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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 불공정거래부터 못하게 해야" | 정운찬 전 총리 인터뷰

"우선 불공정거래행위를 못하게 해야 한다. 구두주문, 기술탈취, 장기어음결제, 납품가 후려치기 등을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한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곳이 '불공정'거래위원회다. 잘못을 알면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다. 공정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정위 위원장을 부총리급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면 좋겠다. 그런데 공정위 내 관료들이 퇴직 후를 생각하기 때문에 잘 안 되기도 한다. 페널티를 적게 준 다음에 삼성, 현대에 간다. 심각하다. "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입버릇처럼 터져 나온다. 국민 평균 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에서 쉬이 들을 만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자. 꿈꾸던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의 길은 막막한 청년 세대, 자녀들 교육시키고 집 한 채 마련에 청춘을 바쳤지만 부모 세대 봉양에 또 한 번 굽은 등을 펴야 하는 중장년 세대, 수명은 길어졌지만 가난과 외로움을 상대로 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노년 세대. 이것이 대한민국의 2015년 얼굴이다.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 주어도 모자란 때에 정부는 일자리 '창출'보다 '나누기'에 매진하며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고, 보수가 시장친화적이라는 통념을 깨고 시장에 대한 입김도 날로 더하고 있다. 덩달아 세계가 평가하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도 줄곧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새로운 성장동력 창출과 구조개혁이 시급한 때에 사회 갈등과 경제 왜곡만 심화되고 있다는 경종이 심심찮게 들리는 이유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식상한 구호에 '우리 경제가 살아있던 적이 있기는 하냐'라고 농담처럼 되묻지만,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등의 파고를 맞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생사를 가르는 절벽 위에 서 있다고 경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에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는 헐떡이는 경제에 산소를 불어넣는 마음으로 우리 경제가 직면한 과제들을 차근히 짚어보고 정치, 경제, 사회를 아우르는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경제, 길을 찾아 나서다 ①

동반성장은 양극화의 해법 - 정운찬 전 국무총리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 중 정운찬의 <거시경제론>을 접하지 않고 졸업한 이는 드물 것이다. 경제학계에서 정운찬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거목'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학계를 넘어 국립서울대학교 총장과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그는 경제를 넘어 교육, 그리고 대한민국 전반을 통찰해 본 경험을 갖췄다. 화려한 과거를 뒤로 하고 '동반성장'을 남은 일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그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동반성장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나 대한민국 경제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요즘엔 '정운찬'이라는 이름에 항상 '동반성장'이 뒷따른다. 총리까지 역임하신 분으로서 더 큰 일에 매진하실 수 있을 텐데 동반성장에 헌신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다.

= 이유는 세 가지 정도가 될 것 같다. 첫째, 양극화가 정말 심하다. 부자와 빈자 간의 양극화를 보자. 소득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1997년 경제위기 전만해도 0.27정도로 양호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0.35정도 된다. 또, 산업을 보면, 삼성·현대·SK·LG 4대 그룹 매출이 GDP의 60%대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GDP와 기업매출 간 직접비교가 힘들다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이 값이 30년 전에는 20%, 10년 전에는 40%였는데, 지금은 60%를 기록하고 있다. 기업 간 양극화가 심해진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 힘이 한 군데로 쏠리니까 전체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 게 현실이다. 그것을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 때문이다.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로 꼽히는 분인데, 그 분이 저를 키워주셨다. 생활비도 대주고, 학비도 내줬다. 정신적으로도 제 인격 형성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선한 사람을 만나면 비둘기의 자애로움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호랑이의 날카로움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 그분께 어디 가면 좋겠냐고 물으니, 국력에 도움이 될만한 공부, 앞으로 소득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가르쳐주는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그 분은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데, 한국은 어떻게 된 일인지 부자들이 빈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그게 1966년 일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조순 선생님께서 조화, 균형, 배려와 같은 것들을 많이 말씀하셨다. 스코필드 박사와 통한 것이다. 이런 성장 배경에서 동반성장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

마지막 이유는,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21세기는 '이기적인 이타주의'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20세기는 폐쇄적인 시기였다.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21세기는 세계화, IT혁명으로 인해 자기 이웃사람이 얼마를 벌어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외국부자들이 돈을 어떻게 버는지 그리고 어떻게 쓰는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부자들이 가만히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배려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기적 이타주의다. 제 생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들이 세계적인 조류를 이룬 것인지, 마침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공약 1번으로 전 산업에 걸친 이익공유제를 주장했다. 회사 내에서의 이익공유인 것 같기는 하지만, 하여간 고무적이다.

