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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도시에 남은 마지막 양심 | 슈퍼 경찰 제임스 고든

고든이라는 캐릭터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배트맨 TV 드라마에 바버라 고든이라는 새로운 배트걸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뛰어난 두뇌와 용기를 지닌 그녀는 경찰국장 제임스 고든의 딸이었으며, 누구보다 가까이서 배트맨 활동을 지켜볼 수 있었던 아버지를 통해 배트맨을 보고 자신도 범죄와 싸우는 복면 투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고든은 딸이 배트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존재를 통해 배트맨의 자경단 활동은 단순히 경찰 업무의 일부가 아니라 고든의 가족과 직접 관련된 가정사로 변모하였다. 고담이라는 도시에서 끊임없이 가족의 목숨을 위협받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 이규원
  • 입력 2015.10.05 06:44
  • 수정 2016.10.05 14:12

[배트맨데이 기념 특별 연재 2] 어둠의 도시에 남은 마지막 양심

─슈퍼 경찰 제임스 고든

뿌리 끝까지 썩어 있는 조직에서 양심을 지키려 분투한 한 내부 고발자. 그가 그 조직의 수장에 오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가? 현실에선 누구나 말도 안 된다고 혀를 찰 일이 가능한 곳이 있다.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한 소년이 도시 전체의 범죄자를 상대로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곳. 아내를 죽이고, 딸을 반신불수로 만들고, 아들이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되게 한 어둠의 도시를 상대로 합법적인 싸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경찰관이 있는 곳. 바로 고담이다.

초창기: 범죄 정보를 얻기 위한 극중 장치에 지나지 않았던 고든

제임스 고든 고담 시 경찰국장은 원래 배트맨이 세상에 모습을 보인 1939년《디텍티브 코믹스》 27호의 첫 페이지, 첫 번째 컷에서부터 배트맨과 함께한 《디텍티브 코믹스》의 최고참이다. 그러나 초창기 그는 여느 슈퍼 히어로 만화의 경찰과 다름없는 평면적인 캐릭터였다. 그가 만화에 존재하는 목적은 자경단으로서의 배트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배트맨에 협조하지는 않았다. 처음 배트맨을 만났을 때는 그를 범죄자로 단정하고 수하의 경찰을 출동시켜 잡으려 하였으며, 배트맨이 범죄자 체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안 뒤에야 그에게 협조하였다. 그렇다고 배트맨과 아주 남인 것도 아니다. 고든이 (배트맨의 본모습인)브루스 웨인과 수시로 만나 함께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친구 사이이기 때문이다. 웨인은 고든에게 경찰이 지금 어떤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해결하기 힘든 사건은 무엇인지를 전해 듣고 배트맨이 되어 악당을 붙잡는다. 《액션 코믹스》에서 클라크 켄트 / 슈퍼맨이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범죄자의 정보를 빠르게 입수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고든 역시 배트맨이 범죄 상황에 빠르게 접근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물론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거나 배트맨의 활약상을 마지막에 정리하는 역할도 고든의 몫이었다. 그렇게 당시 작가들은 제임스 고든이라는 인물의 발전 가능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은 채 수십 년을 평면적으로만 활용하였다.

"화학왕 램버트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칼에 아들 지문이 있어?"

민간인 브루스 웨인에게 범죄 상황을 '친절하게' 알려 주고 있는

《디텍티브 코믹스》27호의 제임스 고든.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James_Gordon_(Earth-Two)?file=James_Gordon_Earth-Two_0001.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배트걸과 부녀 관계로 엮이며 비로소 '아버지'가 되다.

고든이라는 캐릭터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배트맨 TV 드라마(1967년 9월, "Enter Batgirl, Exit Penguin")에 바버라 고든이라는 새로운 배트걸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뛰어난 두뇌와 용기를 지닌 그녀는 경찰국장 제임스 고든의 딸이었으며, 누구보다 가까이서 배트맨 활동을 지켜볼 수 있었던 아버지를 통해 배트맨을 보고 자신도 범죄와 싸우는 복면 투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고든은 딸이 배트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존재를 통해 배트맨의 자경단 활동은 단순히 경찰 업무의 일부가 아니라 고든의 가족과 직접 관련된 가정사로 변모하였다. 고담이라는 도시에서 끊임없이 가족의 목숨을 위협받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 배트맨 만화의 작풍이 변하고 고담을 어둠과 광기의 도시로 묘사해 나갈 때, 제임스 고든은 경찰 조직의 수장으로서 배트맨의 협력자인 동시에 가족 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담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늘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인물로 변해 간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버지. 그는 딸의 안전을 위해 불의를 눈감을 것인가, 아니면 딸의 미래를 위해 부정부패와 싸우고 범죄자를 끝까지 추적할 것인가? 그렇게 고든은 단순한 경찰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때론 비겁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늘 고뇌하는 아버지의 딜레마를 지닌 인물로 발전했다.

