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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BP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이렇게 왜곡했다

  • 허완
  • 입력 2015.10.22 06:38
  • 수정 2015.10.22 06:40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교수의 저서 국내 번역본(<위대한 탈출>)을 둘러싸고 적극적인 왜곡·오류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해당 출판사인 한국경제신문 한경비피(BP)가 기술적인 누락을 인정하면서도 “왜곡 의도나 시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 삭제된 부분을 되살려 개정판을 내겠다고 밝혔다.

한경비피는 20일 오후 자사 블로그에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 번역 왜곡 논란에 대한 출판사의 입장’을 올리고 “논란이 된 머릿말(Preface)과 서론(Introduction)을 프롤로그로 합친 것은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고 싶었던 편집상의 문제였다”며 “앵거스 디턴 교수에게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부제는 원제 그대로 살리고, 빠진 부분을 되살려서 완역본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경BP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심증을 더욱 짙게 하는 이 번역본의 문제가 새로 드러났다. 머릿말과 서론 뿐 아니라 원본 저작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제5장에서도 어떤 일관된 의도가 작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누락·왜곡 대목이 여럿 발견된 것이다. 이는 한경BP가 밝힌 ‘통상적인 변형’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디턴 교수의 본래 주장과 취지를 왜곡하는 ‘지적 사기’가 번역본 전체에 걸쳐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는 19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번 번역본 문제를 최초로 제기했던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 한경BP의 ‘입장’ 발표 이후 제5장 내용을 원본과 번역본을 꼼꼼히 대조해가며 추가로 의혹을 제기하는 글이다. / 편집자 주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프린스턴대·경제학)의 <위대한 탈출> 번역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가 있은 뒤 만 이틀이 더 지나서야 한국경제신문BP(이하 한경BP)에서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애초 나의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한경BP가 디턴 교수의 책을 출판하면서 원문의 상당 부분을 생략하고 구성에 변형을 가했다는 것이다. 한경BP는 책의 부제목을 멋대로 바꾸고 본문의 부·장·절의 제목과 구분을 변경하였으며 원문의 ‘Preface’를 뺀 동시에 ‘Introduction’은 크게 축약하였다.

둘째, 이러한 변형의 결과 디턴 교수의 취지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왜곡을 크게 두 측면에서 지적하였다. 첫째, <위대한 탈출>을 부와 보건·건강 두 가지에 관한 이야기로, 즉 부와 함께 보건·건강을 <위대한 탈출>의 동등한 양축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이 디턴 교수의 의도임에 비해, 한경BP가 내놓은 한글판에서는 보건·건강에 대한 강조가 다소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위대한 탈출>은 ‘탈출’ 그 자체뿐 아니라 탈출한 극소수를 제외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것이기도 한데(디턴은 남겨진 이들에 대한 고려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로 탈출한 사람들도 언제고 다시 붙들려올 수 있다는 점을 든다), 한경BP의 ‘editorial change’가 가해진 결과 강조점이 ‘탈출’로 쏠려버렸다는 점이다. 요컨대 한경BP가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라는 전혀 엉뚱한 구절로 대체해놓은 원래의 부제목 ‘건강과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Health, Wealth, and the Origins of Inequality)는 이상의 두 가지를 매우 축약적으로 담고 있었던,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던 셈이다. 만약 이것이 한경BP의 해명대로 그들의 통상적인 ‘editorial change’라면, 그들의 편집솜씨는 그야말로 형편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의 문제제기에 대한 한경BP의 입장문은 크게 사과와 해명, 그리고 결백주장으로 나뉜다. 먼저 위의 첫 번째 문제, 즉 한경BP가 디턴 교수의 원저작을 훼손하였다는 문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경BP가 이에 대해 사과하고 책을 원래 형태로 복원해 조속히 완역본을 준비하겠다고 한 것은 당연하고도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문 어디에도 ‘불량품’을 마치 양품인 양 버젓이 판매하고 이 사회의 여론과 담론장을 혼란케 한 데 대한 반성이나 구체적인 피해보상 계획은 없다. 한경BP는 이쯤에서 문제가 마무리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한경BP는 원저작의 변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정당한 편집권의 행사였으며, 왜곡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경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꿰뚫어볼 능력이 내겐 없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원문의 왜곡 결과 책의 내용과 저자의 취지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이러한 훼손의 정도와 양상을 가지고 그들의 ‘편집의도’를 미뤄짐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애초 지적했듯이, 나는 그들이 단순히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또는 “편의성을 위해” 원문을 줄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거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과연?) 편집자─그것도 저자와 직접 교감하는 원출판사가 아닌 일개 번역본 출판사의 편집자(!)─마음대로 중복 부분을 빼거나 하는 게 정당화된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내용을 반복한다는 것은 저자가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차차 드러나겠지만, 한경BP가 뺀 내용 중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정말 그들 말대로 빠져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저자의 논지 이해해 필수적인 구절들, 문단들도 적지 않다. 저자의 익살이 깃든 부분을 빼기도 했다. <위대한 탈출>이 다소 딱딱한 교양대중서임을 고려하면, 이는 독자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일 것이다.

