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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장면처럼 인생도 공간도 그렇게... 「방범포차」 사람들

"셋이 만나 거리낌 없이 소주를 마실 때만큼만 유쾌하고 편한 놀이터 같은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했다. 누군가 나서서 '해 졌다. 술 마시러 가자' 하면 자연히 향하게 되는 곳. 당시만 해도 이 근방에 편하게 소주 마실 집이 없었고 마침 지금의 자리가 헐값에 나왔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 황해원
  • 입력 2015.10.29 12:44
  • 수정 2016.10.29 14:12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인생도 공간도 그렇게...

「방범포차」 사람들

밤 10시.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30대 여성 둘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산도 없는데 하필...." 캄캄한 매장 안엔 삼삼오오 모여 닭볶음탕에 소주를 마시고 있고, 구석진 자리에선 산울림 김창완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바깥엔 비가 매섭게 몰아치는데 가게 안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다. 이태원 '장진우 거리'의 주인공 장진우와 영화미술감독 이태훈, 공간연출전문가 이동욱이 만든 「방범포차」는 그들이 꿈꾸는 장면과 이야기를 녹인 공간이자 한 편의 영화다.

공간을 장면(Scene)처럼

족히 50년은 더 돼 보이는 건물 안과 밖 곳곳이 낡고 빛바랬다. 온갖 손때와 긁힌 흔적들이 가득한 벽면엔 구식 포스터와 여배우 사진들이 불규칙하게 정열돼 있다. 모퉁이엔 목재 소재로 만든 정체불명의 큼직한 대문이 걸려있고 주변으로는 실금 자국들이 간간이 보인다.

이태원 회나무길에 위치한 「방범포차」는 '장진우식당'과 '문오리', '프랭크', '그랑블루' 등의 식당들을 줄줄이 오픈하며 이태원에선 백종원보다 유명한 장진우 대표와, '공공의 적', '간신', '전설의 주먹', '이끼' 등 이름 대면 알 만한 영화의 공간미술을 담당했던 이태훈 미술감독, 이동욱 공간연출전문가가 3년 전 의기투합해 만든 술집이다.

▶방범포차 외부. 특별한 익스테리어도 없고 간판도 작아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곳은 원래 세탁소였다.

요즘에야 '이태원 스타일'의 몽환적인 맛집들이 넘쳐나지만 5년 전만 해도 이 근방은 그저 조용한 마을에 불과했다. '장진우식당'과 '장진우다방'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장진우 거리'가 태동기를 맞으면서 이 거리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진우를 처음 본 게 그 무렵이다. 여자친구가 3개월간 외국 여행을 가면서 마치 바통 터치하듯 진우를 '맡기고' 갔다. '사는 곳이 가까우니 심심할 때마다 자주 만나 놀라'면서. 여자친구와 진우는 오래된 동네 친구였다."

이태훈 감독은 무뚝뚝한 듯 세심한 장 대표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장진우식당은 자연히 단골집이 됐 다. 특정 메뉴도 정해진 술도 없지만, 그가 갈 때마다 장 대표는 늘 작은 주방에서 먹음직스러운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 술과 함께 냈다. 평소 가깝게 지냈던 '비카인드' 이동욱 실장을 장 대표에게 소개했고 그렇게 셋은 소울메이트가 됐다.

▶왼쪽부터 이태훈 영화미술감독, 이동욱 공간연출가, 그리고 장진우거리의 주인공 장진우 대표. 어쩜 표정들이 이렇게 밝고 아름다운지.

공간을 연기하는 일

방범포차엔 모든 요소마다 '신(Scene)', 즉 장면이 녹아있다. 주방과 테이블, 테이블과 화장실, 화장실과 입구 사이의 동선이나 상업 공간의 활용도를 주로 생각하는 일반 외식업 인테리어와 달리, 방범포차는 입구에서부터 내부 구석구석까지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장면'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이태훈 미술감독의 몫이었다.

"영화미술은 한마디로 공간을 연기하는 작업이다. 배우가 배역에 맞는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감정 연기를 하는 것처럼, 배우가 서 있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상황, 배역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연구해 세트와 미술로 연기를 한다. 영화 '전설의 주먹'에서 황정민은 처와 이혼하고 국숫집을 운영하며 중학생 딸과 사는데, 과연 이 국숫집이 그냥 국숫집일까? 한때는 처와 나란히 주방에 서서 국수를 만들던 '삶' 그 자체였을 것이고 한때는 진짜 뭐 같은 곳이기도 했을 거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황정민이 가게 문을 발로 뻥 차고 나갔을 거고 아내는 불 꺼진 가게에 혼자 남아 밤새 울었겠지. 기분 좋은 날은 흐뭇한 시간도 보냈을 거고(웃음)...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엔 나와 있지 않은 모든 장면과 스토리를 상상하면서 공간을 만든다. 가상이지만 최대한 현실적이게."