"새로운 배트걸을 만나세요!"

1966년 TV 시리즈의 배트걸 설정이 만화로 연결된 《디텍티브 코믹스》359호의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359?file=Detective_Comics_359.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중심 이동: 웨인의 친구에서 배트맨의 동료로

배트맨과 제임스 고든 하면 가장 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릴 장면은 이것이다. 범죄가 발생하고, 고든이 경찰서 옥상의 배트시그널을 켜 고담의 밤하늘을 비춘다. 입에 담배를 물고 코트를 휘날리며 도시 저편을 응시하는 고든. 곧이어 배트맨이 나타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나누는 중 어느새 배트맨은 모습을 감추고, 고든은 계속 혼잣말을 하다 나중에야 이를 깨닫고 한숨을 내쉰다.

「미션 임파서블」 같은 TV 드라마에서 매번 다른 형태로 등장하지만 늘 "5초 뒤에 폭발한다."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연기를 뿜는 비밀 지령처럼, 고든이 배트맨에게 임무를 전달하는 장면 역시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는 유머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첫 등장 때만 해도 수시로 담배를 함께 피우며 친밀함을 보이던 브루스 웨인과는 어느새 멀어지고, 웨인의 친구가 아닌 배트맨의 동료가 된 것이다. 딸인 배트걸이 웨인의 정체를 아는 인물인 까닭에 굳이 고든까지 웨인의 친구일 이유가 없었던 것도 그가 웨인과 고민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대신 배트맨과 고든은 크리스마스 때에 서로 선물을 챙겨줄 정도로 인간적으로 친밀해졌다.

초보 경찰, 남편, 그리고 아버지

제임스 고든을 배트맨 스토리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한 작가는 1980년대 배트맨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배트맨: 이어 원』을 집필한 프랭크 밀러였다. 『이어 원』에서 고든은 시카고에서 경찰 생활을 하다 임신한 아내 바버라와 함께 고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예상을 초월하는 도시의 부패 앞에서 고든은 깊은 갈등에 빠진다. 그 와중에 그는 사라 에센이라는 동료 여경과 불륜 관계를 맺고, 바버라는 바버라대로 도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던 중 둘은 아들 제임스 주니어를 얻는다. 부패한 고담에서 정직한 경찰로 살아가야 하는 고든. 그가 고뇌하고 흔들릴 때 그의 가정 역시 위험에 빠지고, 부패에 정면에 맞서기로 결심해도 범죄자의 칼날이 가족들을 향하기에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그의 모습은 초보 영웅으로 좌충우돌하며 치열한 데뷔전을 치르는 배트맨의 모습과 겹치며 안타까움과 공감을 자아낸다.

한편 1990년대 들어 척 딕슨과 같은 작가진은 고든이 지닌 고뇌의 역사에 주목, 고담에 오기 전 시카고 시절의 고든을 그리려 시도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간 DC코믹스에서는 《배트맨: GCPD》, 《배트맨: 고든의 법》, 《배트맨: 고담의 고든》 등 고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니시리즈들을 내어놓았다. 그중 《고담의 고든》에서 그려진 시카고 경찰 시절을 보면, 고든은 그때부터 이미 많은 범죄를 해결한 지역 사회의 영웅인 동시에 동료의 부정부패를 끊임없이 고발하고 파헤치는 강직한 내부 고발자였다. 일과 대학 공부를 병행할 정도로 경찰 일에 열심이었던 고든은 동료의 범죄를 눈감아주지 못해 도리어 자신이 범죄자로 몰려 위험에 빠지고, 소박한 가정의 행복을 꿈꾸는 아내 바버라와의 관계는 점점 틀어진다. 여기서 살짝 곁가지로 빠지자면 두 사람이 『이어 원』에서 이사한 후 태어난 아들 제임스는 결국 2011년 스콧 스나이더의 『배트맨: 블랙 미러』에서 고든이 자신의 평생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양심'을 완전히 상실한 냉혹한 사이코패스로 배트맨 시리즈에 돌아오게 된다.

경찰로서 고든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막대한 수준이었다. 『블랙 미러』를 위시해서 뉴 52 시리즈의 최신작인 『올빼미 법정』, 『가족의 죽음』 등 스콧 스나이더의 배트맨을 보면 고든은 끊임없이 담배를 찾고, 주변 사람들은 계속 그에게 금연을 권유한다. 금연을 결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담배에 기대 스트레스와 싸우며 직장에서 버텨야만 하는 고든의 모습은 그가 보여 주는 갈등의 축소판과도 같다.

