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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의 투수 등판과 스포츠 낭만주의

제닝스 감독은 "이치로를 마운드에 세우기 위해 이치로와 한 달 반 이상 계속 얘기를 하며 기회를 노렸다. 이치로의 투수 출장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런 이벤트는 선수로서 이치로가 이룬 것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틈틈이 투구 연습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치로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투수한테도 나쁜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김창금
  • 입력 2015.10.07 07:19
  • 수정 2016.10.07 14:12

이은 감독의 1998년 야구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제목에서부터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뜻을 암시한다. 주인공인 야구심판 범수(임창정)와 톱 탤런트 현주(고소영)의 풋풋한 사랑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되바라지지 않았던 1990년대 낭만주의 시대에나 상상할 수 있었던 풍경이다. 과연 지금 그런 식의 스토리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1998년 IMF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세상 인심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모질고 매몰찬 시대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스포츠를 주변부 배경으로 삼기보다는, 스포츠 선수들을 중심에 내세운 정통 영화가 많이 등장했다. 1991년 지바 세계탁구대회 남북탁구단일팀을 주제로 다룬 <코리아>, 롯데 최동원과 해태 선동열의 투수전을 다룬 <퍼펙트 게임>, 스키점프 대표팀의 애환을 다룬 <국가대표>, 2004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은메달 이야기로 꾸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이 떠오른다.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에피소드를 극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큰 줄기에서는 사실에 충실하다. 젊어 타개한 역도산의 일대기나 일본 오사카 조선 고급학교(오사카 조고) 럭비 선수들의 전국대회 4강의 기적을 다룬 <60만번의 트라이>도 있었다.

갑자기 영화 얘기가 떠오른 것은 일본의 천재 타자 스즈키 이치로(42)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깜짝 등판해 1회를 마무리 짓고 내려간 일 때문이다. 메이저리그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야구 무대에서 타자를 투수로 내세운다는 발상 자체도 놀랍고, 투수로 변신해 1회를 막아냈다는 것도 신기했다. 정말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앞으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치로는 이날 펜실베이니아주 시티즌스뱅크파크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원정 경기에 8회말 팀이 2-6으로 뒤진 상황에서 4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따라잡기는 버거워 보였고, 플레이오프 탈락이 결정된 상황에서 승패에 중요한 의미는 없었다. 이치로는 1이닝을 2피안타(2루타 2개) 1실점으로 처리하고 내려왔다. 포수가 공을 잘 받지 못해 뒤로 빠진 공이 하나 있었지만 18개의 공 가운데 11개를 스트라이크 존으로 던졌다. 9회를 마친 양팀의 최종 점수는 마이애미의 2-7 패.

타격의 천재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서만 2935개의 안타를 쳤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1278개)까지 합하면 통산 4213개에 이른다. 2004년에는 시애틀에서 262개의 안타로 84년 만에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새로 세운 바 있다. 올해는 마이애미에서 2할2푼9리로 팀 기여도가 크게 떨어졌지만, 153경기에 출장했다.

이날 공을 던질 때도 조금은 어설펐지만 정통 투수들의 폼과 유사한 형태로 공을 던졌다. 엉터리가 아니었다. 필라델피아 타자 두 명한테 2루타 두 방을 맞을 때는 자칫 망신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치로는 끝까지 역투를 펼쳤다. 최고 구속은 88마일(142㎞)로 비교적 높았다. 마이애미나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모두 더그아웃에 선 채 이치로가 어떻게 공을 던지는가를 호기심에 가득 차 지켜봤고, 마운드에서 아웃 카운트 세 개를 잡고 내려올 때는 동료들이 큰 박수를 보냈다. 이치로도 경기 뒤 인터뷰에서 "고교 때 투수를 하고,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도 잠깐 공을 던진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던지고 싶었던 꿈을 이뤘다"며 감격해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나서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이뤄진 것은 그의 스타성에 더해 댄 제닝스 마이애미 감독의 결단이 큰 구실을 했다. 제닝스 감독은 "이치로를 마운드에 세우기 위해 이치로와 한 달 반 이상 계속 얘기를 하며 기회를 노렸다. 이치로의 투수 출장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런 이벤트는 선수로서 이치로가 이룬 것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틈틈이 투구 연습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치로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투수한테도 나쁜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직접 해보니 너무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투다.

이치로의 투수 등판은 야구에 대한 이치로의 순수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치로는 2001년 시애틀 입단 첫해 3할5푼의 타율을 시작으로 10년간 연속 3할대 타율로 매년 200안타 이상을 쳐냈다. 그 뒤 2할대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이애미 이적 첫 해인 올해는 2할2푼9리로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타율은 여전히 3할대(0.314)다. 앞으로 계속 출장할수록 평균타율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치로는 "체력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몇 년을 더 뛰겠다"고 말했다. 7일 마이애미 구단과 1년 재계약에 성공한 이치로의 몸값은 200만달러 수준으로 전성기에 비하면 초라하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 65개의 안타를 쳐 메이저리그 3천 안타 고지를 넘더라도 현역으로 남을 가능성은 있다. 야구장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끝없는 도전 정신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치로의 마운드 등판은 메이저리그의 팬들을 위한 서비스로도 읽힌다. 미국의 젊은 층은 최장 4시간에 이르는 야구 경기에서 점점 이탈하고, 반면 야구의 인기는 오래된 충성 팬들에 의해 지탱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메이저리그사커(축구)가 장래에 야구 인기를 추월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이치로의 투수 등판은 팬들한테 신선한 볼거리를 안겼다.

그렇다면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뤄지기 어렵다고 본다. 이치로 같은 선수도 없지만, 선수 포지션을 바꾸면서까지 팬 서비스를 할 여유를 갖춘 팀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유럽 축구에서는 어떨까. 만약 경기 중 이벤트를 위해 평소 골키퍼를 해보고 싶어 하던 유명한 선수를 잠깐이라도 골키퍼 포지션으로 바꿔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축구는 야구보다 보수적인 데다, 1골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행여 베팅이라도 하는 팬들이 있다면 당장 승부조작이라고 들고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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