- 이명박 정부 하 동반성장위원회의 첫 위원장을 맡으면서 동반성장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하셨나?

= 총리할 때(2008.9~2009.8) 수천 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 사장이 찾아와 이민을 가겠다고 했다. 재벌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심해서 사업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총리실 직원들에게 조사를 시켜보니, 1997년 이전에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즉 구두주문, 현금결제가 아닌 장기어음결제, 기술탈취,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되었다고 보고가 왔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1998년 IMF 금융위기 당시 외채를 빨리 갚는 것이 목적이 되면서 수출을 급격히 늘렸다. 이를 위해서는 물건이 좋거나 값을 싸게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후자의 노력만 했다. 수출 대기업들이 물건을 싸게 만드는 데 집중한 것이다. 그 중 가장 만만한 것이 납품단가를 낮추려는 노력이었다. 그 결과 수출대기업과 그 임직원들은 잘 나가는데, 중소기업들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사회에서는 눈감아 준다. 수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견기업인이 이민 갈 생각을 할 정도라면, 자영업자들은 어떨까?

- 이미 총리 시절부터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문제를 고민하셨는데, 동반성장위원회가 그 고민의 결과물인가?

= 사정을 파악하고 바로 이명박 대통령 "큰일 났다. 양극화가 심해서 경제활력도 떨어지고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동관 수석에게 실상을 알아보라고 했고, 이동관 수석이 '심각하다'고 보고해서 2010년 9월 30일에 동반성장위원회를 만들기로 하고 12월에 발족했다.

- 총리 사직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 위원장 자리를 맡기 곤란하셨을 것 같다.

= 저 보고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으라고 해서 안 한다고 하니, "발제해 놓고 왜 안 받느냐"고 해서 결국 하기로 했다. 그때 대통령 직속으로 해달라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통령 직속으로 하면 단기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의논해서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 입장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반민반관(半民半官)이지만, 형식적으로는 민간위원회다.

- 1년 4개월 정도 위원장으로 계셨다.

= 동반성장위에 있는 1년 4개월간 열심히 일했다. 알고 보니 월급도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했는데, 초과이익공유제 이야기했다가 이건희 회장에게 혼나고, 최중경 장관(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 비판하고, 홍준표 여당대표가 급진좌파라고 했다. 하지만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시기였다. 한 1년 4개월 하다 뜻한 대로 잘 안 돼서 인력과 예산을 두 배로 늘려달라고 대통령께 부탁하니 대답을 안 하셨다. 그만두라는 이야기로 알고 그만 뒀다.

- 앞서 대기업-중소기업 간 양극화에 대해 "사회가 눈감아 주고 있다"고 표현하셨다. 사회 전체의 무감함도 문제이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이 특히 심각한 것 같다. 동반성장위원회도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동반성장연구소'의 그간의 성과를 꼽아본다면 무엇이 있을까?

= 동반성장연구소는 순수 민간연구소다. 우리는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 서울과 비서울, 남녀, 남북, 세대 간 등의 동반성장에 폭넓게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매달 포럼을 열고, 1년에 한 번씩 심포지엄도 한다. 포럼의 결과나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는 책자로 내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강의다. 1년에 4~50차례 특강을 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광주, 어제는 광양에 다녀왔다.

동반성장위원회와 연구소는 완전히 별개의 기관이다. 하지만 시너지는 있다. 성과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과거에 대기업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던 불공정거래를 지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한다. 또 지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동반성장이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그것을 해야 한국경제가 산다는 생각은 상당히 보급된 것 같다. 또,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과 중소기업 위주의 정부발주는 효과가 적지 않다.

- 인식의 토대를 까는 작업을 해오셨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재벌들의 선의에 의지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은 한계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 강제성은 없다. 사실 첫 동반위 회의에서 대기업 대표가 "법적 근거가 있냐"고 물었다. 머뭇머뭇 했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없더라. 1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2011년 말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에 동반성장위원회를 넣었고, 동반성장지수는 공정거래위원회와 동반성장위원회가 공동 작성한다고 적었다. 그렇게 법적근거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법적 근거는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또는 중소기업 위주의 정부발주, 초과이익공유제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정부가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중소기업 위주의 신산업정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본다.

