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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가와 전통주사랑꾼이 만든 특별한 공간 | '안씨막걸리'네 사람들

너무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되며, 상대방의 말소리도 적당한 크기도 들려야 흥도 나고 술맛도 돈다.

  • 황해원
  • 입력 2015.10.08 11:55
  • 수정 2016.10.08 14:12

설치미술가와 전통주사랑꾼이 만든 특별한 공간

'안씨막걸리'네 사람들

1900년대 초. 미국 건국 이후 이제 막 150년 역사를 품었을 무렵 젊은 작가와 예술가, 교수들은 미국 예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대중미술과 추상예술 사이에서 고유의 예술을 정립하고자 했고, 아방가르드하면서 독특한 문화세계를 자유롭게 펼치며 '고전'을 창조해갔다. 미국의 대표 미술관인 휘트니뮤지엄과 함께 미국 예술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한국술집 「안씨막걸리」를 통해 안상현 대표와 이정형·오유미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술이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새로운 문화 공간을 구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언젠가는 전통술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화이자 고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대미술의 힘으로 100년 역사의 문을 열다

"30년도 더 된 건물이었다.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 모양으로 단정하게 떨어지는 요즘 건물들과는 구조부터 달랐다. 모서리마다 삐뚤빼뚤하고 입구와 건물 안쪽이 분리돼있어 공동작업장의 느낌도 전혀 없는 데다 바닥도 들쑥날쑥하고..."

도저히 정체를 모르겠는 2층짜리 건물. 두 층 다 합해야 겨우 18평인 작은 공간을 '한국의 신문화와 독창적인 예술이 묻어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니, 안상현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정형 작가는 그가 딴 세상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지극히 이상주의자거나.

그릇디자이너로 유명한 '김선미그릇'의 김선미 선생이 아니었으면 이들의 만남도 없었다. "특이한 전통술전문점을 하려는 젊은 남자가 있는데..."라는 단서를 달고 김선미 선생은 이정형·오유미 부부 설치 미술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술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고 많은 예술가들의 철학과 아이디어를 모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을 구현하고 싶다'는 안상현 대표와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사람은 두 부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찾지도 않는 이름 모를 한국 전통술 30여 가지를 고가에 들여놓지를 않나 메뉴도 한식 위주로 매일 다르게 낼 거라고 하고, 무엇보다 음식점 인테리어에 설치미술의 요소를 넣으려는 생각을 하다니." 이정형 작가는 안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여러모로 독특했다는 것이다.

「안씨막걸리」는 요즘 가장 핫한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에 위치해 있다. 붉은 벽돌이 겹겹이 쌓인 외관이 얼핏 가정집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다방 같기도 하다. 30년이 넘은 이 건물에는 오랜 시간 미용실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 하는 곳 따로 샴푸 하는 곳 따로, 화장실과 창고 각각 따로 분리되어 있다 보니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음식점과 미용실은 방문 목적이 다른 만큼 각각의 공간 활용도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려면 전면 공사를 다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간 중간 튀어나와 있는 벽면도 제거해야 하고.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얼마나 좋은 술집을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건축가나 설비업자는 아니니까..."

오유미 작가는 완벽하지 않은 공간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고전이 왜 고전이겠는가. 오래 되고 낡아 불편해도 옛것이 지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곳도 현대의 관점과 기준만 갖다 대다보니 요상해 보이는 것일 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히 재미난 공간이었다.

▶매장 외관. 얼핏 가정집 같기도 하고 오래된 다방 같기도 하다. 왠지 들어가면 1960~1970년대 가요와 함께 쌍화탕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21세기 한국술집 시대

안씨막걸리 주인장인 안상현 대표는 이력이 재미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한때는 소셜커머스 기업에서 전략기획실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출마 경험도 있고 현재는 당 부대변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컨설팅도 하고 마케팅도 하고 정치도 했다. 이번엔 술이다.

"술을 무지하게 좋아한다. 매일 나가는 게 술값인데 이왕이면 원가에 마시면 좋으니까(웃음),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와인 바나 이자카야, 맥주집들은 흘러넘치는데 왜 우리 술 파는 곳은 한복 걸려 있는 민속주점뿐인지. 우리 술에 관심이 많아 솔송주, 평양소주, 미르, 추성주 등을 찾아다녔는데 파는 곳이 많지 않아 결국엔 양조장에 직접 문의해야 했다. 제대로 된 한국 술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술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한국술집'이라는 새로운 업종과 업태를 만들고 싶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투자자 100여명을 모았다. 그의 목표가 단순히 '젊은 남자 혼자 가게 차려 먹고 사는 일'은 아니었으니 안 대표의 꿈을 공감하고 지지해줄 이들의 뜻을 모은 것이다. 일종의 '대의명분' 같은 것이었다.