▶이동욱 실장과 이태훈 감독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형 어제 술 많이 먹었어?' '응...'

방범포차 역시 하나의 거대한 시나리오였다. 장진우 대표는 이태훈 감독의 관점이 상당히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적어도 어떻게 하면 공간을 넓혀 손님을 더 많이 채울 수 있을지와 같은 따분한 고민이 아니라서 좋았다는 것이다.

"준비하는 동안 우리끼리 매일 술을 마시며 태훈 형 방식대로 이런저런 장면들을 상상했다. 멀쩡하게 들어와선 소주 몇 잔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사람, 그 사람 노래를 듣곤 조곤조곤 따라 부르는 뒤 테이블 여성, 카운터에서 계산 중인 취객이 비틀거리다 쓰러져 옆 테이블에 세워져 있던 소주병이 와장창 깨지는 장면, 그 순간마저 본분을 잊지 않고 온몸을 비틀고 있는 산낙지까지(웃음)."

해 졌다. 술 마시러 가자

이태훈 미술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국악 신동에 한때 사진가였던 장진우 대표, 기업 행사나 브랜드 론칭 행사의 공간연출 담당인 이동욱 실장은 일의 주체와 수단만 다를 뿐, 예술가적 기질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었다. 어디서든 색깔을 내고 개성을 표출하는 것에 익숙했다.

"심지어 취향도 입맛도 똑같다. 셋 다 한식파에 오래된 식당을 좋아해 토종음식이나 한식을 먹고 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언제든 차 타고 멀리 나갔다. 진우가 추진력이 좋아 얘기만 꺼냈다 하면 다음날엔 바로 출동이었다(웃음)." 이동욱 실장은 그렇게 같이 먹고 마시는 동안 알게 모르게 지금의 방범포차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고 한다.

장진우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변변한 간판 없이 시작한 장진우식당도 '식당'보단 사랑하는 지인들을 위한 '공간'의 개념이었듯, 언젠가 마음 맞는 소울메이트가 생긴다면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어야겠다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셋이 만나 거리낌 없이 소주를 마실 때만큼만 유쾌하고 편한 놀이터 같은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했다. 누군가 나서서 '해 졌다. 술 마시러 가자' 하면 자연히 향하게 되는 곳. 당시만 해도 이 근방에 편하게 소주 마실 집이 없었고 마침 지금의 자리가 헐값에 나왔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페인트칠 후엔 작화작업에만 몰입...

신동엽이 토크쇼 하고 산울림이 노래도 부르고

마침 이태훈 감독이 영화 공공의 적 촬영 작업을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작업하는 동안 촬영지인 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 근처에만 있었더니 온통 방범 생각뿐이었다. 지나는 말로 '방범포차 어때?' 했다가 얼결에 '좋다'는 답을 들었다. 그는 그 길로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문짝부터 떼 왔다.

▶서대문형무소를 모티브로 한 방범포차의 내부 전경

지금의 방범포차 자리는 오랜 시간 세탁소였다. 그동안 한 번도 리뉴얼하지 않아 건물 외부 내부는 많이 낡아있었다. 그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느낌과 맞아떨어졌다. 이태훈 미술감독의 말에 따르면 특별할 것 없는 게 방범포차의 콘셉트다. 몇십 년간 사람 손때를 타지 않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녹슨 공간. '원래 무얼 하던 곳이었을까', '이발소였을까? 복덕방이었을까?' 상상하게 되는 곳.

그들은 처음부터 세월의 흔적이 차분하게 묻어있는 아지트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페인트칠을 했다. 연회색과 먹색을 섞어 발랐다. 배기시설이 그대로 노출돼 있는 천장은 일부러 손대지 않았다. 페인트칠이 끝난 후 곧바로 작화작업에 들어갔다. 미술 하는 사람들끼리는 보통 '간지작업'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낡아있는 것 같은 형태를 만들기 위해 손때를 입히거나 벽을 긁어내는 일이다. 이 작업을 정교하게 할수록 공간이 실재처럼 된다.

▶방범포차 벽면. 자연스럽게 낡아있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손으로 벽을 일일이 문지르고 긁어 손때를 입혔다.

꼬박 1주일을 매장에 틀어박혀 손으로 벽을 문지르고 벗겼다. 페인트 위를 강판으로 갈고 어두운 색상의 물감들을 섞어 드문드문 발라 부식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수천, 수만 번의 비를 맞고 바람을 맞아 녹슨 것처럼 자연스럽게 빛바랜 듯 보였다.

