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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수뇌부에서 암약(暗躍)한 북한 간첩?

6.25 개전 초기 국군의 모든 삽질(쿨럭;)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즉 전 장병의 절반을 휴가 보내어 전선을 텅 비게 하고,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묵살하고, 남침 전야를 만취하여 댄스파티로 지새워 6.25 당일 늦잠을 잤으며, 대통령에게 초기 전황을 거짓 보고하고 국군과 국민을 버리고 한강인도교를 끊은 자는, 이 모든 일에 명령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할 군 수뇌부 인사는 단.한.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 바베르크
  • 입력 2015.10.26 11:34
  • 수정 2016.10.26 14:12

6.25 초기 우리 국군은 북한의 소위 인민군에게 너무나도 맥없이 무너졌다. 그 원인으로 많이들 드는 것들은, 북한군의 병력이 우리의 두 배나 되었고, 북한은 소련이 넘겨 준 탱크 등 신형 무기들이 있었으며, 중국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선족 2개 사단을 투입한 데 비해, 남한은 병력도 북한에 비해 절대 열세였고, 미국이 무기를 제대로 주지도 않았으며 훈련도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 서울을 개전(開戰) 사흘만에 빼앗겼고,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고도 한참 후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리다 겨우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전쟁 개전 초기 국군은 북한의 이른바 인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는가? 이에 대해 저명한 한국전쟁 연구서를 펴낸 박명림 교수님([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과 정병준 교수님([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은 각각의 저서에서 충격적인 음모론을 하나 소개하신다(음모론이라는 표현을 필자가 쓴 것은 두 분 교수님께서 이 주장을 소개하시나 신뢰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며, 필자 역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국군 수뇌부에 침투한 북한 간첩, 즉 북한군이 남침할 수 있도록 38선을 활짝 열어 준(개문(開門)) 자가 우리 국군 고위부에 침투해 있었기에 북한은 대한민국을 거의 멸망지경에까지 몰아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이 음모론은 과연 사실일까?

이 음모론 제기론자들이 얘기하는 국군 수뇌부 깊숙이 박혀 있던 북한 간첩이 누군지는 차차 밝히기로(응?) 하고 우선 통념과는 달리 6.25 때 국군이 그렇게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보는 이유 다섯 가지를 아래에서 하나씩 차례로 살펴 보기로 하자.

첫째, 북한의 소위 인민군의 병력은 당시 20만명이지만, 국군은 10만명이었다. "음 그렇다면 소위 인민군에 비해 우리 국군의 병력이 절반 밖에 안 되는 2 대 1의 절대적 열세이니 우리가 절대 불리했겠군"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 그런데 원래 전쟁에서는 공격측의 병력이 방어측의 3배가 되어도 즉 공수가 3 대 1의 비율이어도 방어측이 큰 무리 없이 방어를 할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보지 않나? 즉 보통은 공격측이 세 배가 훨씬 넘는 병력으로 공격해야 수비측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보기에 사실 2 대 1 정도면 우리 국군이 충분히 적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음모론자들이 제기하는 첫번째 반역의 증거를 만나게 된다. 비록 2 대 1 열세지만 그럭저럭 북한의 남침을 막을 수 있었던 한국군의 병력 중에 어찌된 일인지 운명의 날인 1950년 6월 25일에 농번기라며 절반(?) 가량의 장병들이 휴가를 떠난 상태였던 것. 그래서 2 대 1이었던 싸움은 갑자기 4 대 1이 되어 버려서 공격측의 절대적 우세인 상황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미 38선상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던 긴장 고조 상황에서 전 장병의 반이 왜 때문에 갑자기 휴가를 간 것일까?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당시 국군 수뇌부에 깊숙이 침투했던 북한 간첩이 북한군의 절대적 우세 상황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 교묘한 공작을 펼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

도대체 전 장병의 절반을 한꺼번에 휴가 보내는 결정은 누가 내렸을까? 어쩌면 그 자가 진정 반역자가 아닐까?

만약 전 장병의 상당수가 6.25 개전 당일 휴가를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전쟁의 상황은 달라졌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뜻밖의 대조실험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 남침한 세 갈래의 북한군 중에서 동부전선으로 쳐들어 온 소위 인민군이 동부전선을 지키던 우리 국군에 의해 격퇴되어 상당기간 남진이 저지 되었던 것. 그런데 이 때 동부전선을 지키던 제6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셨는지, 상부(응?)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휘하 장병들을 무조건 휴가 보내지 않고 통상적인 휴가 장병만 조치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남겨 놓고 전선을 지키고 있었던 것.

