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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웨인 VS. 어둠의 조상들 │ 히어로의 아버지

마녀 사냥꾼인 나다니엘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마녀로 몰아붙여 죽이던 마녀 사냥꾼이었는데, 어느 날 한 소녀를 마녀로 몰아 죽이다가 가문 대대로 저주를 받게 된다. 문제는 시간을 거슬러 가던 웨인이 이 소녀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것. 브루스에게는 나다니엘이 곧 원수가 되는 셈이다. 더구나 후대 웨인 가의 인물들이 나다니엘이라는 인물을 시작으로 해서 저주를 받아 모두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으니, 고조부 앨런 웨인이 말년에 광인의 차림으로 도시를 돌아다니다 비명횡사한 것도, 브루스 웨인의 부친 토마스 웨인이 강도의 총에 사망한 것도 어찌 보면 나다니엘이 마녀사냥으로 자초한 저주에 원인이 돌아가게 된다.

  • 이규원
  • 입력 2015.10.19 12:08
  • 수정 2016.10.19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4] 브루스 웨인 VS. 어둠의 조상들

─ 히어로의 아버지: 좋은 아버지 나쁜 아버지

"'별로 어렵지 않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씨앗은 한 번에 조금씩 뿌려야 된단다. 한 주먹씩 마구 뿌려선 안 돼. 일렬로 골고루 떨어질 수 있도록 하려무나. 간격을 충분히 주면서. 그렇지. 그렇게.' 아버지는 뿌려진 씨앗 전부가 싹을 틔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하지만 모든 씨앗에게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골고루 주고자 하셨다.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세상에는 곧바로 싹을 틔우는 사람도 있지만 좀 더 돌봐줘야 하는 사람도 있다고."

이것은 DC 코믹스의 만화 『슈퍼맨: 땅 위에 평화를』에서 슈퍼맨이 어린 시절 아버지 조나단 켄트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회상하는 장면을 인용한 것이다. 이 책에서 슈퍼맨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 분투한다.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는 북한의 지도자에 맞서 싸우는 슈퍼맨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진실과 정의와 미국적 가치관을 실현하는 슈퍼맨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마지막 깨달음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뿌려진 씨앗이 다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랄 기회만큼은 씨앗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하니까⋯."

『슈퍼맨: 땅 위에 평화를』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Superman:_Peace_on_Earth_Vol_1_1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Green_Lantern:_Secret_Origin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그린랜턴에게도 아버지는 특별하다.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의 주인공 할 조던에게 아버지는 자상한 조언자를 뛰어넘어 영원한 영웅이자 롤 모델이다.

"사람들은 내가 본래 두려움이 없는 줄 안다. 그건 오해다. 모두들 내가 이 반지 덕분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믿는다. 그것 역시 오해다. 나는 우주 최강의 무기를 물려받기 이전에, 별들 사이를 누비며 모험을 펼치기 이전에 이미 ⋯ 내 아버지로부터 그런 힘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처럼 되기 원했다."

혹은 영화 「원티드」와는 상당히 다른 세계관을 지닌 그 영화의 원작 만화 「원티드」에서 폭스가 주인공인 웨슬리에게 했던 이런 말.

"네 아버지가 역사상 최고의 악당 중에 한 명이었다고 묻는 거야? 맞아. 웨슬리."

찌질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던 웨슬리는 어느 날 자신이 세계 최강의 악당 '원조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화려한 초상화들

비단 아버지뿐이랴.

좋은 아버지건 나쁜 아버지건,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까지도 히어로의 삶에는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배트맨 『배트맨: 올빼미 법정』에서 배트맨은 내내 고조부인 앨런 웨인의 이야기를 한다. 오늘날 고담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 손꼽히는 앨런 웨인은 고담의 지하부터 고담의 가장 높은 타워까지 그 어느 곳 하나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인물. 고담이라는 도시를 가능케 만든 고담의 설계자격인 인물로 웨인 가의 자랑이다.

앨런 웨인의 손길이 닿은 원조 웨인 타워.

(사진 제공: 세미콜론)

웨인 가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인물은 수두룩하다. 훨씬 더 윗대로 올라가서 중세까지 올라가면 성배를 수호하는 기사도 있다. 2000년 작 『배트맨: 성배(Batman: Chalice)』에서 배트맨은 수신인이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소포 하나를 받는데, 그 안에는 중세 십자군의 보물로 알려진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던 성배가 들어 있다. 그것도 진짜 성스러운 힘을 지닌 성배가! 알고 보니 브루스 웨인의 조상 중에 십자군 전쟁 당시에 성배를 찾아 그것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충직한 기사가 있었고, 성배를 지키는 임무가 그 후손들에게 이어졌다는 것.

