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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01일 11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01일 14시 12분 KST

소설 읽는 시간

필립 로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은 그저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할 뿐이라고 답하며 자기 소설의 사회적 영향력을 냉소에 부친다. 그러나 질문이 거듭되자 그는 결국 오랫동안 여투어두었을 진심의 일단을 내비친다. 자신은 독자를 '다른 작가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설 속에 푹 빠지게 한 뒤(사실 이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독자를 소설 읽기 전의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인 우리가 잠시 그의 소설 속에 머문 뒤 다시 돌아가는 '읽기 전의 세상'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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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은 그저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할 뿐이라고 답하며 자기 소설의 사회적 영향력을 냉소에 부친다. 그러나 질문이 거듭되자 그는 결국 오랫동안 여투어두었을 진심의 일단을 내비친다. 자신은 독자를 '다른 작가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설 속에 푹 빠지게 한 뒤(사실 이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독자를 소설 읽기 전의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인 우리가 잠시 그의 소설 속에 머문 뒤 다시 돌아가는 '읽기 전의 세상'은 어떤 곳인가.

그들(독자들―인용자) 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바꾸고 설득하고 유혹하고 조절하려고 애쓰는 그런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최고의 독자는 이런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고 둘러싸인 의식을 풀어주기 위해 소설의 세계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작가란 무엇인가―파리 리뷰 인터뷰』, 권승혁·김진아 옮김, 다른 2014, 279면)

독자를 두고 세상과 내기하는 소설

필립 로스는 세상을 가혹한 전쟁터로 그려온 작가다. 그의 소설에는 어떤 형태로든 악전고투하는 인물들의 크고작은 전투가 그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가 그린 세상은 얼마나 완강하고 제멋대로였던가. 겨우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인물들도 인생의 잔혹한 우연이나 고약한 덫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그가 소설에서 가차없이 묘사해낸 세상은 미국 뉴어크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보고 느끼고 겪고 살아온 세계의 투영이고 반영일 것이다. 여기서 위의 인터뷰에 나온 작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실제 세계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소설이 개입할 자리는 거의 없다. 필립 로스의 한 소설에서 딸은 묘지에 흙을 뿌리며 죽은 아버지가 좌우명처럼 품고 있던 말을 아버지에게 다시 돌려드린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에브리맨』,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9, 13면) 이상하게도 나는 이게 작가인 필립 로스의 진짜 목소리 같다.

필립 로스의 인터뷰는 그가 자신의 소설에서 독자에게 내보인 강렬한 설득과 유혹, 조절의 노력이 실제 세상의 그것들에 맞서 있다는 사실을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환기한다. 그는 단 몇시간 독자를 자신이 만든 세계에 제대로 붙잡아두기 위해 그렇게 한다(물론 여기에 성공할 때 그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 '소설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고 둘러싸인' 세상을 상대로 내기를 벌이고 있다. 번역으로나마 그의 소설을 몇편 읽은 독자로서 말한다면 그의 내기는 성공적인 것 같다. 만일 그의 목표가 인터뷰의 문면 그대로라면 말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소설 속에는 대개 실제 세상보다 더한 소란이 있지 않은가. 죽음은 너무도 가깝게 묘사되고, 인간들 사이의 모욕과 갈등은 바닥까지 드러난다. 외면하고픈 비참과 고통이 낱낱이 표현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들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직접적 '현실'은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소설이라는 허구 속 이야기들이다. 그렇긴 해도 거기 '푹 빠져 있는' 동안 우리의 상상적 체험은 실제에 방불하거나 실제를 넘어서기도 한다. 우리는 적어도 세상의 소란을 잊기 위해서만 소설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셈이다. 좋은 소설은 거의 반드시, 그 또다른 소란 속에서 현실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무언가를 돌려준다. 여기에는 분명 필립 로스가 말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현실을 향한 소설의 열망

소설과 관련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주로는 이런저런 과제 때문에, 가끔은 그냥 좋아서 소설을 읽는다. 어떤 소설은 푹 빠져서 읽고 어떤 소설은 큰 감흥 없이 페이지를 넘긴다. 필립 로스 식 내기로 말한다면, 작가가 이길 때도 있고 작가가 질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시간이 지나면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대단한 소설을 읽었더라도 내 앞의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다. 그 현실은 대개 소설과는 무관한 자리에서 결정되어 나에게 이미 와 있다. 금과옥조가 있다면 정말,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일지도 모른다. 근사한 소설들은 외려 현실과의 낙차를 더 크게 만들며 나를 쓰라리게 하기도 한다. 좋은 소설이 주는 깊은 위안과 고양된 감흥, 정서적 인식적 충격도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만큼은 알게도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조금 알게 된 것도 있다. 작가들 역시도 그들의 내기 안에서 불안해하고 자주 좌절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야말로 늘 빈손으로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국문학을 둘러싼 비장하고 날선, 때로는 누군가를 짓밟고 모욕하는 논의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그이들에게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당신에게 문학은, 소설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그것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읽기에 필립 로스의 답변은 소설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냉정하고 실용적인 인식만큼이나 현실을 향한 소설의 열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의 저 완강함과 제멋대로에 대해 말할 때, 그는 그것들을 부서뜨릴 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테다. 적어도, 버티는 힘에 대해서라도. 무능의 수긍이 전투의 포기는 아닐 것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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