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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 북한은 당 창건 70년을 기념할까?

이제 3대 세습이라는 전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공산주의 역사 속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을 저지른 북한의 김씨 왕조는, 오늘 자신들의 독재의 수단인 북한의 집권당 조선노동당이 창건 70주년을 맞았다고 기념함으로써, 70년 전인 1945년 10월 10일 김정은의 할애비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었던 것이 실은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던 사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실토하는 것이라 하겠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10.10 08:31
  • 수정 2016.10.10 14:12

오늘은 북한의 김씨 왕조가 자신들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의 창건 70주년 기념일이라고 주장하는 날이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북한 정권은 핵실험을 하느니 미사일을 발사하느니 요란을 떨었지만 올해는 준비 부족(응?)인지 다행히 그런 난리는 없을 모양이다. 그런데 70년 전이라면 1945년 10월 10일인데 그 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그 날을 조선노동당 창당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그 배경을 한 번 살펴 보기로 한다.

191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다음, 공산주의를 세계 다른 나라들에 퍼뜨리는 일을 맡았던, 소련의 대외정책 도구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1국 1당 원칙"에 의하여 하나의 나라에는 공산당이 하나밖에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여 왔다. 그러기에 일제시대 상당수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나라가 없었으니ㅜㅗ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방된 한반도에는 서울에 이미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군사적 편의"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한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정치적 분단이 확정이 되지 않은 상황인지라 "1국 1당 원칙"이라면 북한 땅에는 따로 공산당이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파시즘과 맞서면서 영미(英美)와 손을 잡으며 "호의의 표시로" 코민테른을 해체하기는 했지만, 코민테른 때 만들어진 "1국 1당 원칙"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상황이었으나 당초부터 소련 군정(軍政)과 김일성 일파는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 소련의 위성국가를 세운다는 또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먼저 공산당부터 별도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1국 1당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바로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分局)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북한에 사실상 독립된 공산당을 하나 더 별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서울에 있던 박헌영이나 그를 추종하던, 말하자면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반발을 했으나 당시에는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마저도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던; 지엄한ㄷㄷㄷ 스탈린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지라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지 불과 두 달여만에 이렇게 소련 군정과 김일성 일파에 의하여 분단의 씨앗은 이미 뿌려진 셈이다. 그리고 박헌영이 일단 조선공산당이 이렇게 갈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뒷날 결국 김일성의 손에 죽게 되는 그의 비극적 운명의 전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적 느낌이기도 하다.

소련 군정과 김일성은 이렇게 먼저 공산당을 분당시켜 북한만의 독자정권 수립의 준비를 하더니만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성립시켜 사실상 행정기관마저 갖춘다. 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임시'자를 달고는 있었지만 해방정국 최대 현안인 농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해치운다. 남한이 해방 정국에서 농지개혁을 했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으로 지금까지 역사학계가 시끄럽고 중국 장개석의 국민정부, 남베트남이 농지개혁 실패로 패망했으며, 필리핀이 아직까지 농지개혁을 못해서 지주들 손아귀에 정부 권력이 주어져 있는 것만 살펴 보아도 농지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 수 있으며, 그러기에 농지개혁을 단행할 정도였던 권력을 행사한 북한이 아직 정부를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남한에도 강력한 선전효과를 보였으나 남한이 6.25 직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농지개혁을 가까스로 실행하는 바람에 러시아, 중국, 남베트남에서처럼 공산측으로 정세를 극단적으로 유리하게 만드는 이벤트로 작용하지 못했다. 또한 북한은 이렇게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던 농지를 다시 국유화하여 집단 농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북한이 농지개혁을 실시하면서 주장했던 "토지는 밭갈이 하는 자에게"란 것은 정말 사탕발림 구호에 그쳤고 농민들은 국가를 지주로 하는 소작제에 다시금 얽매이게 된 셈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이미 북한이 사실상 정부를 만들고 토지개혁 같은 조치를 해치우는 와중에 남한에서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 영, 소 3개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된 이른바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하여 찬반으로 편이 나뉘어져 좌우대립이 격화되었다. 물론 북한은 소련 군정의 입장에 따라 신탁통치 찬성의 일관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러자 북한의 이런 움직임에 주목했고 아마도 당시 남한 정치인들 중 미소냉전의 본질을 유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그렇다고 해서 훗날 독재자로 귀결되고 마는 이승만이 정의냐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남한도 통일에 앞서 임시로 무슨 위원회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른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의 운을 띄운다.

결국 남한만의 단독 선거, 단독 정부 수립 과정이란 것은 북한이 그보다 반년 이상 전부터 소련 군정의 적극적 입김 아래 맹렬히 추진해 오던 사실상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한 대응책이란 의미가 더 컸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렇게 적대적인 두 체제가 남북한에 각각 정부를 만들어 가고, 또 그 뒤에는 세계의 2대 최강국들이 후원해 주고 있는 상황은 두 체제의 무력 충돌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고 했던 움직임이 바로 여운형 선생님과 김규식 선생님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이고 그 좌우합작운동이 실패-_-한 다음에는 김규식선생님은 김구선생님과 함께 분단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로 북한의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추진하나 이 역시 북한정권의 선전에만 이용;당하고 만다.

