯는 말, 소셜 웹에 만연한 작은 폭력들의 전반적인 분위기... 그리고 보통 사람은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한때 트위터를 위대한 전세계의 광장, 누구나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빛나는 아고라로 미화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조롱하고, 괴롭히고, 고함지르고, 희롱하고, 협박하고, 스토킹하고, 아첨하고, 떼를 지어 공격할 수 있는 광장엔 가본 적이 없다... 끼지 않은 대화를 엿들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실존적 분노를 완화하기 위해... 자신의 박살난 꿈을 향해... 그리고 경찰조차 부를 수 없다.

이러한 사회 현상이 당신에겐 어떻게 보이는가?

트위터는 광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트위터는 술 취한 사람들이 설치는 모쉬 핏 같다.

모쉬 핏에 뛰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을 바꾸는 10억 원짜리 상장 회사를 그런 사람들에 기반해서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트위터는 거칠고 못된 공간이 되었다. 그 이유는 트위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뷰즈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예 생각하지조차 않는다. 주요 테크 회사의 CEO가 광고가 아닌 어뷰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본 기억이 나는가? 왜 그런 걸까?

가혹하게도, 그들은 어뷰즈를 자기 '비즈니스 모델'의 지엽적인 것, 사소한 성가신 것, 투자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광고를 더 파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틀렸다. 정말이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어뷰즈는 소셜 웹을 죽이고 있다. 그러니 어뷰즈는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에 있어 지엽적인 게 아니다. 중심에 있다.

어뷰즈는 중요한 냉각 효과를 갖는다. 티핑 포인트를 넘어가면, 사람들은 네트워크 사용을 그만두고 떠나버린다. 트위터에 이런 일이 생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을 연결하는 테크에 있어 어뷰즈는 중심에 있다. 살모넬라 균에 오염되지 않은 소고기를 파는 게 음식 산업의 중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세상에 화가 난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간단하게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어뷰즈가 넘치는 플랫폼을 만들고, 그게 문제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며 나 몰라라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물 가 버린다.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트위터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은 각자 패거리를 만들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작은 그룹을 만들었다. 이 부족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믿음, 방식, 관습, 문화, 즉 세계관을 수호하는 것이다. 트위터라는 디지털 세계는 '이스트들'로 나뉘었다. 경제학자든, 남성 권리 수호자든,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다. 이런 이스트들은 자신들의 '이즘'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그 신앙이 애초에 모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믿음이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경의를 표해야 할 토템이다. 당신이 그 토템에 절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도전한다면... 그러면 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들은 당신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선포한다.

1단계: 당신이 어떤 이스트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보통 별 생각 없이) 한다. 그들을 조직한 믿음에 도전하는 말이다.

2단계: 그들이 알아차린다.

3단계: 이제 시작이다. 전면 게릴라 정보 전쟁이다. 분노에 차 떼로 괴롭히고 수치를 준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폭력적인 위협 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보라. 끝없이 옥신각신하고 분노를 터뜨리지만, 멈추지 않는 이러한 전자 폭력은... 우리는 애초에 별 의미 없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런 유치한 게임에서 발을 빼는 게 놀랄 일인가?

테크노컬쳐의 추기경과 대주교인 엔지니어, MBA, MBA를 딴 엔지니어들은 내 설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고려해 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니라고 기를 쓰고 우길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 설명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 믿음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세상을 조직하라고 배운 대로 자기 회사를 조직한 사람들이다. '생산' 부서, '엔지니어링' 부서, '돈 벌이' 담당자 등으로 말이다.

그렇다. 여기서 그들의 제품과 서비스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는 이 그림에서 아예 빠져 있다. 저런 조직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최고가에 판매하고 최저가에 생산하는 산업 시대의 목표에 매진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아프게 만드는 부패한 소고기를 계속해서 파는 정육 회사의 매출은 결국 줄게 되어 있듯이, 어뷰즈로 오염된 소셜 웹 역시 결국 사용이 줄 수밖에 없다.

원한다면 경제학자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 효과가 소셜 테크놀로지의 동력이지만, 어뷰즈는 반 네트워크 효과라 할 수 있다. 부정적인 효과다. 당신이 네트워크에 있다는 사실이 내게 이득이 되는 게 아니라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이런 조직들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 주는 단서가 있다. 테크놀로지에서 Q&A는 안내가 아닌, 규칙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된다. 문화로서의 테크놀로지는 현실 감각이 너무나 부족해서, 자기가 어떤 업계에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트위터는 규칙에 따르는 비즈니스가 아닌(지금이 1980년대도 아니고!) 소셜 인터랙션의 기업이다.

이건 비트와 바이트의 문제가 아닌, 규범과 가치의 문제다. 지금의 테크놀로지는 의미있는 방식으로 가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치'란 에러가 없는 규칙에 불과한 것이 아닌, 어뷰즈가 없는 인터랙션이다.

테크놀로지 측면에서 완벽한 규칙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남을 모욕하고 괴롭히고 공격하는 목적으로만 사용된다면 사람들이 그 플랫폼을 사용해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가치가 제일 중요한데 말이다.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쪽보다 축소하는 쪽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면 사용자들에게 가치를 만들어 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테크놀로지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리게 된다. 우리에게 가치를 주지 못하는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이다. 트위터가 만드는 소셜 인터랙션이 사소한 폭력이라면,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뷰즈 문제는 더 미묘하고,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며, 위에 언급한 다른 모든 문제들보다 심각하다.

