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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을 읽는 시간

"우리는 어차피 다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실을 자꾸 상기시켜, 어쩌든지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어쩌든지 불편하게 만드는 게 시예요", "우리가 아는 것은 참 적어요. 뭘 좀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아는 것 가지고 폼 잡지 말고, 모르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른다고 하면 더 밑으로 떨어질 데가 없잖아요. 몰라서 삼가면 나도 남도 덜 다쳐요. 한 편의 시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경고예요"

  • 이태경
  • 입력 2015.10.16 10:29
  • 수정 2016.10.16 14:12
ⓒ한겨레

인간이 동물을 넘어 거룩하고 고귀하며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을 때, 말이 채 되지 않는 말의 홍수 속에서 익사당하지 않고 모국어의 지독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을 때, 생이 모욕이고 불가능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싶을 때, 그때 나는 이성복을 읽는다. 이성복은 시의 성서라 할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상재한지 35년지 지났지만, 여전히 낡지 않았고, 스스로를 갱신한다. 이성복이 최근 시론집 세 권을 냈다. '극지의 시',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이 그것이다.

'극지의 시' 등은 시를 위해 순교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에 멈추진 않는다. '극지의 '시 등은 인간 실존에 대한, 삶의 허망함과 덧없음에 대한, 잘사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책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말들은 얼마나 아프고, 슬프고, 허망한가? 또한 잘 사는 것이 무언지에 대해 너무나 친절하게 그러나 에둘러가지 않고 말하는가?

"제가 이 얘기를 친구한테 해주었더니, 그 친구도 너무도 인상적이었던지 그날 밤 꿈을 꾸었대요. 여러 날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니 아내가 죽어 누워 있더래요. 그 친구는 지난 세월 한 번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딴짓만 해온 것이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파 방바닥을 치며 울다가 깨어보니 꿈이더래요"('극지의 시' 중)

"아무리 슬픈 사연도 말하고 나면 고통이 줄어들어요. 아무리 고된 노동이라도 노래에 실리면 힘든 줄을 몰라요. 리듬 때문이지요", "꾸준히 노력하면 잘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져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최상은 아니라도 차상까지는 갈 수 있어요", "세상에 사람 얘기 아닌 게 없어요. 보고 듣고 말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무언가를 볼 때는 항상 그것의 초라함과 속절없음을 보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차피 다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실을 자꾸 상기시켜, 어쩌든지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어쩌든지 불편하게 만드는 게 시예요", "시는 기도예요. 하느님한테 뭐 해달라고 조르는 기도가 아니라, 어쩌든지 당신 뜻대로 살겠다는 약속이지요. 시는 번제예요. 희생 제물을 까맣게 태워 아무도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시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자리예요", "좋은 사람 좋아하는 게 무슨 사랑이겠어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지요. 그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게 시가 아닐까 해요", "우리의 일상은 얼다가 녹다가 하는 일의 반복이에요. 이 지루한 아름다움! 우리가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오직 견디는 것뿐. 위로 안 받기 위해, 좀더 강해지기 위해 우리는 시를 쓰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것은 참 적어요. 뭘 좀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아는 것 가지고 폼 잡지 말고, 모르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른다고 하면 더 밑으로 떨어질 데가 없잖아요. 몰라서 삼가면 나도 남도 덜 다쳐요. 한 편의 시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경고예요" ('무한화서' 중)

"우리는 말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말의 결과 재질을 거의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손등이 까졌을 때 공기 중에서는 아픈지 모르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따갑지요. 특히 소금물에 넣으면 더 쓰리지요.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렇게 쓰린 거예요", "태어나는 것, 밥 먹는 것, 연애하는 것, 오줌 누는 것, 꽃 피는 것, 머리카락 자라는 것, 모두가 속절없는 것들이에요"('불화하는 말들'중)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두 개 있다. 삶이 터무니 없이 짧다는 것, 삶이 허망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건 우리 모두의 실존을 규정짓는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겁하고 추레하게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같은 삶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아서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이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가까스로 인간이 된다. 인간 이상이긴 위한 노력 중 으뜸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 공감에 바탕한 실천이다. 삶에 비루하게 연연하는 자는 인간 이상이긴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이 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렵고 서럽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이를 낳고, 어떤 이는 불멸의 예술품을 만든다. 이성복은 아이도 낳고, 불멸의 예술품도 낳은 행운아다. 세상은 엉망이지만, 깊어가는 가을 이성복을 읽으며 참혹한 시절을 견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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