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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은 버려야 자리 잡는대요"

도경미 씨는 일손이 부족해 이주노동자의 도움을 구하는 입장이면서도 이들을 불합리하게 대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한국 사람과 똑같은 일을 똑같은 양 해도 하루 품값을 만 원씩 덜 줘요. 한국 사람한테는 밥 꼬박꼬박 해 주면서 외국 사람한테는 다 도시락 싸 오라고 하고. 일이 서투르니까 돈을 덜 준다고 하면 차라리 기분이 덜 나쁜데, 외국 사람이라 무조건 똑같이 못 준다는 거예요."

경북 상주에서 포도·벼 농사짓는 도경미·조성이 씨

올해 농사 경력 10년차인 여성생산자 도경미.

베트남에서 태어나 원래 이름은 '도킴옌'으로 2007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한식이 입에 안 맞고 된장은 아예 못 먹던 건 옛날 일, 이제는 된장보다 청국장이 더 맛있을 정도다. 처음 해 보는 농사일이 힘들어 울고 싶던 것도 지난 일, 지금은 누구보다도 날랜 손으로 포도알을 솎는다. 능숙한 경상도 사투리로 지난한 적응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이 사람, 이제부터는 '땅땅거리며' 살면 좋겠다.

글 이선미(살림이야기 편집부) \ 사진 류관희

베트남에는 미국에서 수입돼 들어온 포도가 대부분인데, 지금은 직접 키운 포도를 먹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십 년간 농사지으면서 지난해 농사가 제일 잘 됐어요. 그런데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잘됐으니 다들 포도 많이 먹으면 좋겠어요."

우리 나무는 노다지 죽고 곰팡이 나고

지난 9월 초 경북 상주 갯머리공동체에서 한창 포도 수확 중인 도경미·조성이 부부를 만났다. 올해 농사가 잘 돼 수확량이 제법 된단다. 농사가 잘된 건 기쁜 일이지만 한살림 출하 약정량에 비해 생산량이 많아 나머지를 어디에 어떻게 낼지 고민이다. 주문량이 많아야 많이 낼 수 있을 텐데 다른 생산지도 다들 수확량이 많아서인지 포도가 적체란다. 까맣게 농익은 포도를 보니 절로 '많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숙하게 포도를 상자에 담는 도경미 씨는 2003년 조성이 씨를 만나 한국으로 왔다. 당시 제빵사로 일하면서 바게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베트남에 온 조성이 씨를 사촌언니를 통해 소개받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22살 도경미 씨는 그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35살 조성이 씨와 '연애 반 중매 반'으로 결혼했다.

결혼 후 울산에서 2년 동안 살면서 남편의 건강이 나빠졌다. "빵을 만들려고 밀가루를 반죽하면 가루가 콧속으로 들어가 천식같이 기침을 많이 했어요. 제빵사 생활을 7~8년 했는데 매일 아침마다 기침이 너무 심하니까 '이 생활 접어야겠다' 싶었죠."라는 게 조성이 씨의 말. 그래서 조성이 씨의 고향인 이곳으로 귀농해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부부가 한살림 생산자였던 건 아니다. "관행 농사지었는데 증상이 더 심해지는 거예요. 포도밭에 약을 치면 머리가 너무 아파 두통약을 안 먹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죠. 한살림 생산자이던 형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한살림 들어오라'고 권했고, 이후 무농약으로 농사짓다 보니 어느 순간인가 몸이 싹 괜찮아졌어요." 어쩌다 약 치는 밭에 갔다 오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는데, 건강을 찾은 지금은 그것도 괜찮단다.

