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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과 양은냄비' 예고된 사태였다

ⓒ한겨레

<라면을 끓이며>(문학동네)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8>(창비) 등의 사은품에 대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하 진흥원) 출판유통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의 지난 13일 도서정가제 위반 판정은 예고된 사태였다. 이 일은 과태료 인상 등 규제 강화만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다시금 깨우쳤다. 다음달로 시행 1주년을 맞는 도서정가제의 개정·보완 작업과 관련해서도 관심을 끈다.

다수의 출판인들은 도서 정가 15% 이상의 할인·사은품 제공이 정가제 위반인 줄 알면서 과태료보다 사은품 제공에 따른 책 판매 효과가 더 클 경우 출판사나 유통사가 ‘치고 빠지기식’ 편법 동원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고 본다. <라면을 끓이며>의 경우 준비한 사은품들이 책 출간 몇 시간 만에 동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사은품 제공 이벤트에는 온라인서점 5개사가 참여했다.

한국출판인회의를 비롯한 출판계가 이 사실을 포착해 위반 혐의를 확인한 뒤 관련사와 진흥원 심의위에 알리고, 심의위 최종 판정과 관할 지자체의 과태료 부과 등의 절차를 거치는 데는 몇 주가 걸린다. 그때쯤엔 이미 책은 팔릴 대로 팔려 편법 동원의 노림수는 달성되고, 맥빠진 사후규제밖에 남지 않는다.

과태료 인상도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출판계는 현행 과태료 상한 100만원을 300만원으로 올릴 것을 요구하고 있고 문화체육관광부도 관련법을 그렇게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도서 판매가 늘고 베스트셀러가 될 경우 출판사와 서점 등이 거둘 기대 이익에 비하면 300만원 과태료도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와 관련해 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사은품 위반 과태료를 사건당 100만원이 아니라 판매권당 100만원으로 매길 경우 출판사나 유통사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입법 취지상 지금이라도 지자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불법적 사은품을 제공한 책 1000권이 팔렸을 경우 현행 규정에서 과태료는 100만원이지만 권당 과태료로 매기면 10억원이 된다.

사은품 불법 제공 심의 대상을 신고나 고발이 들어올 경우로 한정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 대형 출판사 관계자는 “심의위 기준대로 한다면 대다수 현행 도서 경품들이 도서정가제 위반이 될 소지가 큰 현실에서 신고나 고발이 된 도서들만 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효도 적다”고 말했다.

심의위 대상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최근 <중세 1>(시공사)도 책 구입 시 북스탠드를, <로마의 일인자>(교유서가)는 구입 시 북배터리를 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밖에 여성용 파우치, 와인잔, 스마트폰 케이스, 향수, 클러치백, 친환경가방(에코백) 등 사은품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이런 가운데, 도서정가제를 앞장서서 지켜야 할 힘있는 대형 출판사들이 오히려 편법으로 도서정가제를 어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가제 규정을 준수하거나 할인·사은품 활용 여유가 없는 중소 출판사나 서점의 불이익 구조를 심화시키고 박탈감을 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중소 출판사의 편집자는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인터넷 서점들로부터 사은품 이벤트 참여 제안을 수시로 받는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종당 5만~15만원을 내면 인터넷 서점에서 그 돈으로 사은품을 제작하고 이벤트에 출판사의 책을 포함시켜 홍보하겠다는 제안”인 것이다.

이 편집자는 “인터넷 서점의 사은품 이벤트는 돈을 주고 노출이 잘 되도록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기에, 돈을 주고 대형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를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정가제 이후에도 공급률이 정가제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는 부당함을 겪고 있는데다가, 반강제적으로 사은품 대금까지 지급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불합리한 사은행사의 부담을 장기적으로 독자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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