물론 동부전선에서의 아군의 초전(初戰) 선전(善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서울향(向) 나머지 2개 축선에서도 그저 통상적 병력 수준만 동부전선처럼 유지했어도 전쟁 초기의 양상은 분명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서울이 사흘 만에 함락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여간 불행 중 다행으로 동부전선의 아군이 꿋꿋하게 북한군의 남침을 상당 기간 막아 준 덕분에 당초 동부전선을 돌파해 서울을 남쪽에서 포위하여 국군의 주력을 섬멸하겠다는ㄷㄷㄷ 북한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게 북한 의도대로 구현되었다면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국군은 전멸하다시피 하여 전쟁은 더 볼 것도 없었을 것이다.

누구인가? 전선의 사단장에게 장병 휴가령을 내린 이는? 그의 명령이 모조리 집행되었다면 전선의 국군이 반 이상 비어 있는 상태에서 국군의 주력은 전멸되었을 것이다. 6.25 개전 직전의 휴가령은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둘째, 우리는 흔히 1950년 6월 25일의 북한의 남침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깜깜무소식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과연 북한의 남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일까? 여기서 우리는 뜻밖의 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청년장교 김종필과 문관 박정희. 그래,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박정희김종필이다. 이들은 6.25 개전 직전에 북한의 동향을 주시하고는 남침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를 상부에 올린다. 그리고 6.25 당일 예정된 휴가를 연기하거나 취소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그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전 장병 상당수의 휴가를 강행한다.

누구인가? 전쟁 발발 직전에 적이 침략해올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묵살하고 전선의 장병을 반 이상 고향에 돌려 보낸 이는? 그저 그는 무능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자였을까? 아니면 실은 북한의 간첩이면서 우리 군 수뇌부에 침투해 북한의 남침 전략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묵살하고 작전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게 하였던 것일까?

셋째, 이제 개전 직전 또 하나의 어이 없는 광경을 살펴 보자.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저녁, 육본 내의 북한 남침 임박 보고를 묵살한 국군 수뇌부는 미군 군사 고문단과 함께 댄스파티(뭐래니?)를 즐긴다. 그날 밤 늦게까지 국군 수뇌부는 만취하였고 이튿날 새벽 4시를 기해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해 왔을 때 국군 수뇌부는 전날 밤 마신 술도 제대로 깨지 않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_-; 국군 수뇌부가 적이 기습공격한 전날 대취하여 늦잠을 자며 허둥지둥 적의 공격을 맞이했던 것은 과연 우연일까?

그가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일까? 아니면ㄷㄷㄷ 그는 속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고위 장성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고 아리따운(쿨럭;) 여인들과 댄스파티를 즐기게 만들어 놓고서는 초조하게 평양에서 공격명령이 내려질 시간을 기다렸던 것일까? 그는 과연 누구일까?

넷째, 반 이상의 장병들이 휴가를 갔고 수뇌부는 술이 덜 깨어 늦잠을 자다가 허둥지둥댔지만 기이하게도 대통령에게 북한의 남침을 보고하는 국방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들은 국군이 소위 인민군을 맞아서 잘 싸우고 있으며 (북한군을 격퇴해 38선을 돌파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다. 이들의 말을 철썩 같이 대통령은 믿었고, 신문에는 국군이 북한의 황해도 해주에 이미 돌입했다;는 오보까지 났다. 그러나 국군의 해주 돌입은 개뿔이고;; 아까 살펴 보았듯이 동부전선을 제외하고는 국군은 소위 인민군에게 유린당했고 무너져 내렸다. 의정부 같은 서울 북부의 경기도에서 피난민이 서울 시내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국군은 휴가장병들은 속히 부대 복귀하라는 거리 방송이나 속절 없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인가? 대통령에게 전황을 거짓 보고하고 국민을 현혹시킨 자는? 이들은 정말 여태까지 알려진 대로 그저 무능하고 노답이어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늘어 놓았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다섯째, 이상한 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북한군의 초기 기습이 성공했고 국군이 동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무너지고 있으며 부상병들과 피란민들이 서울 시내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서울시민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당시에 한강의 남북을 잇는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였던 한강인도교로 몰려 들었다. 그리고 초반에 밀린 국군은 그래도 한강 이북 곳곳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국군의 주력 부대 상당수가 한강 이북에 남아 있고 엄청난 수의 피란민들이 한강인도교를 실제로 건너는 중에 (심지어 이시영 부통령의 차도 불과 1분 전인가에 통과했었다!) 한강인도교는 육군 수뇌부의 명령으로 폭파된다. 당시 한강을 건너던 무고한 시민들은 아무런 사전 경고 없는 이런 다리 폭파로 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강 이북에서 열세 속이나마 열심히 교전 중이던 우리 국군 상당수는 이제 퇴로가 끊겼고 결국 북한군에게 소탕되고 만다.