먼저, 어떻게 보더라도 <그림 1>과 같이 한경BP가 부·장의 제목은 물론 편성까지 바꾼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실익이 있는가? 독자들은 원래의 구성과 제목이 혼란스러운가? 내겐 한글판 제목들이 난잡하게만 보인다. 여기엔 그저 원문의 심각한 훼손이 있을 뿐이다. 보다시피 원문에서 1부와 2부는 저자가 <위대한 탈출>의 두 축으로 삼는 건강과 부라는 두 주제를 병렬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진보뿐 아니라 퇴보에도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특히 건강과 부의 진보가 각 영역에서의 불평등을 낳는 원인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인류의 건강은 크게 증진했지만 그럴수록 건강불평등이 커지는 경향도 있으며, 역시 오늘날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소득불평등의 양상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통찰이 여기에는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남겨진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생각을 별도의 부와 장을 할애해 다루고 있다.

<위대한 탈출>의 전체 목차: 원문과 한글판 비교

이에 비해 한경BP에서 나온 한글판의 편성은 1부와 2부가 마치 순차적인 연결고리를 갖는 것처럼 되어있다. 즉 인류의 역사는 먼저 질병에 의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건강으로, 그리고 물질적 빈곤으로부터 풍요로의 순차적인 ‘대탈출의 역사’라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뒤쳐진 사람들도 일부 있으니, 그들을 돕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제3부가 붙어있다. 물론 이러한 극적인 전환은 부의 제목을 바꿈으로써 가능해졌다. 한글판에서는 1부는 죽음으로부터의 대탈출, 2부는 가난으로부터의 대탈출! 단순히 부의 제목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의도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이제는 좀 더 시야를 좁혀보자. 애초 한경BP는 앵거스 디턴의 책을 왜곡된 형태로 냈고, 이에 기반해서 한국경제신문자유기업원에 연계된 우파 지식인들은 ‘디턴 vs 피케티’라는 왜곡된 대립구도를 설정해 대중을 속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소득과 부의 추이를 다루는 <위대한 탈출>의 5장은 각별한 고찰대상으로 삼을만하다.

<위대한 탈출>의 제5장 세부 구성

위 <그림 2>는 한경BP가 <위대한 탈출> 제5장의 장·절 구성과 제목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먼저 장의 제목을 바꿨다. 한눈에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었음이 드러난다. 원문의 ‘미국에서 물질적 풍요(wellbeing)’는 특히 그 아래 있는 절들을 봤을 때 ‘오늘날 대표적인 선진국 미국이 겉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어두운 이면도 있으며, 이러한 미국이 누리는 풍요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겠다’라는 의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글판의 ‘물질적 웰빙에 변혁을 가하다’라는 제목이 이러한 이중적 과정을 나타내기에 적합한가?

장 제목의 왜곡효과는 절의 구성과 제목 변경으로써 보완되고 강화된다. 원문은 미국의 경제성장-빈곤-소득분배를 순차적으로 살핀 뒤, 불평등의 원인을 일(직업 간 격차 등), 정치, 가계구성 등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고찰한다. 특히 디턴은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이나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등이 그의 ‘숙적’으로 내세우는 피케티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피케티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의 최상위 소득’을 고찰한다. 실제로 그는 여기서 피케티가 엠마누엘 사에즈(Emmanuel Saez)와 수행해 그의 히트작 <21세기 자본>의 모태가 된 연구를 극찬하면서 인용한다. 끝으로 그는 이 모든 일들, 곧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증가하는 불평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역설하면서 장을 끝맺는다.

이에 비해 한경BP는 각 절의 제목을 바꾸는 데 각별한 ‘editorial’한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보인다. 이 바뀐 제목들을 하나씩 보라. 여기에서 편집자의 어떤 특정 종류의 ‘editorial’한 ‘의지’를 느끼지 않기란 아마도 어려우리라. 또한 원문에는 세 개의 절로 나뉜 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는 것도 보인다. 이는 각 절을 나눔으로써 각각에 상이한 목적과 위상을 부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그의 관심의 강도를 적지 않게 낮추기도 하였다. 출판사는 ‘불평등’이라는 말이 너무 반복적으로 나와 독자들의 이해를 방해하고 그들을 지루하게 할 정도라고 판단한 것일까?

이제 이 5장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으로써 글을 끝맺겠다. 이하에서 나는 각 절마다 번역상의 문제(대체로 생략)가 있는 몇몇 특징적인 부분을 내놓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짤막하게 설명할 것이다. 각 인용부분 앞에 있는 숫자는 한글판 쪽수를 가리키며,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은 파란색 글자로 표시했다.

