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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를 위한 변명

진정한 보수는 통합을 지향하지만, 수구는 좌우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모든 정적을 '좌파'라고 부른다. "지금 대한민국 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집권당 대표의 발언은 수구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자기들보다 오른쪽엔 아무도 없으니까.

  • 김누리
  • 입력 2015.10.26 10:24
  • 수정 2016.10.26 14:12
ⓒ연합뉴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보며 이 땅의 보수가 참 딱하다는 생각을 한다. 보수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들이 '보수' 행세를 하며 보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보수'였던 김구 선생이 오늘의 현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을 경시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어하실까?

보수란 무엇보다도 역사의 진실을 존중하고, 민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자는 보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친일, 독재의 과거를 미화하려는 자가 보수일 수는 없다. 민족 통일과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끊임없이 남북 대립과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자가 보수일 수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역사의 진실을 두려워하고, 민족의 이념을 도외시하는 보수는 없다. '역사'와 '민족'은 보수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보수'라고 불리는 집단은 사실은 보수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는 수구다.

수구란 낡은 질서와 외세에 의존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집단이다. 무능과 부패,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수구에게 역사의 진실이나 민족의 장래는 남의 일일 뿐이다. 한국 보수의 비극은 진짜 보수가 '암살'당한 자리를 수구가 꿰차고 앉아 보수를 참칭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가치가 실현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수구가 현대사를 지배해온 결과 한국의 정치지형은 연쇄적으로 왜곡되었다. 수구가 '보수'를 자처하고 나서자, 보수가 '진보'라고 불리게 되었고, 또 진보는 '급진'이라고 불려온 것이다.

세계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 정당들은 모두 한발짝씩 더 왼쪽으로 명명된 좌칭(左稱) 정당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역사와 민족 문제에 있어서나, 경제, 노동, 복지 정책에 있어서나 그들은 서구의 보수정당에 가깝다. '정의당'도 서구 정당과 비교하면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다. 독일과 비교해보면 한국 국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의당'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보다 보수적이다. 이처럼 한국의 정치지형은 극도로 우편향되어 있다. 이런 우편향 정치구도는 지난 70년간의 냉전체제와 반공주의가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쓰라린 상처이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수구 지배질서가 왜곡시킨 것은 정치지형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한국인의 의식을 심각하게 불구화시켰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권위주의와 '내면의 파시즘', 폭력문화와 졸부문화, 기회주의와 한탕주의는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와 미덕마저 실종된 수구사회의 비루한 현실을 증언한다.

진정한 보수는 통합을 지향하지만, 수구는 좌우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모든 정적을 '좌파'라고 부른다. "지금 대한민국 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집권당 대표의 발언은 수구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자기들보다 오른쪽엔 아무도 없으니까.

한국 사회가 오늘날 '헬조선'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수구 지배의 결과이다.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 '좋은 보수'가 지배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과 양극화, 비민주적 경제구조, 부와 권력과 기회의 독점현상, 심화되는 남북갈등은 보수로 가장한 수구가 그려낸 이 땅의 지옥도이다.

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우편향된 정치지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의 퇴물인 수구는 무덤에 묻고, 보수는 보수답게, 진보는 진보답게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내년에는 총선이, 후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다. 헬조선의 감옥에서 탈출할 키는 '내 손안'에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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