베트남의 수도인 호치민 시 출신으로 농사일을 전혀 해 보지 않았던 도경미 씨도 귀농하면서 처음으로 농사를 접하게 됐다. "둘째 낳자마자 시골로 들어와서 낮에는 밭일하고 밤에는 애 보고... 게다가 관행하는 옆집은 수확량도 많고 돈도 되고 하는데 우리는 노다지 나무만 죽고 곰팡이 나고 해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한두 번 든 게 아니었어요." 도시에 살면서 보기 좋은 것, 예쁜 것만 사 먹다가 상품가치 없어 보이는 친환경 농사지으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던 것.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무농약으로 기른 포도를 씻지도 않고 그냥 먹는 걸 보면서 '이거는 건강에 좋은 거다' 마음을 다잡으며 지금까지 해 왔다.

"포도는 송이가 작은 게 더 맛있고, 밑에서부터 익기 때문에 아래쪽 포도알이 더 달다"는 게 조성이 씨의 말이다. 하지만 가장 맛있는 건 벌이나 새가 와서 먹고 간 것. "덜 익었다 싶어도 걔네가 쫀 건 다 익었어요. 고라니, 너구리도 포도를 좋아하더만요."

"한국 사람과 똑같이 일해도 하루 품값을 만 원씩 덜 줘요"

부부가 귀농할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 외국인을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주변에 결혼이민여성들이 제법 많다. 대부분 남편이 이미 농촌에서 농사짓는 상태에서 결혼한 경우다. 결혼이민여성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도 늘었다. 농가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농촌의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진 때문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도경미 씨는 일손이 부족해 이주노동자의 도움을 구하는 입장이면서도 이들을 불합리하게 대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한국 사람과 똑같은 일을 똑같은 양 해도 하루 품값을 만 원씩 덜 줘요. 한국 사람한테는 밥 꼬박꼬박 해 주면서 외국 사람한테는 다 도시락 싸 오라고 하고. 일이 서투르니까 돈을 덜 준다고 하면 차라리 기분이 덜 나쁜데, 외국 사람이라 무조건 똑같이 못 준다는 거예요. 나도 처음에 귀농해서 품 팔러 갔을 때 마지못해 주는 걸 표정으로 느꼈어요. 속으로 '더러워서 못 하겠다'고 생각했죠." 일은 시키고 품값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특히 6~7개월씩 장기적으로 사람을 쓰는 하우스 농장 같은 데는 일당이 쌓이면 큰돈이 된다. 전국적으로 한국에 산 지 10년 이상 된 결혼이민여성들의 모임이 있는데 이렇게 이주노동자에게 품값을 적게 주거나 주지 않는 경우를 서로 공유한다고.

국제앰네스티의 <고통을 수확하다: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착취와 강제노동>(2014)에 따르면 농업 분야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가 한국인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고도 "국적을 근거로 한 차별을 받았다"며, "우리는 120만 원을 받는 데 반해 한국인은 300만 원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또 국가인권위원회의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2013)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 161명 가운데 68.9%는 임금 체불을 경험했으며, 끝까지 임금을 받지 못한 경우도 32.9%나 되었다.

결혼이민여성에 대한 선입견 역시 흔하게 겪었다. "사람들이 농사 안 되는 건 모르고 '친정에 돈 다 보내서 없다'고 말해요. 오히려 친정에서 도움 받는 게 더 많은데... 아무리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아예 포기했어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결혼이주여성의 성공적 정착과 농촌의 지속가능한 다문화사회 구축방안 연구>(2011)에 따르면 "농촌의 결혼이민여성에게는 '못사는 나라 출신', '돈 때문에 온 사람'이라는 인식 등이 팽배해 있다"고 되어 있다. "고정관념에 따른 사고는 편견으로 이어지고 차별로 발전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배제와 폭력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에 경각심이 요구된다"는 보고서의 내용이 더욱 와 닿았다. 오늘날의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에는 결혼이민여성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식 변화가 우선적으로 포함돼야 하지 않을까? 그 일에 한살림이 앞장서야 하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도경미 씨. 이주노동자도 부부가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도경미 씨가 가장 좋아하는 농사일은 포도알 솎기. 나무 하나에 적어도 40송이가 달리니 송이마다 다 만져 주려면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한다.

