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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 두 달 전 세상을 떠났다

  • 김도훈
  • 입력 2015.10.22 06:45
  • 수정 2015.10.22 07:01

한국 미술사의 가장 화려하고 강건한 이름이 졌다. 조선일보는 10월 22일 "천경자(千鏡子·91·사진) 화백이 두 달 전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와 통화로 사망 여부를 알린 맏딸 섬유디자이너 이혜선(71)에 따르면 천경자 화백은 2003년부터 뇌출혈로 투병하다가 지난 8월 6일 사망했다. 장례는 극비리에 뉴욕의 성당에서 치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천경자 화백의 생존 여부는 그간 미술계와 언론의 커다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연합뉴스에 의하면 이혜선씨는 이미 8월 중순 한국으로 들어와 천경자의 유골을 들고 그림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을 잠깐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천경자 화백의 죽음이 두 달이나 늦게 알려진 이유는 그 유명한 '미인도 위작사건'이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혜선씨는 조선일보에 "어머니나 나나 생사 논란, 위작 논란 등으로 맘고생이 심해서 (사망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위작 논란에 휩싸였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인도'

미인도 위작 논란은 지난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두고 천경자 화백이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한국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논란 중 하나다. 작가의 위작 의혹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 등은 최종적으로 진품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천경자 화백은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1998년 작품 98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종종 '한국의 프리다 칼로'라는 거친 표현으로까지 숭배를 받기도 하는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6세이던 1940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당대의 예술가로 칭송받았으며, 김환기, 박경리, 고은 등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시인 고은은 천경자에 대해 "그는 그것밖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천형(天形)의 예술가"라고 표현한 바 있다.

천경자 화백은 사망했지만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아직도 살아있다. 아래는 작가 박경리가 쓴 시 '천경자를 노래함'이다.

천경자(千鏡子)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다.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명동시절이나

이십 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을 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그의 언어를

시적(詩的)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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