- 법제화를 시도하면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크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 저는 다른 경제학자에 비해서 정부의 역할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 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다른 어떤 체제보다 자본주의체제가 흠은 덜하다. 그러나 가끔 크게 부침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완화하는 것이 정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 미국에서도 이익공유제 얘기가 나왔다고 하지만, 초과이익공유제는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 이익이 17조가 난 어떤 큰 회사가 있다고 하자. 10조는 목표이익이라면, 7조는 초과이익이다. 초과이익 중 2.1조 원은 임직원 보너스로 나눠주고, 4.9조 원은 사내유보했다. 동반성장위원회에서 말한 것은 초과이익 7조 원 중 10%인 7천 억원만이라도 협력업체를 위해 쓰자는 것이었다. 협력중소기업에게 초과이익을 나눠주면 그들은 기술개발, 해외진출, 고용안정을 위해 쓸 것이다. 그럼 더 튼튼해질 것이다.

그랬더니 한 분이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그런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더라. 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다. 초과이익공유제는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생긴 것이다. 요새 우리도 개런티 얘기를 많이 듣는데, 러닝개런티를 준다는 것은 계약이 아직 안 끝났다는 것이다. 즉, 성과에 따라 더 준다는 것이다. 영화 <명량>이 히트 치니까 감독에게 150억 원인가 주었다고 하더라. 그게 바로 초과이익공유제다. 이런 철학이 제조업에도 넘어가서, 크라이슬러(자동차), 캐리어(에어컨), 롤스로이스(항공기부품) 등이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대기업들이 돈 벌어서 나눠주라는 것이 아니다. 초과이익의 적지 않은 부분은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그 작은 일부라도 보상적 차원에서 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초과이익공유제라는 것이다.

- 최근 롯데의 지배구조 문제로 재벌개혁 이슈가 부각됐다. 동반성장을 위해서 재벌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 같다. 정부가 어떻게 재벌개혁을 시작할 수 있을까?

= 너무나 간단하다. 우선 불공정거래행위를 못하게 해야 한다. 구두주문, 기술탈취, 장기어음결제, 납품가 후려치기 등을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한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곳이 '불공정'거래위원회다. 잘못을 알면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다.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의 필요조건이다. 경제민주화를 말하자면 경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나는 경제를 하나의 커다란 교환체계라고 본다. 노동자는 노동서비스를 제공하고 기업은 임금을 제공한다. 잠재적 교환 당사자들이 서로 교환을 안 하고도 별 손해가 없다면, 경제적으로 민주화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거리를 찾는 중인데 기업이 제시한 조건이 안 맞으면 안 할 수 있지만, 밥 먹을 것이 없다면 안 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생활수단이 확보되는 것이 기업과 노동자 차원에서 경제민주화의 필요조건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대-중소기업 간 관계에서 중소기업이 약하기 때문에 재벌 문제가 나타난다. 이들이 약하기 때문에 재벌이 모든 것을 잡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격차를 줄임으로써 '너네 그렇게 하면 거래 안 한다'고 할 정도를 만들어야 한다.

- 중소기업과 대화를 많이 하시고 있는데, 대기업과도 충분히 소통하고 계신가?

= 대기업에서는 안 온다. 나를 부를 이유도 없다.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적합업종 정하고 초과이익공유제를 자꾸 말하니까 안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모 그룹 총수는 나의 제자들이기도 한 부회장과 사장들에게 "네 선생 빨갱이 탈피하라고 말해주라"고 했다고도 한다.

- 대기업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접합점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 제일 좋은 방향은 재벌총수가 정신 차리고, 단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대기업 임원들을 보면 구매담당 출신이 많다. 후려치기 잘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재벌총수들이 바뀌어야 하는데 안 바뀐다. 그들이 몰라서 못 바꾸거나 알면서도 못 바꾼다면,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철학과 의지, 현실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게 부족하다면 그런 사람을 쓸 덕이 있어야 한다.

- 현재 대통령이나 중앙정부의 의지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중소기업은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으로 갈수록 많아진다. 직접 접촉이 더 많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대-중소기업 간 격차를 줄일 방안은 없나?

=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발주다. 과거에 모 지사는 90% 이상의 관급공사를 서울의 큰 건설회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작은 기업에게 나눠주는 것이 필요하다.

가끔은 서울에 있는 대기업이 제주도나 강원도에서 공사를 하는데, 대부분은 돈이 그 지역에 안 떨어진다. 그래서 제가 제안한 것은 건설대금을 원화로 주지 말고 쿠폰으로 주자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서만 유통되는 쿠폰 말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만들어줘야 한다. 총리할 때 건의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50킬로, 100킬로 등 거리를 재서 세제 해택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멀리 갈수록 더 많이 주는 것이다.