5장의 두 번째 쪽에서 이후 내용을 암시하고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할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축약이 이뤄졌음을 볼 수 있다. 한글판에서 위 문단은 ‘변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종 불공평하다’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이후에 생략된 부분에서 저자는 불평등이 행하는 역할, 따라서 그것을 고찰하는 것의 중요성을 각별히 강조한다. 이것은 과연 5장의 첫인상을 바꿔낼 정도의 생략이 아닌가?

경제성장은 물질적 진보를 낳고 다양한 행복의 조건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사실 행복이란 물질적 척도로만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굳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책을 읽어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경제학자답게 행복의 조건으로 사회 전반의 물질적 진보와 더불어 ‘분배상태’를 꼽는다. 즉 공정한 분배가 없는 경제성장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단서가 한경BP의 번역본에는 빠져 있다. 자, ①경제성장은 좋은 것이다, ②행복은 경제성장과는 다소 별개다, ③공정한 분배는 행복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셋이 함께 버무려진 위 단락에서, 유독 ③이 빠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③ 때문에 독자들이 지루해할 것이라고 한경BP는 판단한 것인가?

이것은 ‘미국의 빈곤’이라고 이름 붙여진 절(원문 기준)을 끝맺는 대목이다. 한글판에서 생략된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없으면 ‘빈곤율이 크게 감소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 된다. 그러나 생략된 부분을 보라. ‘그러나 내가 그러하듯 [. . .] 빈곤율은 증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그러하듯, 내가 그러하듯! 한경BP는 저자의 생각 자체를 정반대로 왜곡한 것이 아닌가?

조금 길다. 하지만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만큼 한경BP가 번역에서 많이 누락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단순한 예시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대중교양서’에서 예시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으며, 그만큼 저자가 해당 대목의 설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의 경우는 그 이상이다.

이전에 상당히 긴 설명을 마무리 짓는 첫 단락은 ‘불평등 그 자체는 특별히 반길만한 일이 아니지만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시스템의 일부’라는 말로 끝맺는다. 그러나 이 말은, 별다른 설명이 없으면 ‘불평등은 경제성장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라는 식으로 이해되기 쉽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잘 ‘관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말이다. 사실 이것은 한경BP의 편집자들의 배후에 있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우파 이데올로그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유도하는 것이 이 대목에서의 ‘editorial change’의 의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후에 생략된 부분을 보라. ‘불평등은 [. . .] 시스템의 일부’라는 저자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가? 적어도 그는 불평등을 ‘어쩔 수 없으니 잘 관리하고 살아야 할 것’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다.

위 단락에는 하나의 중요한 오역이 있다. 오역은 실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경BP는 이후 한 문장을 누락함으로써 그 오역이 매우 중요한 의미의 변형을 본문에 가하도록 만들었다. 왜 그 문장을 뺐을까? 다시 상기하자면, 한경BP가 내세운 이유는 그것이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는 것이다. 저 문장 때문에 지루하신가? 하나의 오역과 한 문장의 누락 때문에, 최저임금의 상대적 가치 하락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의회의 노력으로 최저임금 가치하락이 교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진술로 바뀌고 말았다.

하나씩 보자. A에서 한눈에 들어오듯, 원래는 한 단락이던 것이 두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실 이것은 <위대한 탈출>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뤄진 변형이다. 또한 여기서 파레토 법칙이 소개되면서 펠트슈타인 교수의 언급이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생략으로 단락의 의미가 혼란스러워진 경우다.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고 단락구분을 복원해 새로 번역된 부분을 보라. 디턴 교수의 입장이 더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그가 펠트슈타인 교수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이 명확해지지 않았는가?

다음으로 B는 미국의 최상위 소득자 집단을 고찰하는 대목으로, 여기서는 은행가·금융가가 언급되고 있다. 제기되는 질문은, 그들의 높은 소득은 과연 사회적으로 정당하냐는 것이다. 디턴 교수의 대답은? 그들 때문에 생겨나는 불평등은 ‘방어 불가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번역에서 빠지고, 해당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사실진술’에 그치고 있다. 이것이 왜곡이 아니면 무엇이 왜곡인가?

끝으로 C를 보자. 이는 지금까지 살펴본 5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문단이다. 장 전체의 성격을 보여주는 결론적 언급이다. 일단 마지막 문장에 약간의 오역이 있다. 긴 얘기 없이, 그냥 묻고 싶다. ‘힘있고 돈많은 엘리트들은 전에도 경제성장을 질식시켰고, 만약 그들이 포용적인 성장을 가능케할 수도 있는 제도들의 기능을 훼손하도록 허용된다면 그들은 언제든 또 그럴 수 있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왜 뺐는가?

지금까지 보았듯이, 한경BP는 책 전체의 구성과 각 장절의 제목을 변경함으로써, 그리고 저자의 견해가 들어간 중요한 부분들을 번역에서 뺌으로써, <위대한 탈출>의 전반적인 성격과 취지를 심각하게 왜곡하였다. 여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왜곡의 ‘방향’으로 미뤄볼 때, 나는 이것이 한경BP와 그 배후에 있는 한국경제신문과 자유경제원 식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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