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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을 보는 이유

일본 엔터테인먼트업계를 장악한 국민 아이돌 AKB48의 전략 하나는 팬 투표에서 1등을 한 멤버를 센터에 세워 싱글을 내는 것이다. 응원하는 멤버에 이입하여 함께 성장해가는 시스템이지만 대신 팬은 음반을 많이 사서 투표권을 확보해야 한다. 놀라운 상술이지만 꿈을 사는 대가로 돈을 내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 수십 명의 멤버들 사이에서 누구는 얼굴, 누구는 노래, 누구는 개그, 누구는 성실함 등으로 자신의 장기를 내세워 인기를 끄는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 김봉석
  • 입력 2015.10.01 10:25
  • 수정 2016.10.01 14:12

원더 걸스가 돌아왔다. 2명이 나가고, 선미가 복귀하면서 4인조가 됐다. 악기를 하나씩 들고 있음에도 아직 밴드라 말하기는 망설여지지만, 수영복을 입고 연주하는 뮤직비디오는 좋다. 다만 무대에서 연주하는 걸 보고 있으니 안타깝기는 하다.

소녀시대와 원더 걸스가 자웅을 겨룰 때, 나는 카라의 팬이었다. 〈Rock You〉로 가창력 논란이 일었을 때 존재를 알았고, 리드 보컬이 탈퇴한 후 한승연이 게임 채널과 온갖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본 개그맨 극단 히토리가 열혈 팬이 되면서 일본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속사는 명곡 <미스터>가 나왔을 때 엉뚱하게 〈Wanna〉를 미는 만행을 저질렀다. 엉덩이춤이 엄청난 화제가 되었지만 뮤직비디오를 안 만들었고 1위도 하지 못했다. 후속 그룹 레인보우도 가장 좋았던 〈Mach〉는 뮤직비디오가 없고 홍보도 하지 않았다. 한심했다.

카라 이전에는 아이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적 취향은 청순 발랄한 소녀가 아니라 고혹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소피 마르소, 다이안 레인, 피비 케이츠, 브룩 쉴즈가 남학생들의 마음을 뒤흔들 때도 오로지 나스타샤 킨스키뿐이었다. <테스>의 순수한 그녀가 아니라 <캣 피플>의 애잔한 그녀가 좋았다. 밤이 되면 남자를 찢어발길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녀. 강수지나 김완선이 아니라 민해경이 좋았고, 마돈나와 신디 로퍼 대신 팻 베네터를 좋아했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속삭이는 가수도, 섹시함을 강조하며 나를 봐 주세요 라는 것 같은 여배우도 그저 그랬다. 내 취향은 야하지만 당당한 그녀들이었다.

S.E.S.와 핑클이 나왔을 때도 관심이 없었고, 베이비복스만 약간 좋아했다. <킬러><인형><우연> 등은 지금도 아이폰에 들어 있지만 그때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찾아 듣지 않았다. 아이돌에 무관심하다가 카라를 만났고, 비슷한 시기에 모닝구 무스메의 <리조난트 블루>와 조우했다. 영상을 보려고, 공연 DVD를 구하려고 피디박스 등을 뒤졌다. 당시 모닝구 무스메는 침체기였다. <러브 머신>과 <연애 레볼루션> 등으로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방송에도 별로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다카하시 아이가 리더였던 '플라티나'기는 모닝구 무스메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시기다. 그중 3명의 멤버가 한꺼번에 졸업하며 남은 다카하시 아이, 니이가키 리사, 미츠이 아이카, 다나카 레이나, 미치시게 사유미 5인이 모든 보컬 파트와 춤을 소화하던 시기는 정말로 빛이 났다.

그때였다. 아이돌에게 끌리기 시작한 때는. 카라와 모닝구 무스메를 보면서 즐거웠고, 힘을 얻었다. 지금도 기분이 처져 있을 때면 5인의 모닝구 무스메가 부르는 〈I'm Lucky Girl〉 공연 영상을 유튜브로 본다. 카라 이후로 나오는 걸 그룹 노래는 거의 다 들어본다. 티아라, 애프터스쿨, 포미닛, 레인보우, 갱키즈, 시크릿, 스피카, 에프엑스, 스텔라, 걸스데이, AOA 등등. 소녀 취향은 그저 그렇다. 착하고 순수한 노래만 부르면 관심이 가지 않는다. 롤리타 콤플렉스는 아니다. 아니 어리고 예쁜 여성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끌리지는 않는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에는 여고생이 단골로 등장한다. 10대 소녀의 일상을 한없이 매력적으로,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담아낸다. <하나와 앨리스>에 나오는 소녀들을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성적인 욕망이 아니다. 이와이 순지는 말한다. 사춘기의 소녀들은 성인의 10배 이상의 경험과 시간으로 살아간다고.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느끼는 순간이 너무나도 빠르고 응축되어 있다. <하나와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슈즈도 없이 발레를 추는 장면은, 아름답다. 순간에 몰입하여 무아지경에 이르는 그녀의 순간에 함께 빠져든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는 작렬하는 청춘의 순간을, 그 찰나를 영원으로 확장시킨다.

AKB48

그녀들에게 반하는 것을 퇴행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학개론>이 부추긴, 첫사랑에의 환상. 그 시절의 나는 순수하고도 나약했다는 자기 연민과 변명.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아예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걸그룹은 노골적으로 속삭인다. 아이돌이 가상의 연인으로서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반면 성장해가는 아이돌을 보며 대리만족하기도 한다. 일본 엔터테인먼트업계를 장악한 국민 아이돌 AKB48의 전략 하나는 팬 투표에서 1등을 한 멤버를 센터에 세워 싱글을 내는 것이다. 응원하는 멤버에 이입하여 함께 성장해가는 시스템이지만 대신 팬은 음반을 많이 사서 투표권을 확보해야 한다. 놀라운 상술이지만 꿈을 사는 대가로 돈을 내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 수십 명의 멤버들 사이에서 누구는 얼굴, 누구는 노래, 누구는 개그, 누구는 성실함 등으로 자신의 장기를 내세워 인기를 끄는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의 장기를 꾸준하게 갈고 닦아 나름의 성취를 이뤄낸다. 나름 공평하다.

아이돌을 보는 주된 이유는 이와이 순지의 마음과 같다. 그들이 열심히 뭔가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아찔한 떨림. 누구는 도저히 뜨지 않아 섹스어필을 강조하고, 누구는 적절하게 팬의 애간장을 태우는 수법을 쓰기도 하지만, 괜찮다. 세상 어디에 완벽하게 순수한 무엇이 있을까. 아이돌은 완벽한 이상향을 제공하는 대상이 아니다. 10분 내에 희로애락을 돌아가며 만끽하고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사춘기의 소녀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가상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샹그릴라다. 잠깐이나마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걸그룹을 보면서, 가슴과 엉덩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보기는 하지만) 그들이 흘리는 땀을 본다. 그 시절에 카라와 모닝구 무스메에게서 보았던, 그 열정과 땀을. 가상의 이미지일지라도, 어른이 된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을 동경하니까.

* 이 글은 <아레나>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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