동료 경찰의 부패를 추적하다 도리어 범죄자로 몰리게 된 고든.

『이어 원』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배트맨: 고담의 고든》2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man:_Gordon_of_Gotham_Vol_1_2?file=Batman_Gordon_of_Gotham_2.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계속되는 비극을 딛고 다시 민중의 지팡이로

『이어 원』은 배트걸 아버지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고든을 더 입체적 인물로 만들었다. 그런데 프랭크 밀러가 『이어 원』에서는 정작 바버라 고든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않고 넘어간 덕분에, 그 퍼즐을 맞추는 책임은 후대 작가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고든의 가족이 겪게 되는 운명을 DC 코믹스의 평행세계별로 잠시 정리해 보자. 1930년대 골든 에이지 버전의 고든 가는 제임스 고든, 부인 바버라 고든, 아들 토니 고든이라는 구성으로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었다. 1960년대 실버 에이지 버전에서 고든은 일찍 아내를 여의고 바버라와 토니라는 남매를 혼자 기르는 인물로 나온다. 1980년대 《무한 지구의 위기》를 통한 세계관 통합 이후 DC에서는 《시크릿 오리진》이라는 시리즈로 모든 캐릭터의 탄생기를 새롭게 다듬는데, 여기에서 동생 로저 고든 부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조카딸인 바버라 고든을 자신의 딸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들어간다. 그렇게 친딸처럼 키운 바버라는 1988년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에서 조커의 흉탄에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이어 원』에서 불륜을 저지른 고든을 버리고 아들과 시카고로 떠난 아내 바버라는 몇 년 뒤 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보낸다. 불륜 상대였던 사라 에센 역시 고담을 떠나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그가 죽으면서 고담으로 돌아와 결국 고든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2000년, 고담 시가 지진에 휘말려 대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노 맨스 랜드』에서 사라 에센은 아기들을 구하려다가 조커의 손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다. 사라 에센의 죽음은 결국 이때 고든이 수십 년간 몸담았던 경찰을 은퇴하는 계기가 된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며 살아 온 까닭에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비극과 조커와의 악연. 물론 후일 다시 경찰국장으로 복귀하긴 하지만, 아들마저도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돌아오는 등 비극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고담의 양심, 배트맨의 자격을 얻다

이렇게 어느덧 '법의 밖에 있는' 배트맨과 대비되어 '법의 안에 있는' 경찰로서 고담의 양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제임스 고든. 그의 비중이 그래픽 노블 밖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늘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배트맨』, 『배트맨과 로빈』 같은 영화의 고든과 2000년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의 고든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대접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으며, 2014년 미국 FOX에서 방영된 드라마 「고담」에서는 명실상부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가 살해당한 직후인, 배트맨 없는 시기의 고담에서 정의를 위해 외로이 애쓰는 젊은 고든을 다룬 이 드라마는 높은 인기와 함께 현재 시즌2가 현지에서 방영 중이다.

이를 반영하듯 뉴 52 《배트맨》을 이끌고 있는 스콧 스나이더는 2015년 《엔드 게임》에서 배트맨이 실종된 이후 제임스 고든에게 새로운 배트맨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누구보다 강한 용기와 책임감을 지닌 인물. 그리고 브루스 웨인만큼이나 가슴 저린 사연과 분노를 품고 살 수 밖에 없는 인물. 그에게 배트맨의 코스튬을 입힌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발한 발상이다. 한때 배트맨에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인물이 배트맨의 자리까지 넘보는 캐릭터로 성장했다. 영상에서, 또 그래픽 노블에서 닥칠 고뇌와 역경을 딛고 그가 자신의 정의를 어떻게 지켜 낼지 그 행방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고담의 악당들에 맞서

제임스 고든은 어떤 활약을 보여 주게 될까?

「고담」시즌2 예고편

(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AzLGjtpb-lw)

TIP: 제임스 고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배트맨 스토리를 읽어 보려는 팬이라면 『이어 원』, 『킬링 조크』, 『블랙 미러』, 그리고 아직 정식 출간이 되지 않은 책 중에서는 『나이트 크라이즈』, 『고담의 고든』, (뉴 52) 『제로 이어』 등을 추천한다. 뉴 52 《배트맨》 시리즈는 세미콜론을 통해 계속해서 국내에 정식 출간될 예정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서 고든의 변화를 보여 주는 두 편의 작품,

『이어 원』과 『블랙 미러』 표지.

(사진 제공: 세미콜론)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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