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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이 전부인 게임 : 『원아웃』

『원아웃』은 처음부터 기존 야구만화의 안티테제를 목표한 작품이다. 작가 카이타니 시노부가 말하는 『원아웃』과 다른 야구만화의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 첫째, 주인공 투수는 절대 강속구를 던지지 않는다. 둘째, 노력이나 근성만으로 승리를 따낼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주인공이 악당'임을 꼽고 있다. 시합은 개인의 출중한 운동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두뇌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카이타니 시노부(甲斐谷忍) | 슈에이샤(集英社) / 대원씨아이 | 1998년 연재 시작 | 20권

야구는 스포츠 중에서도 변종에 가깝다.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이기고, 가장 무거운 역기를 든 사람이 승리하는 스포츠와는 근간부터 다르다. 시속 100km도 되지 않는 느린 공으로도 타자를 돌려세울 수 있고, 발이 느린 타자도 얼마든지 득점할 수 있다. 100m짜리 홈런이든 비거리 160m의 초대형 홈런이든 주자의 상황에 의해 점수가 더해질 뿐, 모두 동일한 1점의 가치를 갖는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스포츠의 절대 원칙이 반드시 적용되지 않는 경기, 그것이 야구다.

『원아웃』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상대로 벌이는 타자와의 단타석 승부 '원아웃' 게임에서 불패를 자랑하던 도박야구의 기린아 토쿠치 토아의 일본프로야구 정복을 그린 작품이다. 『라이어 게임』으로 잘 알려진 작가 카이타니 시노부가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비즈니스 점프』에 연재한 이 작품은 백전백승의 이단아가 펼치는 필승의 게임을 통해 본래부터 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야구라는 '게임'의 기기묘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우선 만화의 근간을 이루는 주인공 토아의 계약부터가 심상치 않다. 공식게임에서 아무런 기록도 없는 그가 프로야구 구단과 맺은 계약은 일반 연봉계약이 아닌 '원아웃 계약'. 즉, 토아는 투수로서 아웃 카운트 한 개를 잡을 때마다 구단으로부터 500만 엔을 받는다. 반대로 1실점 할 때마다 그는 구단에 5,000만 엔을 상환해야 한다. 이 계약에 의하면 평균자책점 2.7의 리그 최고 성적을 올린다 하더라도 토아의 연봉은 고작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에 머물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토아가 160km대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일까? 절대 아니다. 그의 최고구속은 120km 내외. 그렇다고 변화구에 능한 것도 아니어서 던질 수 있는 구종은 오로지 직구뿐이다. 말하자면 토아는 웬만한 고등학생 투수보다도 못한 선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토아는 매 경기 어마무시한 난관과 맞닥뜨리면서도 리그 최하위 리카온즈를 늘 승리로 이끈다. 그의 강점은 운동능력이 아닌, 뛰어난 제구력과 타자의 머릿속을 휘젓는 초인적인 심리전, 그리고 열 발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에 있었던 것. 뒤늦게 토아의 승부사 기질을 간파한 리카온즈의 구단주는 원아웃 계약서에 토아에게 불리한 사항들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토아가 불리할 만한 시합은 지급 배율을 20배로 변경하고, 강제로 연전연투하게 하거나, 실점 상황에는 무조건 토아를 마운드에 올리며 계속해서 압박한다. 하지만 토쿠치 토아는 이조차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매 경기 생각지도 못한 수를 발휘하며 전리품으로 막대한 연봉을 쌓아나간다.

무섭긴 하지만 어쨌든 야구선수 입니다. 애니메이션 버전 '원아웃'의 토아.

『원아웃』은 처음부터 기존 야구만화의 안티테제를 목표한 작품이다. 작가 카이타니 시노부가 말하는 『원아웃』과 다른 야구만화의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 첫째, 주인공 투수는 절대 강속구를 던지지 않는다. 둘째, 노력이나 근성만으로 승리를 따낼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주인공이 악당'임을 꼽고 있다. 시합은 개인의 출중한 운동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두뇌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또 야구 규칙의 세부 조항을 폭넓게 활용함으로써 이제까지 야구를 다룬 기존 작품들이 그다지 눈 여기지 않았던 사인 교환이나 사인 훔치기, 선수 매수, 반칙볼 등 정정당당한 스포츠라는 허울 아래 숨죽이고 있던 '오로지 이기기 위한 승부'에 초점을 맞추며 색다른 재미를 이끌어낸다.