이렇듯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은 덜컹거림이 꽤 있었으나 북한에서 공산정권이 착착수립되어 가는 모습에 조바심;을 느낀 박헌영이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6년 대구 10월 폭동, 1948년 김달삼의 제주도 폭동과 14연대 반란 사건 등을 연달아 일으키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 한반도에 좌우합작의 중도우파 쯤의 정부를 세우면 되겠거니 했던 미국의 정세인식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포기하고 남한에 반공(反共)정권을 세우는 걸로 전환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결국 한반도 문제는 유엔이 결정하게 되는데 당시 유엔은 대만이 유엔에서 쫓겨난 1970년대초와는 달리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시절이라 미국도 사실상 분단을 감수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한반도 전체에서의 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단 입국을 소련 군정과 북한이 막은 것은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 귀결이었고.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1948년 5월 10일 실시)에 남북협상파인 김구, 김규식 선생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던 중도파의 안재홍 선생님, 임정요인 조소앙 선생님 등 우파 내지 중도우파, 중간파 인사들도 대거 불참했고 박헌영의 남로당이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운동을 벌였음에도 김달삼의 폭동이 성공적;이었던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남한 전역에서 총선이 열렸고 대부분의 남한 유권자들이 참여하여 제헌의회 의원들을 선출했다.

일단 의회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나면 자체의 동력을 지니게 되는 것인지 선거를 보이코트했던 남한의 정치세력들은 급속히 몰락했고 당초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중간파 인사들(안재홍, 조소앙 등)은 2년 후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거 참여하여 대한민국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에도 남한에서 선거를 보이코트한 세력들은(85년의 2.126. 총선 때의 동교동계 일부 세력)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기는 했으나(쿨럭;) 짜르가 만든 가짜 의회인 두마라도 들어가서 싸우라며 "돼지 우리에서라도 싸우라"고(응?) 한 레닌의 말처럼 의회의 중요성은 남한에서도 첫번째 총선에서부터 두드러진 셈이다. 남한의 제헌의회는 총선이 실시되지 못한 북한지역을 위해서 100석의 의석을 남겨 두었다. 이제 대한민국 국회는 더 이상 그런 상징적 조치조차 취하지 않지만-_-; 국토가 마악 분단된 그 시절만 해도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싶어 분단 70년째를 보내고 있는 입장에서는 좀 비감해지는 것이다;

한편 북한은 남한이 유엔결의와 총선을 통해 북한에 대항하기 위한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밟아가자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뒤집어 씌우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우선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은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그간 팥다발 같은 비난을 퍼부어 온 남한의 김구선생님과 김규식선생님께 민족 분단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며 '남북협상'을 하자며 북한으로 두 분을 초청하고, 그간 북한 곳곳에 있던 두 분을 비방하는 선전물들을 황급히 철거하고 지우느라 난리를 피운다. 김구선생님과 김규식선생님은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성의를 김일성이 보여 줄 것을 기대했고 독립운동의 동지이기도 했고 북한으로의 초청장을 김일성과 연명으로 보냈던 김두봉의 선의에도 기대했지만 두 분 선생님을 오로지 남한 단독정부 수립보다 북한이 늦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만 활용하려고 했던 김일성이었는지라 (즉 김일성은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식의 남북협상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다음으로 김일성은 자신이 세우는 정부가 남한 사람들의 지지도 광범위하게 받는다고 조작하기 시작한다. 남한은 국회에 북한 지역을 대표할 의석 100석을 남겨 두는 상징적인 조치로 끝냈지만 북한은 실제로 남한인들이 비밀리에 북한의 국회격인 최고인민의원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방식은 연판장이었는데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후보자를 지지한다는 지장을 찍어서(풉)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그걸 보냈다는 건데, 한 사람이 지장을 열 번을 찍었든 백 번을 찍었든 도저히 이것을 검증할 방법이 없었고, 이런 '선거'를 통해서 남한 지역을 대표한다는 360여명의 대의원들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그 대의원들이란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 총선거를 저지했기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회의장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출현한 김달삼과 같은 남로당계열 인사들로 김일성과 당시에는 연합정권을 형성했던 박헌영의 수족들을 사실상 그냥 꽂아 넣은 것이었다.

북한 지역에서의 '선거'도 흑백 투표함 '선거' 즉 사실상 공개투표로 진행되었고. 이렇게 선의를 가진 애국지사님들을 그저 선전용으로만 이용해 먹고 가짜 선거로 민의를 조작해서 자기네 편 인사들로만 정부를 구성하여 김일성이 1948년 북한정권 수립을 선포했던 것이었다. 그런 김일성의 민족사적 범죄행위에 알게 모르게 가담했던 김두봉이나 박헌영 같은 이들마저 김일성은 모조리 숙청했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손자대에 세습까지 시키고 있으니, 아마도 북한정권 수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당시의 소련측 인사들마저도 지금과 같은 기괴한 북한 정권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시 북한 정권의 효과적인 선전선동술과 남한의 상대적 미숙함이 겹쳐 남한이 분단에 책임이 있다든지 정통성이 북한에 비하여 떨어진다든지 하는 허언들이 아직까지도 떠돌고 있으나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다 근거없는 주장들에 불과하다. 남한은 초기에 민주주의에는 많이 부족한 상태로 출발했으나 그래도 부단히 이런 정통성을 보완해 왔다고 생각하며, 물론 그 과정엔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분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이제 3대 세습이라는 전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공산주의 역사 속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을 저지른 북한의 김씨 왕조는, 오늘 자신들의 독재의 수단인 북한의 집권당 조선노동당이 창건 70주년을 맞았다고 기념함으로써, 70년 전인 1945년 10월 10일 김정은의 할애비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었던 것이 실은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던 사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실토하는 것이라 하겠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10일 0시(남한이 표준시로 사용하는 동경시 기준 0시 30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참배에는 김기남·최룡해·최태복·김양건·곽범기·오수용·김평해 당 비서를 비롯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 일꾼들이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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