남편과 공동체가 있어 든든해

도경미 씨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는 남편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신랑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 못 살았어요. 내 친구들 남편 중에는 밖에도 못 나가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무조건 밀어 줘요. 남편 아니었으면 이렇게 당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에 힘입어 1년간 다문화강사로도 일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위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현재 농촌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절반 정도가 다문화가정 자녀인데, 서로 다른 문화로 인해 갈등이 생긴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면 갈등이 조금이라도 없어지니까 다문화 이해 프로그램을 통해 갈등이 덜 생기게 하는 것"이라며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베트남과 한국 문화의 차이를 이야기해 주니 아이들이 친구를 이해하게 되더란다. 지금은 농사일에 집중하기 위해 그만뒀지만 보람된 경험이었다.

상주지역 다문화가정 모임을 만든 것도 조성이 씨. 도경미 씨가 남편에게 "모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이야기하니 일사천리로 진행해서, 일 년에 서너 번 부부 동반으로 모여 밥도 먹고 여행도 간다. 또 차 타고 5~10분 거리에 베트남 출신 친구들이 여럿 살아 종종 만나는 덕분에 많이 외롭진 않다.

도경미 씨가 외롭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한살림 공동체 덕분. "한살림 생산자로 살면서 가장 좋은 건 우리 공동체에요. 내가 인복이 있나 봐요. 우리 공동체 분들은 나를 외국 사람이라고 따돌리거나 그런 것 전혀 없이 많이 가르쳐 주고 도와줬어요. 내가 막내예요. 원래 막내가 설거지해야 하는데 나한테 설거지도 안 시켜요. 그분들이 옆에서 도와줬기 때문에 그나마 제가 지금까지 해 올 수 있었어요." 지난해에는 한살림 여성생산자 연수에도 참가했다. "처음엔 잘 몰라서 안 가고 싶었는데 남편이 한번 가 보라고 권유해서 갔어요. '나 빼고 다니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들 잘 챙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또 가고 싶어요."

남편 조성이 씨 역시 공동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엔 공동체 생활에 적응이 안 됐어요. 한 달에 한 번 회의하지 가을걷이 가야지, 해야 하는 게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성격이 바뀌더라고요. 내가 원래 내향적이고 혼자 책이나 보고 했는데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니 외향적으로 변하고 대인관계도 좋아졌어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돼서 좋아요."

수확한 포도 운반은 조성이 씨가, 포장은 도경미 씨가 맡는다. "지난해에는 8월 말에 출하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9월 초인 지금까지도 안 나가고 있어요. 앞에서부터 밀리고 밀리다 보니까." 포도 생산지마다 토양과 기후가 다르다 보니 이에 맞춰 한살림 포도는 충북 영동, 경남 거창, 경북 상주의 생산지 순서로 공급된다.

포도송이 하나하나 보살피며 고집스레 농사짓고 싶어

현재 부부는 문중 땅을 빌려 포도 약 1만6천529㎡(5천 평)와 벼 약 1만1천570㎡(3천500평)를 짓는다. "처음에는 기술도, 요령도 없으니 농사가 잘될 수 없었죠. 어른들 이야기 들어 보니까 십 년은 버려야 자리 잡는다는데, 우리는 이제 십 년째지만 아직 턱도 없어요." 2월 중순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쳐 낸 가지를 가루로 만들어 밭에 거름으로 주면서 한 해 농사를 시작한다. 3월 말이면 모판을 준비하고, 4월 중순에 들어서면 포도나무 껍질을 벗겨 벌레가 숨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11월까지 도경미 씨는 포도 순 따기와 일꾼 관리를, 조성이 씨는 토양 관리와 논물 대기 등을 맡아 쉴 새 없이 일한다.