물론 그 중심에는 주인공 토쿠치 토아가 있다. 『원아웃』의 관건은 3경기 연속 선발등판하거나, 상대팀의 득점권마다 1루수에서 구원투수로 동원되는 상식 밖의 위기상황에 등판해 120km의 공으로 타자를 농락하고 연봉을 높여가는 토아의 천재적인 지략에 있다. 같은 팀 선수를 괴상한 방법으로 독려하고, 상대팀의 불화를 조장하며, 잘못된 정보를 흘려 적의 계략을 뒤집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자 하는 프로야구의 근원적 속성이자 이 작품의 뿌리 역시 여기서 시작한다. 이는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르며 허무맹랑하게 휘던 '마구'가 보여주지 못한 지점인 동시에 불같은 강속구를 앞세워 홀로 게임을 지배하는 여타의 '히어로물'과도 전혀 다른 지점이다. 야구 마니아조차 이런 조항이 있었나 싶은 세밀한 규칙, 1점을 보태기 위한 첨예한 작전의 대립, 야구라는 판 위에 짤 수 있는 흥미로운 가정들과 프로야구라는 거대 비즈니스의 이야기까지. 토아가 프로야구를 무대로 펼치는 새로운 면모들은 이제껏 야구만화들이 간과하고 있던 지점에 움터 마침내 기존 야구만화들이 집중하고 있던 것들을 완전히 전복한다.

세련되지만 비교적 단순한 그림체, 스포츠만화의 중심이 되어야 할 역동적인 운동감을 연속동작으로 묘사하는 대신 과감한 구도의 컷 몇 개로 완성하는 연출은 스포츠라기보다는 심리전을 그리는 『원아웃』의 방식에 더없이 잘 들어맞을 뿐 아니라 작품의 강점까지 그대로 대변한다. 카이타니 시노부는 일본프로야구 양대 리그 중 6개 팀으로 구성된 퍼시픽리그를 다루며 각 팀마다 뚜렷한 색채를 부여하고 팀의 대표 캐릭터 역시 다채로운 성격을 부각시켜 구상화함으로써 게임의 형태와 상황 역시 현실감 넘치게 구현한다. 그의 대표작 『라이어 게임』이 흥미로운 도박 게임을 설계한 후 생각지도 못한 '필승법'을 찾아가는 데 있는 것처럼, 수많은 변수를 통제하며 설득력 있는 단순화로 관전 포인트를 압축하는 『원아웃』의 구성은 명불허전이다. 베이스간 거리인 27.43m를 쾌속으로 질주하는 육상선수가 토아의 느린 구속을 염두에 두고 매번 홈스틸을 감행한다면? 우천으로 경기가 중단될 상황에서 빠르게 노게임을 선언하는 방법은? 반대로 비가 더 오기 전에 게임을 성립시켜 승리하려면? 여기에 승부사 토아의 기책과 인간 심리의 미묘한 지점들까지 더해지면 사랑이나 우정 한 줌 없이 그저 이기는 것만을 전제로 치고받는 프로야구의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워진다.

"NOBODY WINS, BUT I !'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막대한 연봉을 챙긴 토아가 재정 위기에 빠진 리카온즈를 인수해 선수 겸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이야기는 자연히 프로야구산업이라는 거대 비즈니스 세계로 도약한다. 일개 선수가 구단주로 취임하자 퍼시픽리그 구단주들간의 알력 다툼을 시작으로 자본의 논리만이 우선되는 상황이 연이어지고, 리카온즈의 새 구단주 토아는 이를 타개하고자 'L티켓'이라는 제도를 도입해 구단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한다. L티켓은 일반 입장권의 1.5배의 가격이지만, 만약 리카온즈가 게임에 패배할 경우 구매자에게 전액 환불된다. 또한 L티켓에 붙어있는 투표용지인 'MVP티켓'은 그대로 선수들의 연봉으로 환산된다. 즉 선수들은 게임에서 지면 한 푼도 못 받지만, 이길 경우 MVP티켓의 투표수에 따라 그날 수익을 분배받는 것이다. 여기서 토아가 그리는 그림은 분명해진다. 토아가 말하는 팀워크란 남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팀원 전체가 갖는 것이다. 매 게임 승부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이기기 위한 통찰력을 설파하던 그의 철학은 MVP티켓 챕터에서 정점을 찍으며 패배주의에 찌들어있던 리카온즈의 구성원들에게 알알이 스민다. 노력과 근성으로 승리를 쟁취하던 여타 야구만화의 뭉클한 감동과는 분명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이다.

정정당당한 스포츠가 아닌 갬블, 그리고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갖고 패배한 자는 모든 것을 잃는 프로의 법칙 위에 싹을 틔운 『원아웃』의 세계는 사실 실재하는 우리들의 정글 그 자체이기도 하다. "프로야구선수란 야구를 하는 게 직업이 아니야. 이기는 게 직업이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게 너무하다고? 너 지금까지 자기 운명을 바꾸기 위해 대체 뭘 해왔는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움직이면 반드시 뭔가가 변하지." 승부와 마주하는 토쿠치 토아의 주옥같은 말들은 그 어떤 힐링이나 위로보다도 강력한 것으로 단순히 리카온즈 팀원들만 뜨끔한 것은 아닐 게다. 토아의 지략도 지략이지만, 야구만화 『원아웃』의 특별한 정수, 즉 오로지 승리만을 좇는 토아의 철학은 매일매일 승부와 마주하는 현대인의 강박을 거울처럼 아프게 비춘다.

글_ 강상준/프리랜스 라이터 겸 프리랜스 편집기획자

* 이 글은 에이코믹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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