누구인가, 이 어처구니 없는 한강 인도교 폭파명령을 내린 자는?

1950년 7월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이미 폭파된 다리가 한강 인도교다.

실은 우리는 이 모든 질문의 답들을 잘 알고 있다. 6.25 개전 초기 국군의 모든 삽질(쿨럭;)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즉 전 장병의 절반을 휴가 보내어 전선을 텅 비게 하고,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묵살하고, 남침 전야를 만취하여 댄스파티로 지새워 6.25 당일 늦잠을 잤으며, 대통령에게 초기 전황을 거짓 보고하고 국군과 국민을 버리고 한강인도교를 끊은 자는, 이 모든 일에 명령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할 군 수뇌부 인사는 단.한.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그저 부패와 무능의 소치라고만 하기에는 아군에겐 치명적이고 적을 대단히 이롭게 만들었던 당시 국군 수뇌부의 총책임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정말 부패하고 무능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구슬들을 다 줄에 꿰어가며 살펴 보았듯이 숨겨진 의제(agenda)를 가지고 그의 진짜 주인의 명령에 몰래 따른 것일까?

그는 당시의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이다. 일본군 하급 병기장교 출신의 뚱뚱하고(쿨럭;) 무능하고 부패한 노답인 허풍쟁이 채병덕. 오랫동안 아까도 얘기한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 먹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로 조롱거리가 되었던 이이다. 채병덕은 한번도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증거도 없었고 북한과의 연계가 드러났다는 얘기도 없었다. 하지만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만약 그가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어 북한 간첩이었다면, 그의 전쟁 초기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잘 설명이 된다. 아니 그보다 더 완벽하게 북한을 위해, 개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 장병의 절반을 휴가 보내고, 남침이 임박했다는 부하들의 보고를 묵살하고, 수뇌부를 한꺼번에 이끌고 술을 처마시고 오입질을 했으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그나마 남은 주력부대마저 전멸하다시피 하게 만들었던 게 모두 이자 채병덕 책임이었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무능하고 썩어빠진 장성이 유물론자이며 공산주의자라고 믿을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가 간첩이라면 정말 완벽한 위장이 아니었을까?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일까? 그러나 역사상 비슷한 선례들이 없지 않았다.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 중에도 무능하고 부패한 국부군(國府軍) 장성으로 미군 장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이가 실은 공산군의 간첩이었고 모택동이 승리한 후 모택동으로부터 큰 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시리아 정부에서 국방차관으로까지 거명되던 이가 실은 이스라엘의 스파이로 판명된 일도 있었다. 음모론자들은 묻는다. 우리라고 예외란 법이 있는가?

그럼 채병덕을 잡아서 족쳐 보면 될 일 아니었겠는가? 채병덕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대삽질을(아니면 반역행위를?) 하고 채병덕은 해임된다. 그리고 그는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이로는 이례적으로 진주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거기서 "전사"한다. 체스터튼은 브라운 신부 씨리즈 중 하나에서 브라운 신부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인한) "시체를 숨기기 제일 쉬운 곳은 전쟁터이다." 진실은 저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채병덕이 북한의 간첩이든 아니든지 간에 채병덕이 6.25 초기에 한 처사는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나라를 존망의 위기로 몰아 넣은 어처구니없는 무능의 소산이었다. 차라리 채병덕이 실제로는 무능하지 않으면서 의도적으로 다른 주인을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 채병덕의 위신을 구출해 주는 면까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채병덕과 같은 사례는 과연 과거의 일일 뿐일까? 최근에 미국은 이전해 줄 꿈도 꾸지 않은 군사기술이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 명백해진 다음에도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외교안보 참모진의 행각이 드러났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은 이 자들은 반역자에 못지 않게 앞에서 살펴 본 채병덕의 행태를 닮은 짓을 저지르며 진정으로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이 아닐까? 이 자들에 대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엄정한 조치가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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