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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하다

그는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술과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커밍아웃 경험담 중 제일 웃긴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친구가 굉장히 보수적인 자신의 친구-그는 자신이 게이인 걸 알면 친구가 자신을 혐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에게 몇 주일간 고민하다가 결국 커밍아웃을 했다. 그 보수적인 친구는 커밍아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너 그거 전에 술 마시다가 이야기했어. 기억 안 나냐?'

  • 주영준
  • 입력 2015.10.06 05:52
  • 수정 2016.10.06 14:12

친구가 있었다. 이십 대의 어느 날인가 내가 연애로 힘들어할 때, 그는 나를 꼭 껴안아주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뭐 이렇게 감수성 터지는 인간이 다 있나. 그래도 내가 힘들다고 이렇게 같이 울어주다니 참 고맙기는 하고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게이라고. 사실 네가 연애로 힘들어할 때 같이 운 것도 너 때문에 운 게 아니라 내가 억울해서 울었다고. 이성애자 니네들은 연애를 시작해도 지랄 헤어져도 지랄인데 나는 그럴 수가 없어서, 서러워서 울었다고.

나는 대체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당신의 연봉 혹은 학점이 잘 증명해주듯 세상에 노력한 대로 되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도 많은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적어도 친구의 성적 정체성이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함부로 대화 소재, 혹은 글의 소재로 삼는 종류의 잘못은 꽤 잘 피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해도 된다. 정확히는 해도 되는 친구가 하나 생겼다. 나는 입과 손가락이 싼 편이라 벌써부터 뭘 써볼까 하는 기대가 든다. 아, 친구의 약점을 잡아 협박한 결과는 아니다. 친구가,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했다. 그는 얼마 전에 <사랑의 조건을 묻다 : 어느 게이의 세상과 나를 향한 기록>이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냈고, 이제 세상을 향해 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려 한다. 두 개의 공개적인 북 콘서트가 잡혀 있고, 거기서 그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와 노래를 하게 될 것이다.

친구는 철저하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겨온 클로짓 게이였다. 그는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진지한 대학원생'이며, '한때 수도사를 꿈꾸었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 외에도 그의 보수적이고 엄밀한 생활세계를 나타낼 만한 일은 많지만 일단 책에 나온 이야기만 하자면 그렇다. 그런 세계 속에서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살아왔다. 물론 철저함이란 노력과도 같아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술과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커밍아웃 경험담 중 제일 웃긴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친구가 굉장히 보수적인 자신의 친구-그는 자신이 게이인 걸 알면 친구가 자신을 혐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에게 몇 주일간 고민하다가 결국 커밍아웃을 했다. 그 보수적인 친구는 커밍아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너 그거 전에 술 마시다가 이야기했어. 기억 안 나냐?'

커밍아웃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아 너무하네 진짜. 너랑 나랑 한두 해 친구로 지낸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지금 와서 말하냐?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냐.' 운이 좋은 친구인지 사람이 좋은 친구인지, 아니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졌는지. 그렇게 이십 대를 살아가며 그는 천천히 자신의 '철저함'을 깨나가기 시작했고, 게이 인권 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즈음 함께 들은 어느 수업에서 그는 '공개적 커밍아웃'을 시도했다. 그는 어설픈 영어로 더듬거리며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마 한국어 수업이면 민망해서 못 하지 않았을까. 교수는 '지금 여기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외부로 발설하는 자에게는 F를 주겠다. 너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라도 나는 반드시 내 권한으로 F를 줄 거고, 대학의 윤리위원회에 제보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안 그러셔도 되니 교수님께 연락이나 드리라고 해야지. 이십 대 후반을 그렇게 친구들에게 수공업적인 커밍아웃을 하며 보내다, 서른 몇 살이 되어 이제 그는 세상에 이야기하려 한다. I am gay. 나는 행복하다고. 그의 커밍아웃 경험담들은 대체로 나름대로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는데 이제는 그걸 못 듣게 되겠군. 이건 좀 아쉽다.

딱히 나한테 좋을 일은 없는데 나도 기분이 좋다. '아 이제 그놈이 지금껏 해온 그 수많은 패악에 대해 하나씩 글을 써서 복수해야지'하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쓰자니 기분이 좋아져서 쓸 말이 없다. 그저 그의 삶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당신들의 삶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그는 두 개의 '공개적인' 출판 기념 공연을 한다. 10월 8일 21시부터 신촌 '바 틸트(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52-151 2층)'에서, 10월 11일 13시부터 서촌 '기와하우스(서울 종로구 체부동 18-1)'에서. 그는 성가대와 민중가요 노래패와 밴드로 단련된 훌륭한 가수이기도 하니, 재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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