소품은 이동욱 실장 담당이었다. 황학동 중앙시장과 을지로, 동묘역 부근을 다니면서 신문을 줍고 포스트와 옛날 잡지들을 구했다. 창고 한쪽에 오래 묵혀 두었던 나무 테이블과 의자를 죄다 꺼내 겉면에 때가 타도록 바깥에서 비를 맞혔다. '언젠간 버려야지' 생각하고 쌓아뒀던 물건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주방은 맨 마지막에 만들었다. 테두리를 전부 쇠창살로 꾸미고 콘셉트상 주방과 홀을 감옥 안과 밖으로 나누었다. 창살 한쪽엔 수갑도 걸었다. '남자들 소굴'일 것을 생각해 한쪽 벽면에 여배우 사진을 덕지덕지 붙였다. '갱생'을 위한 글귀도 벽에 새겼다. 석방일을 기다리는 죄수자의 심정으로 한쪽 벽에는 못으로 스크래치를 만들어 날짜를 세기도 했다. 남자 셋이서 손발이 너무 잘 맞아, 방범포차가 마치 운명 같았다.

▶벽면 한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에로틱한 여배우 사진들.

▶실제 형무소에 가면 벽면에 새겨진 스크래치를 볼 수 있다. 석방일 기다리며 날짜를 세는 표시다.

시작과 끝이 그러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방범포차엔 영화 같은 장면들이 많이 있었다. "산울림 노래를 틀었더니 가게 안 손님들이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한쪽 구석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기타를 치면서 똑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자세히 보니 진짜 산울림의 김창완 씨가 아닌가! 소름 돋는다는 손님들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루는 시련 당한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시며 펑펑 울고 있어 '인생 다 그런 것'이라며 김치전을 서비스했는데 마침 비가 왔다. 그날 하루는 작정하고 종일 김치전을 부쳐 모든 테이블에 돌렸다. 어떤 날은 셋이 한쪽 테이블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나중엔 가게 안 손님들과 다 같이 둘러앉아 삼겹살 파티를 열기도 했다. 신동엽이 지인들과 우연히 술 마시러 온 적이 있었는데 결국 그 자리는 '신동엽의 토크쇼'가 됐다. 기타리스트 박주원도 2차로 들렀다가 필 받아 즉석 콘서트를 열었다. 박주원이 집시여인을 연주하는데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 전부 '집시~집시~집시~'하며 떼창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구해온 형무소 문짝.

▶이태훈 미술감독이 실제 영화촬영장에서 세팅했던 물품들. 예술에서는 오브제 또는 미장센이라고도 한다.

영화미술도 인테리어도 비울수록 좋다

셋이 만나 술 한 잔 할 때만큼 재밌고 술맛 나는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것, 그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바닥과 벽면을 일일이 간지 작업해가며 긴긴 세월을 입혔던 것, 그런 과정들이 모여 방범포차가 됐고 이들이 전하고자 했던 무언의 메시지와 '느낌적인 느낌'을 손님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했다.

장진우 대표는 현재 운영 중인 20여 개 매장 중 방범포차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크다. "배고프면 다른 데 안 가고 혼자 여기 온다. 라면이나 만둣국 같은 거 끓여 먹고 가기도 하고 우울하면 고기 조금 구워서 소주 마시고. 분위기와 공간이 주는 힘인 것 같다."

이태훈 미술감독은 외식업 인테리어나 영화미술이나 주체가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에선 같다고 이야기한다.

"인테리어는 사실 비우는 과정이다. 뭐든 '더' 하고 싶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 다음에 무엇을 얼마만큼 버릴지 생각한다. 근데 그게 참 어렵다. 인생도 그렇지 않나?(웃음) 버리는 거, 비우는 거... 공간은 인물에 포커스가 맞춰져야 한다. 영화에선 배우가 되겠지만 매장에선 술 마시러 오는 손님이다. 백그라운드에만 중점을 두면 그때부턴 방해의 요소가 돼버린다. 수많은 음식점을 가보면 대부분 공간을 채우려고만 해놓더라. 그러니 공간만 보이고 사람은 안 보이는 거지..."

이들은 당분간 계획이 없다. 쉬면서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영감을 찾을 생각이다. 이태훈 감독은 벌써 영화 작업 의뢰가 몇 건 들어와 있다. 이것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찬찬히 고려해볼 참이다.

먹고 마시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다며 심심찮게 한량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한량이 어때서!'라며 웃는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삶의 근간과도 같은데,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서 추억도 하고 공감도 하고, 삶을 고백하기도 한다. 고로 먹고 마시며 유쾌하게 떠드는 일은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면서 가장 위대한 일인지도 모른다. 뭐. 적어도 그 위대한 일 하나는 훌륭하게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지금처럼 좋은 공간을 만들며 살고 싶다. 맛있는 맥주 많이 마시면서.

* 이 글은 월간식당 1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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