"안씨막걸리가 신문화가 되기 위해선 기존에 없는 걸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매장이지만 최대한 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을 받기 위해 투자자를 모았고, 인테리어도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내려고 했다. 미국 휘트니뮤지엄처럼 새로운 감각을 가진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왼쪽부터 설치미술가 오유미, 이정형 씨 그리고 안씨막걸리 주인장 안상현 씨다. 안 씨의 중절모가 인상적이다.

8명이서 뚝딱뚝딱... 각자 내공과 센스 십분 발휘

그들은 재작년 겨울 처음 만났다. 이정형, 오유미 작가를 중심으로 그래픽디자이너, 조명미술가, 나무예술가 그리고 방짜유기 무형문화재 77호인 이봉주 선생과 그릇전문가 김선미 선생까지 모였다. 흔치 않은 시도이자 모험이었다.

그러나 명확한 주제나 콘셉트가 없어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이정형 작가는 "설치미술은 크로키나 조형물처럼 드러나는 미술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수단과 소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소통이 어려웠다. 안상현 대표가 말하는 그 '느낌적인 느낌'을 이해하고 실행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건물 하나하나 살펴보고 만져보면서, 젊은 일꾼들이 모여 몇날 며칠 밤새 막걸리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국 답을 찾았다. '잘 먹고 잘 마시는 공간'.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술집인데 더 이상 무슨 고민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다음 날 나무예술가 장준호 씨는 혼자 낑낑거리며 큼직한 원목 상판을 들고 왔다.

'화이트 오크'라 불리는 이 나무판은 수입 후 제재부터 건조, 도장, 마감 과정까지 공을 많이 들여 일반 수입목보다 2~3배 비싸게 판매하는 자재다. 장정 두어 명을 붙여놔도 모자랄 만큼 큼직한 화이트 오크를, 준호 씨는 며칠간 붙들고 앉아 직접 톱으로 자르고 다듬었다.

상판과 상판 사이는 본드와 못 대신 나비장(두 개의 목재 사이에 끼워 벌어지지 않게 잇는 나비 모양의 나무 조각)으로 곱게 이었고 상판 끝은 끌로 갈았다. 매장 안에만 두면 수분이 찰까 싶어 볕 좋은 날은 몸집만 한 합판을 들고 밖으로 나가 종일 말렸다.

준호 씨의 손에서 3개의 테이블이 탄생했다. 테이블 끝을 매만져봤다. 그가 왜 기계 대신 끌로 일일이 갈아 표면을 꺼끌꺼끌하게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기계로 마감 작업을 했다면 매끄럽긴 해도 자연의 멋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손때가 타야 그 생명력이 오롯이 '사람'의 것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매장 내부 모습. 나무예술가 장준호 씨가 화이트 오크로 작업한 목재 테이블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계 대신 끌을 사용해 일일이 테두리를 다듬었다. 이곳은 30여년 간 미용실이었다고 한다.

그릇과 접시, 주전자 등의 식기는 김선미 선생이 제작했고 수저는 방짜유기 명장 이봉주 선생이 담당했다. 그래픽디자이너 추미림씨는 메뉴판에 들어갈 30여 가지의 우리 술 포장패키지를 하나하나 그렸다. 조명미술가는 술 마시기 좋은 최적의 분위기를 위한 조도를 연구했다. 요란하지 않게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다 보니 길이 생겼고 답이 보였다.

"안씨막걸리를 꾸리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국수주의와 사대주의, 이색주의를 지양하자는 것이다. 1930년대 경성시대를 옮겨놓은 듯한 복고 콘셉트로 한국 문화를 어설프게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양식 아방가르드를 구현하는 것도 식상했다. 어쨌거나 특정 '양식'이 없어야 한다는 게 전제였다."

바로크와 복고 양식을 제외하면 결국 '모던'과 '이색주의'인데 안상현 대표에게 모던은 너무 식상했고, 원색과 독창적인 조형물을 이용한 설치예술은 유행처럼 금방 빛바랠 것 같았다. "가장 조심해야 할 건 '튀고 싶은 조급증'이다. 무엇이든 절제하고 힘을 빼야 오래가니까."

▶매장 입구. 천장은 전통 한옥의 대들보를 연상하며 만든 조각물이다. 앞에서 보는 것도 멋있지만 뒤태가 훨씬 근사하다.

공간의 재해석, 안씨막걸리의 재해석, 한국예술의 재해석!

