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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은 죽고, 서태지는 사라졌다.

신해철과 서태지는 90년대를 관통하는 뮤지션이자 메신저였다. 둘 다 시대에 맞서는 총아 같은 인물로서 각광 받았다. 하지만 신해철이 끊임없이 언어로서 세상과 충돌하는 사이, 서태지는 언어의 미로 속에 숨어 들어가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갔다. 죽은 신해철은 말을 남겼고, 산 서태지는 말을 아낀다. 신해철의 말은 죽어서도 산다. 살아있는 서태지의 말은 자취를 감췄다. 드러나도 알아들을 길이 없다.

  • 민용준
  • 입력 2015.10.22 12:03
  • 수정 2016.10.22 14:12

신해철과 서태지는 90년대를 관통하는 뮤지션이자 메신저였다. 둘 다 시대에 맞서는 총아 같은 인물로서 각광 받았다. 하지만 신해철이 끊임없이 언어로 세상과 충돌하는 사이, 서태지는 언어의 미로 속에 숨어 들어가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갔다. 죽은 신해철은 말을 남겼고, 산 서태지는 말을 아낀다. 신해철의 말은 죽어서도 산다. 살아있는 서태지의 말은 자취를 감췄다. 드러나도 알아들을 길이 없다.

모두가 잘 알듯이 신해철이 죽었다. 벌써 작년 일이다. 벼락처럼 떨어진 비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죽은 이를 추모했다. 밀물처럼 추모의 말들이 달려와 바다를 이뤘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서태지도 말을 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 현장이었다. 서태지는 "힘들지만,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해철은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의 명곡을 만들었고, 나도 듣고 자란 세대다. 누구 보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노래 가사는 내 마음을 너무 흔들어놨다. 나도 그런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태지가 신해철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서태지가 신해철처럼 가사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의외였다.

신해철의 가사는 직설적이다. 피해가지 않는다. 투수로 치자면 직구 일변도의 투수였다. 그래서 종종 홈런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속구를 구사하며 호쾌하게 미트를 때렸다. 수비수의 도움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특별히 해석을 부르는 가사를 쓰거나 부르지 않았다. 가사가 가리키는 지향점이 명확하다. 반대로 서태지의 가사는 은유적이거나 지나치게 상징적이다. 투수로 치자면 맞춰 잡는 변화구 투수였다. 가끔씩 정면승부를 시도하며 삼진을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 유인구를 던져서 맞춰 잡았다. 그만큼 수비수의 도움이 절실하다. 쉽게 말하자면 팬덤의 지원사격이 중요하다. 단어를 나열한 형태만 봐도 의도라는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언어인 만큼 애정을 바탕에 둔 의미부여가 중요해진다.

지난해에 신해철과 서태지는 모두 오랜만에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신해철은 7년만이었고, 서태지는 5년만이었다. 신해철은 지난해 말에 넥스트의 신보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 서태지에게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서태지의 활동 재개가 확정된 시점이었다. 서태지는 새 앨범 발매에 앞서서 방송 출연을 결정했다. 그가 결정한 건 유재석이 진행하는 <해피투게더>였다. 방송 전부터 서태지가 등장한다고 예고편을 떠들썩하게 틀었다. 22년 만에 못다한 말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서태지의 지난 시절을 떠들썩하게 떠들 뿐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서태지의 딸 이름이 '삑뽁이'라는 것 외엔 새로울 것도, 기억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에 출연한 <뉴스룸>에서 유효한 이야기가 나왔다. 앵커 손석희가 뼈 있는 질문을 던져준 덕분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소격동'이 녹화사업을 비롯한 과거의 정치사를 건드리고 있다는 세간의 추측과 해석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서태지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노래를 만들 땐 정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컨대 예쁜 한옥 마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마음만 다뤘다"고 했다. 다만 "80년대 서슬 퍼런 시대를 표현하지 않고는 '소격동'이란 곡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 들어간 거다"라고 설명을 더했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를 겨냥하고 관통했다고 믿었을 이들에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9년에 발매된 서태지의 8집 앨범에 수록된 'T'ik T'ak'을 두고 세간에선 이것이 현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 즈음에 코엑스에서 펼쳐진 서태지의 게릴라 콘서트에서 서태지는 시대적 흉흉함을 우회적으로 피력하며 '시대유감'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그 노래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지 직접 말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태지의 본의와 무관하게 서태지에게 무언가 명확하게 바라는 바가 있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적 부도덕과 불합리를 좀 더 명확하게 꿰뚫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서태지와 상관 없는 바람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신곡 중 하나인 '크리스말로윈'의 가사에 등장하는 '산타'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서태지는 그것이 '나쁜 권력자'라고 했다. '교활한 권력자, 교활한 직장 상사, 그런 게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부연했다. 그러니까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인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나쁜 권력자인지 알 길이 없는 '환상 속의 그대'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랄까.