- 앞서 공정위를 '불공정'거래위원회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공정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 공정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정위 위원장을 부총리급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면 좋겠다. 그런데 공정위 내 관료들이 퇴직 후를 생각하기 때문에 잘 안 되기도 한다. 페널티를 적게 준 다음에 삼성, 현대에 간다. 심각하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벌개혁을 제대로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데 재벌의 힘이 노무현 대통령 때 제일 세졌다는 것이다. 원래 있던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가 없어진 게 참여정부 때다. 그래서 2011년에 적합업종제도로 부활시켰다.

- 한국경제가 구조적으로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초이노믹스'도 방향은 맞지만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 문제의 해결 방법은 투자 회복밖에 없다. 소비를 늘릴 길이 없다. 소득증대를 통해서는 길이 없다. 배당소득, 이자소득, 근로소득 등이 있는데, 배당은 많이 해줘도 주식을 외국인이 갖고 있거나 기관이 갖고 있어서 개인에게 안 돌아간다. 이자소득은 계속 내려가고 있으며, 근로소득은 임금의 하방경직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설사 소득이 늘어나더라도 가계부채 문제, 그리고 사회분위기상 소비로 연결되기 어렵다. 경제가 잘 되려면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물건을 많이 사줘야 하는데, 이는 투자를 통한 길밖에 없다. 투자가 규제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투자가 안 늘어나는 이유는 경제정책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투자해서 돈 벌면 '뭐 나쁜 짓 해서 돈 벌었냐'고 의심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투자는 대기업, 중소기업 모두 안 한다. 대기업은 돈은 많은데 투자할 데가 없다. 첨단핵심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 중소기업은 고급기술을 갖고 투자할 데는 많은데 돈이 없다.

- 우리나라는 GDP대비 R&D 비중이 세계 1위라고 한다. 굵직한 R&D는 주로 대기업들에 의해 이뤄지는데 핵심기술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 R&D 지출이 많다지만, D(Development)만 많고 R(Research)는 별로 없다. 남의 연구에 조금 덧붙이는 정도(Refinement)가 있을 뿐이다. 대기업이 투자를 해서 재도약 하기 위해서는 D에서 R로의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지만, 이것만이 한국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 현재 추진 중인 노동개혁의 방향은 맞다고 보시나?

=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이 노동자에게 있다고 보고 개혁을 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기업들이 줄 수 있는 임금을 늘려야 한다. 임금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 현재는 같은 임금을 가지고 누가 더 먹느냐의 싸움이 되어 버렸다. 노인 한 명 덜 먹여서 젊은이 둘을 먹여 살리자고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다. 기업들이 임금을 더 주도록 유도해 전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키워야 한다.

경제가 어려운 것이 귀족노동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한국의 노조조직률이 10% 밖에 안 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얼마 전 노조 가입을 적극 권유했다. 개혁을 하려면 그 정도 아량은 있어야 한다. 노동개혁을 할 때 노동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돌려선 안 된다. 오히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지원, 최저임금 인상, 증세를 통한 사회복지제도 확충 등을 통해 노동시장을 정상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정책결정의 프로세스를 경험해 보셨다. 왜 이런 개혁안이 나온다고 보시나?

=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많은 의견을 듣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심한 것 같다. 혼자 마음먹으면 해버리는 것 같다. 같이 하는 느낌은 안 든다. 그래서 답답하다.

- 지금까지 양극화라는 큰 줄기를 갖고 말씀하셨다. 이 외에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저출산, 고령화가 1~2년 사이에 나온 문제가 아닌데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못 찾고 있는 것 같다.

= 우선 저출산, 고령화는 모든 나라가 겪는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경제적 인센티브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많다. 다른 것을 좀 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사회의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미혼모의 아이도 돌봐주고, 젊은이들이 자식들 학교 보내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등 비경제적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렇게 좀 나아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

-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정부이지만, 더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 정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민감하게 대응하는 반면, 경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기 생활에 부담이 가중되면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나올 것이다. 그냥 놔두면 언젠가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해결책이 나오겠지만, 될 수 있으면 속도를 내서 빨리 고치자는 것이 동반성장을 주장하는 이유다. 불행한 일이 없도록.

'기-승-전-동반성장.' 정운찬 전 총리와 인터뷰를 하며 그의 머리 속에 동반성장이라는 글자가 얼마나 깊이 각인돼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혹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난다면 굳이 시작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는 쇼펜하우어 말을 인용했다. "모든 진리는 첫째 단계에서 조롱당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심한 반대에 부딪치며, 셋째 단계에서야 비로소 자명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면서 동반성장론이 우리 사회에서 셋째 단계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라고 자평했다.

인터뷰 및 정리: 서누리, 심나리 선임연구원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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