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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대전제는 미·중 평화관계다

서독 브란트 정부도 독일 통일의 첫걸음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다는, 혐오스럽지만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동방정책을 폈다. 동방정책의 설계·집행자 에곤 바는 1970년 1월부터 5월까지 소련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9차례, 50시간 이상 힘든 협상을 벌여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소련 측이 독일 통일을 양해하는 이른바 '통일 서한'이라는 부속문서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낭만적인 자주통일의 환상을 버려야 한다. 동서독 국경선과 폴란드·독일 국경선 오데르-나이세가 모스크바 조약에서 처음으로 승인되었다는 사실은 미국과 중국의 동의와 협력 없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이 부동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ASSOCIATED PRESS

걱정을 동반한 예상과는 달리 김정은은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 전후에 핵실험도, 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았다. 당 창건 기념 열병식에 중국 공산당 서열 5위 류윈산이 참석한 것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김정은이 류윈산을 옆에 세워두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6자회담 중단, 북한의 2013년 2월 3차 핵실험 이후 냉랭하던 북·중 관계가 마침내 해빙을 맞는 반가운 신호로 보였다. 북·중 관계가 좋아야 북한이 도발행위를 덜 한다.

북한 파워 엘리트들의 망명설이 꼬리를 문다. 집권 4년차의 김정은의 통치기계의 나사가 풀리고 있어 보인다. 이런 국내사정을 감안하면 김정은은 핵·미사일 실험과 발사의 화려한 불꽃놀이로 당 창건 기념 행사를 장식해 권력층의 결속을 다지고 백성들에게는 최고지도자로서의 건재를 과시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답은 베이징과 워싱턴에 있다. 특히 베이징이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9월 25일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 두 사람은 북한 핵과 미사일을 긴급의제로 논의했다. 그건 북한에 노동당 창건 70주년에 핵·미사일 실험으로 주변 국가들뿐 아니라 국제사회를 도발하지 말라는 고강도의 경고 메시지였다. 오바마-시진핑 회담에서 오바마가 중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총력 견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수전 라이스도 9월 21일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중국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를 강조했다. 당연히 그것도 중국더러 북한을 견제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에 이틀 앞선 9월 19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도 9·19 공동성명 발표 기념 세미나에서 6자회담 참가국들은 유엔 헌장과 유엔 결의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것 또한 북한에 대한 경고 메시지였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심각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그것을 중국이 경고와 만류의 형식으로 북한에 전달한 결과 김정은이 핵·미사일 불꽃놀이 없이 열병식만으로 당 창건 기념잔치를 치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의 대전제는 미·중 간 평화관계다. 그것은 단순히 북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한정되지 않고 더 크고 높은 차원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정착, 궁극적으로는 남북한의 평화통일에도 해당된다. 중국이 미국을 서태평양에서 밀어내고 옛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되찾으려 하고, 미국이 1945년 이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누려 온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한 통일은커녕 지속가능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는 기대할 수가 없다. 이런 현실에서 자주통일론은 허구다. 상극하는 남북한의 두 체제가 하나로 수렴되려면 남북한의 사실상의 후견국가들이 지금의 대결 모드를 협력·평화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먼저다. 두 강대국이 대립·갈등하면 한국이 취하는 입장에 따라 남북관계도 덩달아 악화된다.

미국이 한국에 미사일방어(MD) 망에 들어와라, 사드(THAAD) 배치에 동의하라, 남태평양의 미·중 분쟁에 미국 지지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고 압박하는 한, 그리고 한국이 그런 요구의 하나라도 들어주는 한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협력은 증발되고 만다.

서독 브란트 정부도 독일 통일의 첫걸음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다는, 혐오스럽지만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동방정책을 폈다. 동방정책의 설계·집행자 에곤 바는 1970년 1월부터 5월까지 소련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9차례, 50시간 이상 힘든 협상을 벌여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소련 측이 독일 통일을 양해하는 이른바 '통일 서한'이라는 부속문서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낭만적인 자주통일의 환상을 버려야 한다. 동서독 국경선과 폴란드·독일 국경선 오데르-나이세가 모스크바 조약에서 처음으로 승인되었다는 사실은 미국과 중국의 동의와 협력 없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이 부동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중견국가 한국의 역할이 있다. 착실히 남북관계 개선을 축적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미국과 중국의 등을 상호협력과 동북아의 안정으로 떠미는 것이다. 고래 눈도 눈이고 새우 눈도 눈이다. 한국이 덩치는 작아도 팽팽하게 맞선 두 강대국 사이에서 동북아 안정에 주도적 역할을 할 만큼의 역량과 행동반경은 있다. 그러나 걱정이다. 오바마의 남중국해 관련 발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는 외교부 장관이 과연 동북아 차원의 전략적 큰 외교를 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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