신해철의 언어는 언제나 명확하고 확실했다. 서태지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신해철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현정부를 향한 촌철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민들이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은 전두환의 모습이다. 박정희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태도는 지지자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적대자가 등장하는 이중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백분토론>에 후드티에 장갑을 끼고 나온 것에 대해서 세간의 비판 여론이 일자 그는 자신의 미니홈피 계정에 "후드 티에 장갑을 끼고 나온 것은 분명 일부에게 '익숙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반드시 '옳지 못한 모습'은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그에게는 정해진 편이 없었다. 단지 불합리한 권력을 내세우는 다수와 맞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불합리한 권력을 찌르기 위한 창으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이었다. 신해철의 생전 마지막 기록이라 할 수 있는 JTBC의 <속사정쌀롱>에서 그는 "내가 다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상태에서 비전을 세우는 것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은 다르다.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졌을 때 보험사에서 최소한 주유소까지 향하는 기름을 넣어주는, 최악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지. 환경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수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언어는 그의 노래 가사와도 일맥상통한다.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용기를 주거나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The Dreamer')"라고 다짐하거나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했었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됐어요 아무런 생각이 없어('매미의 꿈')"라고 꼬집어 말한다.

서태지도 한때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매나!"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허공에 대고 일갈하는 것처럼 공허한 언어였다. 공적인 제도를 바꾸라고 일갈하는 건지, 불합리한 제도 속에 놓인 학생들 스스로 저항하라는 건지, 명확하지 않다. 통일을 염원하거나, 교육제도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도 명확한 비판의 대상이 부재한다. 서태지는 '시대유감'을 '이 시대에 유감이 있다고 말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런 노래의 가사가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라니 누군가가 애써서 해석해주는 수고가 동원되지 않고서야 알아먹을 길이 없다. 누구를, 무엇을 겨냥하는 유감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겉핥기에 그친 비판이자 비판 의식을 포장하는 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사유감이다. 명확한 건 제목뿐이다. 서태지의 솔로 앨범 가사들은 대부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를 동반하지 않으면 언어의 가치가 불확실해진다. 최소한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쳐먹도록 그게 뭔지 몰라"라는 언어를 구사하는 신해철과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시대 비판이라는 언어로 처세를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리스너의 판단'이라는 말로 모호함만 증폭시킨다.

지난해 서태지가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선 서태지의 90년대 활약상을 훑으며 찬사를 거듭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태지는 90년대의 영광 이후로 보여준 것이 드물다.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9년, 서태지가 모아이섬에서 신비를 노래할 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서태지의 노래와 노래 밖 현실의 괴리가 선명했다. 신해철이 죽은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해철이 생전에 뱉었던 노래와 말을 유언처럼 주워들었다. 죽은 신해철의 언어로부터 위로를 느낀다. 멋대로 해석해도 좋을 말장난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가 존중 받는 건 당연하다. 흉흉한 세상에선 위로가 되는 말이 더욱 귀하다. 신해철의 죽음은 그래서 시대유감이다. 언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서태지는 '소격동'의 추억을 노래했다. 소격동의 녹화사업은 단지 기억의 재현을 위한 액세서리일 뿐이다. 흉흉한 시대는 예쁜 추억을 빛내주는 배경일 뿐이다. 물론 '우리들만의 추억'을 노래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우리'로서 한때 추억을 공유했던, 지난 날의 팬 입장에선 필연적으로 유감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린다. 기대가 너무 컸거나 오해가 심했다. 그렇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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