하지만 작가들은 웨인 가의 역사를 마냥 자랑스럽고 성스럽게 포장하지만은 않았다. 앨런 웨인의 비참한 죽음은 허무하리만큼 적나라하게 그려졌고, 성배를 지키는 기사의 성스러운 임무는 배트맨이 그 임무를 거부하면서 대가 끊기고 만다(배트맨이 성배를 슈퍼맨에게 맡겨 버린 것).

화려하게 나열된 초상화가 아닌 대결해야 할 흑역사를 지닌 조상으로

1971년 <디텍티브 코믹스 412호>. 시대로 치자면 오늘날 '모던' 배트맨이 탄생하기 이전의 버전이긴 하지만, 이 이슈는 웨인 가의 조상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잉글랜드 북부에 위치한 웨인무어 성. 오랜 역사를 지닌 이 고성은 중세에 해롤드 웨인이라는 인물이 세운 성이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웨인이라는 성을 지닌 인물들은 이 해롤드 웨인의 자손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로린 웨인의 자손이다. 로린이 형의 영지와 작위를 탐내서 해롤드를 살해했던 것이다. 마치 '햄릿'처럼 해롤드의 영혼은 원한에 사무쳐서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성안을 떠돌면서 목격되는데, 이 이슈에서는 해롤드의 원귀가 사람에게 빙의하여 로린의 자손들을 모조리 죽여 그 원한을 갚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98년 작 『배트맨 스코티시 커넥션』에서는 브루스 웨인의 조상으로 스코틀랜드의 기사였던 가웨인 드 웨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와 함께 웨인 가에 시집온 조상 할머니의 가문인 맥더브 가문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역사는 200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으로 양모 가격이 상승하면서 그동안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 줬던 지주들이 농민들을 내쫓고 대신 양을 키우기 시작한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여기서 지주 역할을 하는 맥더브 가는 자신들의 땅을 빌려 농사짓던 농민들을 무력을 동원해서 전부 내어 쫓는다. 항의하는 농민 중의 일부는 총을 맞고 죽기도 하고, 살아남은 농민들은 억지로 배에 태워져서 스코틀랜드를 떠나게 되는데, 스코틀랜드를 떠나서 그나마 신대륙으로 가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에 배에 전염병이 돌아서 모두 죽고, 남자 1명과 갓난아기인 그의 아들 하나만 생존한다. 남자는 이후 자신의 집안의 아들들은 장자에서 장자로 대를 물려가며 맥더브 가에 복수를 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디텍티브 코믹스 412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412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배트맨 스코티시 커넥션』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Scottish_Connection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브루스 웨인의 귀환』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Return_of_Bruce_Wayne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다크사이드의 광선을 맞고 죽은 줄 알았던 브루스 웨인이 원시 시대부터 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다는 2010년 『브루스 웨인의 귀환』에서도 역시 웨인 가의 여러 인물들이 그려지는데, 그중에 나다니엘 웨인이라는 인물이 있다.

배경은 신대륙의 고담 식민지. 마녀 사냥꾼인 나다니엘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마녀로 몰아붙여 죽이던 마녀 사냥꾼이었는데, 어느 날 한 소녀를 마녀로 몰아 죽이다가 가문 대대로 저주를 받게 된다. 문제는 시간을 거슬러 가던 웨인이 이 소녀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것. 브루스에게는 나다니엘이 곧 원수가 되는 셈이다. 더구나 후대 웨인 가의 인물들이 나다니엘이라는 인물을 시작으로 해서 저주를 받아 모두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으니, 고조부 앨런 웨인이 말년에 광인의 차림으로 도시를 돌아다니다 비명횡사한 것도, 브루스 웨인의 부친 토마스 웨인이 강도의 총에 사망한 것도 어찌 보면 나다니엘이 마녀사냥으로 자초한 저주에 원인이 돌아가게 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브루스 웨인의 조상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배트맨과 로빈이 슈퍼맨과 함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든지, 혹은 최면술사의 힘을 빌려서 최면을 통해 과거를 여행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조상을 만나고, 알고 보니 배트맨의 조상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업적과 관련이 있었다느니, 혹은 노상강도로 알려졌던 어느 조상이 알고 보니 배트맨처럼 가면을 쓴 정의의 투사로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누명을 쓴 사실을 알았다느니 하는 식으로 웨인 가문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들을 발굴하고 나열하는 과정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에는 해롤드 공이나 「챌리스」의 수호기사 이야기처럼 「환상 특급」에 나올 법한 신비한 이야기들부터 중세 영국과 신대륙 개척 시대, 해적 시대, 서부 시대, 독립 전쟁 시대, 현대를 관통하며 역사의 중요 순간에 존재했던 웨인 가 조상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고루 조명하는 가계도로 발전을 해 간다. 오히려 가계도는 웨인의 외가 쪽으로, 혹은 웨인의 집사인 알프레드나 사이드킥 로빈의 가계도와도 연결되어 고담에 영향을 미쳐 온 숨겨진 세력들에게로 뻗어 가며, 브루스가 조상의 어두운 이면과 정면대결하며 답을 찾는 모습을 보여 준다.