조성이 씨는 무농약으로 포도를 기르는지라 포도에 병이 생기는 게 가장 겁나지만, 어느 때는 병이 와야 포도가 잘 익는다고 말한다. "병이 일찍 오면 잎이 다 떨어지고 방법이 없지만 늦게 오면 송이에 영향을 별로 안 미쳐요." 오히려 포도에 해를 끼치는 건 부부의 포도밭 뒤에 생긴 백두대간 등산로로 다니는 등산객들. 오며 가며 포도 서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줄기를 다 잡아당겨 뜯어 놓는다. "열매만 곱게 따 가면 양반"이라며, 어차피 가져갈 거면 조심히 잘라 가라고 가위도 달아 놨지만 소용없다며 허탈하게 웃는다. 어떻게 기른 포도인지 안다면 차마 그럴 수는 없을 텐데.

몸집이 작은 도경미 씨는 포도밭에 비가림막을 씌우는 게 제일 힘들다. "남들은 상자 밟고 올라가면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해도 키가 안 닿아서 그거 한 번 하고 나면 몸살 나요." 제일 무서운 건 뱀. "남편이 독사랑 그냥 뱀이랑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 줘서 이제 덜 무서워요. 한국엔 코브라같이 큰 뱀은 없으니까 장화 신으면 그나마 안심이에요. 베트남같이 더운 나라는 큰 뱀 있어요. 장화 신어도 못 당해요."

"몸이 힘든 것보다 무서운 게 더 힘들다"는 도경미 씨가 좋아하는 일은 포도알 솎기. 6월 10~20일 사이에 해야 포도송이가 예쁘게 자라고 맛도 좋아진다. "더 재밌는 건 포도송이에 봉지 씌우는 거예요. 봉지 씌우고 난 뒤 포도밭 밑에서 올려다보면 하얗게 학처럼 예뻐요." 그 덕에 손이 빨라진 도경미 씨는 품을 팔 때면 일당 대신 일한 만큼 값을 받는 이른바 '돈내기'로 더 많은 품값을 받는다. "예쁜 것도 보고 돈도 버니까 기분 좋아요.

일 끝내고 저녁 되면 피곤해서 '내일 안 가야지' 하는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면 또 신나게 가요." 이렇게 아등바등하며 농사지어 왔는데 막상 정부에서는 '2015년도 FTA 피해보전직불 및 폐업지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포도 농사 폐업을 유도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의 이행으로 과수·원예·축산 등의 품목을 재배·사육하는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품목에 대하여 농업인 등이 폐업하는 경우, 이를 지원하여 폐업농가의 경영안정 및 해당 품목의 구조조정"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를 대체할 작물이 딱히 없고, 다른 작물로 바꾼다 해도 이른바 '풍선효과'로 인해 해당 작물의 생산량이 급증해 가격이 폭락할 것이라는 게 조성이 씨의 말. "며칠 전에 지역 국회의원 간담회에 갔는데 마음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더라고요. 농촌 지역 국회의원이면 농촌을 잘살게 해야 하는데 한다는 말이 '대출 받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거예요. 하도 황당해서 그런 건 이야기 안 해줘도 알아서 다 한다고 했어요."

이런저런 풍파를 겪다 보니, 부부는 한살림 생산자로 살려면 무엇보다 '고집'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아직도 자리 잡는 중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유가 생겼어요. 비록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지만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계속 하고 싶고, 바꾸고 싶지 않아요."

헤어지면서 도경미 씨는 "한살림 내에 다문화가정 소모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 사는 것도 어려운데 거기에 더해 농촌에서, 다들 힘들다는 친환경·유기 농사짓는 '동지'들을 만나 마음을 나누고 싶은가 보다. "누군가 그랬어요. '한살림에 앞으로 들어올 결혼이민여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요. 우리 농사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아이들도 더 크고 나면 꼭 하고 싶어요.

귀농해서 남편이 건강해진 게 가장 좋다. "너무 착해서 탈"이라는 조성이 씨는 언제나 도경미 씨의 편. "결혼이민여성이 잘 정착하려면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남편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남편이 있어서 제가 여기까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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