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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그리고 한글

정보 유통의 혁신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저는 한글 역시 혁신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들어 식민지 운영의 경험 없이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글이 중요한 기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분리된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소리를 만듭니다. "ㄱ + ㅏ = 가"가 되듯이, 수학 방정식 같습니다. 발음할 때 입술 모양, 혀의 형태, 성대 모습까지 실증 분석해서 자음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글은 곧 과학입니다.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투영해서 하늘, 땅, 그 사이에 선 사람의 모습으로 모음을 형상화했습니다. 우주 원리와 인문학까지 투영했습니다.

  • 함석천
  • 입력 2015.10.09 10:10
  • 수정 2016.10.09 14:12
ⓒ연합뉴스

"인류의 삶을 바꾼 혁신 기술은 무엇인가?" 이런 주제로 열린 토론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되짚어 인류의 삶을 바꾼 혁신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세계'라는 틀, '인류'라는 틀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토론 끝에 두 가지 기술(또는 사건)로 논의가 압축되었습니다. 인쇄술과 인터넷이었습니다.

하나는 15세기 금속활자 인쇄술입니다.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성직자 계층이 독점하던 성경을 개인이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종교혁명의 싹이 텄습니다. 왕족과 귀족이 독점하던 서적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르네상스와 계몽사상의 기반을 형성했습니다. 아울러 문맹률이 낮아졌습니다. 산업혁명 역시 증기기관에 관한 책자 보급이 없었다면 감히 혁명이란 말을 붙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럽은 15세기 인쇄술을 기반으로 정보 유통의 혁신을 달성했고, 사회 변화 과정을 거쳐 19세기부터 세계를 지배하는 발판을 닦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Time지를 발간하는 잡지사는 145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로 성경을 발간한 사건을 지난 1,000년 동안 세계를 변화시킨 100대 사건 가운데 1위로 꼽기도 했습니다(The Life Miliennium: The 100 Most Important Events and People of the Past 1000 Years, 1998).

인류의 삶에 창조적 혁신을 가져온 또 하나의 기술은 인터넷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인쇄술과 인터넷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두 기술 모두 정보 유통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인터넷 없는 생활은 생각하기 곤란합니다. 앞으로도 인터넷의 발전 영역은 무궁무진합니다.

한글은 어떤가요? 한글도 혁신 매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보 유통의 혁신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저는 한글 역시 혁신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들어 식민지 운영의 경험 없이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글이 중요한 기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분리된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소리를 만듭니다. "ㄱ + ㅏ = 가"가 되듯이, 수학 방정식 같습니다. 발음할 때 입술 모양, 혀의 형태, 성대 모습까지 실증 분석해서 자음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글은 곧 과학입니다.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투영해서 하늘, 땅, 그 사이에 선 사람의 모습으로 모음을 형상화했습니다. 우주 원리와 인문학까지 투영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세상이 연결되는 지금 시대에 한글이 스마트폰 자판처럼 현대 기술과 딱 어울리는 문자가 되리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대를 초월한 한글의 예지력은 한글의 원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한글은 우리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타고 앞으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배우려 하리라 예상합니다. 좀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한글을 알리기 위해 힘 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터넷이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날로 씀에 있어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는 애민 정신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글을 배우고 익혀 답답함을 풀어주고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생각, 여기에 바로 한글이 전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인쇄술이 퍼트린 혁신, 인터넷이 담당하는 역할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종종 우리 선조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사용했던 1377년 무렵에(새로운 발견으로 이 시기는 더 앞당겨질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1440년보다 160년 이상 앞서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합니다.

한글을 포함해, 우리는 예부터 소중한 자산을 많이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평가에 소홀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젊은 세대가 그 어느 시대, 어느 세대보다 공정하고 보편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편하게, 그리고 빠르게 어떤 문화든 흡수하는 대단한 흡입력을 지녔습니다. 이런 눈으로 평가하는 우리의 가치는 정확하다고 믿어도 됩니다. 서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들어주고, 여기에 자신감만 더하면 됩니다.

반 세기만에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룬 성과는 눈 부시고 대단한 것입니다. 이제 급한 성장 뒤편에 힘겹게 따라오는 우리의 정신 문화를 챙겨야 합니다. 경제 성장률 같이 숫자로만 매겨서 바라보는 세상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한글날을 맞아, 우리가 가진 것들을 좀 더 소중하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가치, 아름다움, 그리고 이야기를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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