준호 씨가 만든 화이트 오크 테이블 세 대가 들어서니 공간이 가득 찼다. 워낙 비싼 목재라 원가 때문에 고민했는데 만들어놓고 나니 잘 했다 싶었다. 나무는 자연인데, 자연의 이치를 돈으로 계산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벽면은 먹색 페인트로 채웠고 테이블마다 흑색 도자기 재질의 조명을 각각 설치했다. 매장 가장 안쪽에 설치한 구름 형상의 조명은 남달랐다. 스티로폼 박스를 열선으로 깎아 코팅한 작품이었다. 조각처럼 깎은 스티로폼을 딱딱하게 굳혀 천장에 걸고 안쪽으로 LED전구를 달았다. 강한 LED 조명이 움푹 팬 스티로폼을 거치자 더욱 빛났다. 이 자리는 현재 단골들의 전용석이 됐다.

오유미 작가와 이정형 작가는 한동안 벽돌만 죽어라 쌓았다. "머리 질끈 묶고, 몸빼바지를 입고 벽돌에 시멘트를 바르고 있으니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이 '새댁, 신혼집 꾸리는 거야? 언제 입주해?' 하며 인사하고 가셨다. 신혼집 대신 술집 들어선 것을 보곤 아마 많이 놀랐을 거다(웃음)."

같은 공간이라도 전혀 다른 시각과 관점을 투영해 제3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설치미술가들의 일이다. 그래서 설치미술은 자유롭고 어떤 쪽으로든 개방돼있다. 하지만 이곳은 개인 전시 공간이 아닌 데다 무언가를 먹으러 오는 목적성이 분명한 장소다. 오유미 작가는 설치미술을 구현하는 데 있어 '목적성'이 있느냐 없느냐,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접근 자체가 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미용실처럼 온전히 거울만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사기 위해 진열된 상품만 쳐다보는 공간도 아니다. 모든 요소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분위기여야 한다. 그러면서 주방과 화장실, 테이블 간의 동선도 생각해야 하고. 친한 사람끼리는 물론이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오는 곳이 바로 술집 아닌가. 사람 간의 간극이 너무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되며, 상대방의 말소리도 적당한 크기도 들려야 흥도 나고 술맛도 돈다. 세세한 부분들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정형 작가는 "외식업은 1차 목적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어렵다. 먹고 마시는 동안 행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흥미롭게 생각했던 텍스처나 감정, 주변의 환경을 계속해서 관찰했다"고 이야기한다.

▶스티로폼 박스를 열선으로 깎아 코팅한 조명이 돋보인다. 조각처럼 깎은 스티로폼을 딱딱하게 굳혔고 안쪽에는 LED전구를 달았다.

▶장준호 씨가 만든 작품 손잡이. 시간이 지 나고 때가 타면 더욱 멋있어질 것 같다.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

안씨막걸리는 2014년 6월 문을 열었다. 처음엔 뭐하는 집인지 몰라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안씨막걸리'가 새겨진 정사각형 모양의 간판도 눈에 잘 띄진 않았다. 몇 달간은 파리만 날렸다.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외식업은 지극히 현실인데, 젊은 사람들이 겉멋만 잔뜩 들어 예술이니 뭐니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상처도 받았지만 모든 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진심이 통할 것이라 믿었다. 다행인 건 주변에 나 같은 전통술 사랑꾼이 많아 생각보단 빠른 시간 안에 단골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청주와 약주 그리고 막걸리까지 우리 술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 입소문이 많이 났고 지금은 평일·주말 할 것 없이 늘 만석이다."

안주는 한식 위주로 매일 종류를 바꿔가며 10가지의 '오늘의 안주'를 낸다.

주방에는 세 명의 요리사가 자리를 지키며 직접 장을 보고 그날그날 레시피를 만들어 즉석요리를 낸다.

매장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안 대표는 얼마 전 집도 매장 바로 뒤쪽으로 옮겼다. 이정형 작가와 오유미 작가는 거의 집처럼 이곳을 드나든다. 그들이 생각했던 이상이나 가치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는가를 손님들 표정으로 확인한다.

"시작은 거창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고객도 원하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안씨막걸리를 찾은 이들의 표정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공간에 테이블 하나 더 두고 매출을 높이려는 것보다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요소를 넣는 게 중요하다. 인테리어는 결국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작업이다."

500~600년 후대의 예술가들이 지금의 한국 시대를 떠올리며 '21세기 안씨막걸리 시대' 혹은 '한국술집 주의'를 거론한다면? 안씨막걸리를 '한국예술의 진보'로 해석하며 요소별 가치를 분석하고 재창조해 나간다면?

안씨막걸리 사람들에겐 정말 꿈만 같겠다.

그리고, 왠지 가능할 것도 같다.

* 이 글은 월간식당 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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