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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높은 빈민가: 죽은 거인(사진)

  • 김병철
  • 입력 2015.10.16 10:43
  • 수정 2015.10.16 11:13

높이 192m.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중심부에 수직으로 솟은 ‘토레 다비드’(다비드 탑).

개발업자(다비드 브릴렘버그)의 이름을 딴 이 빌딩은 유명 건축가 엔리케 고메스와 카라카스철도공사의 합작품이다. 헬기장까지 갖춘 부유층 호텔인 45층짜리 중심타워와 19층짜리 고위직 거주용 빌딩.

이 두 건물의 부속물인 19층짜리 엘리베이터 동과 10층짜리 주차장, 30m 높이의 아트리움(하늘이 통하는 회랑형 마당)까지 다섯 구조물이 겹겹 둘러쳐진 초호화 ‘복합 재정금융센터’. 1990년 착공 때만 해도 석유 활황을 타고 베네수엘라의 번성하는 경제력의 상징이었던 빌딩단지다.

1993년 개발업자가 돌연 죽고 이듬해 베네수엘라에 금융위기가 닥쳤다. 개발업체가 도산하고 공정 90%에서 건설은 중단되고 건물은 정부(예금보증공사) 소유가 됐다.

그렇게 십수년, 그 빌딩은 ‘죽은 거인’이라 불렸다. 마감 안 된 콘크리트 계단을 드러낸 채 빌딩은 텅 비어 있었다.

오늘날 그 건물은 흔히 ‘수직형 빈민가’로 불린다. 2007년 9월17일, 카라카스 변두리 다닥다닥 무허가 빈민촌에 살던 몇 가족이 그곳에서 쫓겨났다. 폭우를 피할 쉼터를 찾던 그들의 눈앞에 토레 다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밤에 이들은 다른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다. “토레 다비드, 죽은 거인을 점유합시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떼지어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그날 당직 경비 두명은 무장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단 점유’는 토레 다비드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직형 무허가 거주지로 탈바꿈시켰다. 2009년 200여가구로 늘더니 현재 750여가구, 3000여 주민이 사는 마을이 됐다.

잡화점이 있는 공용공간. 미메시스 제공

주민들은 층층이 칸을 나누어 벽을 만들고 집을 가꾸었다. 당번을 두어 청소를 하고, 자체 방범활동을 하고, 전기세도 공평하게 나눠 낸다. 몇 층마다 잡화점도 생겨나고, 심지어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가구도 있다. 회랑형 아트리움은 공동체의 체육공간이자 휴식장소가 되었으며, 복도는 주민들이 소통하는 골목이 되었다.

토레 다비드 주민 협동조합은 이런 공동체 자치의 구심 노릇을 하고 있다. 브라질 사진가 이반 반은 이 마을의 일상 풍경을 속속들이 찍어 이 책을 온통 아름다운 화보로 빚었다. 각 가구가 창의적으로 꾸민 알록달록한 거주 공간들을 보노라면 이곳이 예술가촌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지은이들은 토레 다비드가 오늘날 누군가에겐 건물을 누더기로 만든 ‘카라카스의 오점’으로 여겨지지만, 적어도 지금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겐 “안전한 천국이자 자신감의 원천인 집”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 나라에서 세번째로 높은 상업용 고층타워가 집 없는 이들의 둥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차베스 정부의 묵인 내지 옹호가 있었다. 1999~2012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석유를 비롯한 기간산업 국유화에 이어, 이른바 유휴 토지의 빈곤층 분배, 시민의 거주를 위한 무단 점유를 옹호했다. 어떤 토지든 10년 이상 점유해 살아온 이에게 주택 명의를 이전해주는 대통령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은이는 토레 다비드를 ‘빈민가’라 보지 않는다. 유엔의 정의를 보면 빈민가는 ‘기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내구성을 갖춘 시설이 결핍된 거주 환경, 식수·위생시설의 결핍, 강제추방에서 자유로운 안정된 거주권의 결핍’까지 세 요건이 중요한데, 토레 다비드는 아직 정부의 공식 인정을 받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빼고는 빈민가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

토레 다비드중 한 가구의 집 안 풍경. 미메시스 제공

이 책을 지은 이는 스위스·베네수엘라·미국 기반의 건축디자인집단 어반싱크탱크와 스위스 취리히공과대학 팀이다. 이들은 2011년부터 토레 다비드 주민들과 접촉하여 이 수직형 무단점유 마을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협력해 왔다. 이를테면 건물 내 남는 공간에 수경 재배 녹지 가꾸기, 급수시설과 쓰레기 배출 시설의 개선이다. 이 프로젝트는 2012년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토레 다비드는 현재 전력 과부하의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마을 내 수직 이동이 쉽지 않다. 기존 승강기를 사용할 경우 전기 사용량을 감당할 수 없는 탓이다. 주민들과 어반싱크탱크 팀은 ‘수직 이동버스’를 구상하고 있다. 기존 승강기가 승강기와 평형추 사이에 무게 차가 생길 때마다 균형을 맞추려고 전력을 많이 쓰는 반면, 새로이 설계된 수직 이동버스는 내려가는 버스와 올라가는 버스의 균형을 이용하여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는 방식이다.

이 버스는 일반 마을버스처럼 아침저녁 통행량이 많은 시간대와 한가한 낮시간대의 배차 간격을 달리한다. ‘토레 다비드의 실험’은 비록 무단 거주 지역일지언정 공동체가 살아 숨쉬는 마을로, 도시 속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적어도 지금까지는,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토레 다비드

어반싱크탱크 외 지음, 이반 반 사진

김마림 옮김/미메시스·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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