세 주인공의 조상 극복하기

급기야 2011년 스콧 스나이더의 『배트맨: 올빼미 법정』과 『배트맨: 올빼미 도시』에서는 브루스 웨인의 고조부인 앨런 웨인, 딕 그레이슨의 증조부인 윌리엄 코브, 그리고 알프레드의 부친인 자비스 페니워스. 세 명의 주인공이 각각의 조상들과 관련된 역사의 진실, 부끄럽고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답을 찾는 과정들이 톱니처럼 맞물리며, 고담을 세운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냐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올빼미 법정이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새로운 진실을 대면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만화는 배트맨이 미궁 속을 헤매는 장면을 통해서 과거를 향한 해답을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몸부림을 가장 만화적인 방식을 통해서 매력적으로 표현해 낸다. (여담이지만 『배트맨: 올빼미 법정』에서 시도된 미로를 통해 이어지는 패널이나 뒤집힌 화면 구성 등은 전설적 만화가 집 스테랑코의 『닉 퓨리: 쉴드 요원』이 원조다.). 그리고 세 사람은 생각지도 않았던 조상들의 어두운 면모와 씨름하며 각각의 해답을 찾는다.

알프레드는 부친의 죽음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극복한다.

"이걸로 됐습니다. 저는 이미 제 아버지에 대해 필요한 사실을 다 알았습니다. 사실만 찾으시면 됩니다. 때가 되면 잘 알아서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오래전에 죽은 혈육의 유령을 깨우지 마시고 내버려 두십시오."

딕 그레이슨이 찾은 대답은 이렇다.

"글쎄요 이런 진실도 있죠. 당신도 이미 양쪽으로 생각해 봤겠죠. 우리 새들 모두를 한편, 그리고 박쥐는 그 반대편, 빌어먹을, 당신은 아마 벌써 왼쪽 오른쪽으로 벽을 쌓고 있겠군요. 하지만 솔직히 난 내 조상이 뭐였든 법정이 날 무엇으로 만들려고 했든 개의치 않아요. 전혀. 뭐가 될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거예요. 브루스. 과거가 말해 주는 역할대로 살아야 되는 게 아니에요."

조상 대대로 고담이라는 도시를 기초부터 완성해 왔고, 웨인 기업을 통해서 고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또한 배트맨으로서 고담의 밤을 지배하며 고담을 자신과 동일시하던 브루스 웨인 역시도 자신만의 답을 찾는다.

"나는 이 도시가 내 것이고 배트맨의 것이라고 생각했어. 이 계획만 해도 마음 한편으론 도시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단 배트맨을 위한 더 많은 망루와 근거지를 짓는 일이라고 판단했어. 하지만 이젠 그게 오판이었음을 깨달았지. 왜냐면 고담은 배트맨 것도 아니고, 올빼미의 것도 아니니까. 고담은 ⋯ 우리 모두의 도시니까."

자신만의 답을 찾은 배트맨.

(사진 제공: 세미콜론)

만화에서만 가능한 아버지의 헌신

『플래시포인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Flashpoint_Vol_2_1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한편 이런 아버지도 있다. DC 코믹스의 『플래시포인트』는 뉴52의 세계가 도래하기 직전 기존의 DC 유니버스의 모든 것이 뒤덮인 세상이다. 세상은 원더우먼과 아쿠아맨의 전쟁으로 파멸로 치닫는 상황이고,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 아닌 그 아버지 토마스 웨인. 이 바뀐 세상에서는 웨인 가의 운명을 바꾸었던 뒷골목 강도와의 만남에서 아버지 대신 아들이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운명의 사신에게 아들을 빼앗긴 토마스 웨인 배트맨의 삶은 브루스 웨인 배트맨이 살았던 부모 없는 삶보다도 더 끔찍하고 처절하다. 미래가 없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범죄와의 전쟁. 어느 날 토마스 앞에 차원을 뛰어넘어 플래시 배리 앨런이 나타나 이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긍하기 힘든 진실이겠지만, 토마스는 자신의 세계가 올바르다고 고집을 부리기는커녕, 그것을 미래를 위한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세계 전부를 희생하는 결단을 내린다.

"내가 네 말을 믿어준다면, 네가 바꿀 수 있겠어? 돌려놓을 수 있겠어? 원래대로 ⋯ 나는 죽고 브루스는 살도록?"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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