어뷰즈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건강한 마음은 어뷰즈하지 않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어뷰즈는 트라우마에서 생기고, 트라우마가 있는 마음이 어뷰즈를 한다. 분노와 좌절을 외면화할 것이냐, 묻을 것이냐, 탈출할 것이냐 - 어뷰즈 당한 마음은 상처를 어떤 식으로든 제거하거나, 아니면 어뷰즈에 의해 산산이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뷰즈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게 문제다.

우리는 어뷰즈를 정상적,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직장에서 규칙, 표준, 기대치에 의해 어뷰즈 당한다. 직장에서 우리는 그저 활용 당하고 배치되고 해고되는 '인적 자원'에 불과하다. 놀 때도 우리의 순진함과 인간적인 약점을 노리는 업계에 의해 어뷰즈 당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는 스마트 기기를 통해 만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한 것 같지도 않은 말 때문에 어뷰즈 당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총을 쏘는 게 예외가 아닌 규칙인 사회에 살고 있다. 항우울제를 안 먹는 사람보다 먹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 사회... 거의 모두가 웹에서 어뷰즈 당해 본 적 있는 사회... 어쩌다 떠오른 의미 없는 말을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던졌다는 이유로.

지금은 침체의 시대다. 좌절된 꿈과 기대의 시대다. 경제만 침체된 게 아니라 우리도 침체되어 있다. 우리의 가능성과 잠재력,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침체되었다. 그래서 폭력의 거대한 사이클이 생기는 것이다. 침체가 어뷰즈고, 우리가 피해자다.

우리는 저축, 은퇴, 직업, 사회계약을 빼앗겼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위험과 절망을 겪는 우리는 또한 우리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소셜 웹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걸 가지고 서로 시비를 걸고 괴롭히고 분노하고 매도한다. 어뷰즈 당한 사람들이 이젠 어뷰즈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소셜 웹이 어뷰즈 하는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게 메가트렌드다. 거대한 침체가 분노의 파도의 정점에 오른다. 내가 과장하고 있는 것 같은가? 그렇다면 잠시 한 발 물러서서 전세계에서 우익 극단주의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는 걸 생각해 보라. 침체의 억울함과 좌절을 동력으로 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끝없는 격분이든, 씁쓸한 아이러니의 수동 공격성이든, 그 분노와 좌절은 어쩌면 현재의 문화를 결정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어뷰즈 당한 우리는 서로를 어뷰즈한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렇지만 소셜 테크놀로지가 다시 제대로 되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침체의 산물인 어뷰즈의 사이클을 역전시킬 수 있는 소셜 플랫폼이 가장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좌절된 꿈의 시대인 지금, 사람들의 깊은 감정적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명예가 실추되어 상처를 입은 게 아니다. 칼도 아니다. 죄보다 날카로운 면도날 같은 메스에 의한 상처다. 이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계속 피가 날 것이다. 붕대나 약이 아니라, 품위, 자비, 사랑, 의미로 치유해야 한다.

그러니 트위터에게 바치는 내 묘비명을 공개한다. 트위터가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트위터의 어떤 부분은 죽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이렇게 표현해 보겠다.

우리는 우리가 혁명을 만들었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의 위대한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의 혁명가는 내일의 작은 독재자다. 프랑스 혁명은 대중의 권력에 대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찬가로 시작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유혈 사태로 절정을 이루었다. 너무 오만한 혁명은 모두 이렇게 역사가 되어버린다. 디지털 혁명도 마찬가지다. 선을 넘으면 종교 재판관들이 몰려온다. 혁명 자체의 격분을 감수하느니 조용히 있는 게 낫는 상황이 된다.

열렬한 혁명가들이 모두 그렇듯, 우리는 새 질서를 만들 거라고 꿈꾸었다. 사람들이 더 자유롭고, 진실되고, 더 나은 체제가 올 줄 알았다. 우리는 권력에 굶주린 자들이 힘없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는 회색 질서를 감히 뒤집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에 굶주린 자들이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명령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든 것뿐이었다.

열렬한 혁명가들이 모두 그렇듯, 우리는 혁명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동물적 에너지는 자유를 원하지만, 풀어놓으면 그 자유를 망친다. 가능성을 권력 위에 두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가 더 나은 웹을 만들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오만함, 특권, 맹목이 아닌 겸손함, 고마움, 현실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뷰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손에 쥐는 엄청난 특권의 대가로 참아야 할, 그저 성가실 뿐인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어뷰즈는 네트워크를 박살내고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커뮤니티를 꽃 피우지 못하게 하고, 삶이 번창해지지 못하게 한다.

당신이 소셜 인터랙션을 목표로 한다면, 박테리아 감염이 고기 판매에 중요한 만큼 어뷰즈가 당신에게 중요하다. 그걸 몰랐다간 2015년의 트위터 같은 꼴이 난다. 아름다운 광장이 아닌, 분노가 넘치는 모쉬 핏이 된다.

이 글은 Bad Words에 처음 게재됐다.

허핑턴포스트US의 Why Twitter's Dying (And What You Can Learn From It)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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