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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으로 옮겨온 유홍준의 답사 무대

유홍준의 글이 달라졌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친절해졌다. 한때 강고(强固)를 넘어 일편 생경하기 했던 필봉이 어느 틈엔가 둥글어졌다. 유머에도 독성 가시가 걸러졌다. 나이도 웬만하지만 나이보다도 더 '어른'이 된 것 같다. 자신의 숙성을 스스로 대견히 여기는 듯한 자술이다. 저자의 만보완상(漫步玩賞)에 동참한 명사 문화유객(文化遊客)들의 훈수 객담도 별미다. 선뜻 길 나서지 못하는 독자는 안방에서 책을 벗 삼아 느긋이 와유(臥遊)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한국인의 특전이다.

  • 안경환
  • 입력 2015.10.06 06:58
  • 수정 2016.10.06 14:12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남한강편 (창비, 2015)

명절 세태가 달라졌다. 고속도로 귀성나들이도, 차례 상 준비도 성가신 노역(勞役)으로 전락했다. 조상의 덕담이나 험담도 어린 자손들에게는 무의미하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놀이도 텔레비전 프로도 없다. 근래 들어서는 해외여행이 오히려 인기다. 제각기 어떻게 휴일을 넘길까, 궁리에 바쁘다. 실로 공허하다. 민족 전래의 명절 한가위, 이 하루만이라도 '반면년 문화민족'의 전통에 '사 맞는'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낸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한국인의 자부심이 되었다. 북한 땅도 일본 열도도 그의 부지런한 발길 덕분에 답사기의 무대에 편입되었다. 마치 영화 개봉일이라도 맞추듯 올해 을미년 추석에 유홍준이 새 답사기를 펴냈다. 국내 편 제 8호다. 이번에는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어머니 같은 남한강' 유역이다. "고운님 여의옵고(중략) 울어 밤길 예놋다." 어린 폐왕을 귀양길에 호송했던 왕방연의 시조다. '단종애사(端宗哀史)'가 묻힌 영월 청령포를 떠난 유유한 뱃길은 단양, 제천, 충주, 원주를 거쳐 여주 신륵사에 닿는다. 시, 서예, 회화, 조각 등 풍성한 문화의 잔치가 이어진다. 선인들의 행적이 다채롭다. 퇴계 이황과 기녀 두향의 풍류를 넘은 애틋한 정사(情絲)도 그중 하나다.

이번 책에는 유난히 그림이 많다. 조선시대 회화사가 '전공'이라는 저자의 배려다. 옛 문헌과 일화만이 아니다. '남한강의 시인' 신경림의 시 네 편이 풍광에 녹아 있다. "아, 신화 같은 다비데군들!" 4.19의 시인, 신동문의 절필시. '내 노동으로'도 담겨있다. 글쟁이들의 '황성옛터'인 정호승의 시가 애조를 더한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廢寺地)처럼 산다."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그뿐이랴. 신세대 재간둥이 방송인 김제동과 '모태미인' 탤런트 김태희가 '청풍 김씨'라는 발견이 재롱스럽다. 문화재청장 시절의 체험담도 거북살스럽지 않다.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모범 코스를 덧붙인 친절도 살갑다. '행유여력'(行有餘力)이면 다음 '벼슬'로 관광공사 사장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유홍준의 글이 달라졌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친절해졌다. 한때 강고(强固)를 넘어 일편 생경하기 했던 필봉이 어느 틈엔가 둥글어졌다. 유머에도 독성 가시가 걸러졌다. 나이도 웬만하지만 나이보다도 더 '어른'이 된 것 같다. 자신의 숙성을 스스로 대견히 여기는 듯한 자술이다. 저자의 만보완상(漫步玩賞)에 동참한 명사 문화유객(文化遊客)들의 훈수 객담도 별미다. 선뜻 길 나서지 못하는 독자는 안방에서 책을 벗 삼아 느긋이 와유(臥遊)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한국인의 특전이다.

* 이 글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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